“여기서 주역을 읽어 보신 분 있나요? 없죠.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놀랐을 겁니다. 주역 공부하다 보면 점쳐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은데…, 맞아요. 점치는 법에 관한 책이죠. 하지만 전 주역 편찬한 사람들이 중국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이상수 동양철학박사는 지난 10월 23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주역을 통해 본 동아시아의 사유 방식’에 관해 강연했다. 그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에서 <주역>을 연구해 석사학위, 제자백가의 논리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했고, 웅진씽
1592년 5월 23일, 해 질 무렵, 부산 황령산 봉수대 봉수군 배돌이는 다급하게 산꼭대기로 뛰어 올라갔다. 바다를 내려다보니 적선들이 부산포를 향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8700명이 배 7백 척에 나눠 타고 부산포로 쳐들어온 것, 즉 7년을 끈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첫 보고 올린 황령산 봉수대봉수군 배돌이는 바로 봉수대로 올라가 다섯 연대(煙臺) 중 네 곳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웠다. 적이 침입하면 네 개의 연기나 횃불을 올리게 돼
신원불명의 ‘교수’라는 남자가 8명의 범죄자를 모아 외딴 저택에서 무장강도 훈련을 한다. 목표는 스페인 조폐국 점거다. 조폐국을 터는 것이 아니라 장기 점거를 하면서 24억 유로를 찍어내 이를 반출한다는 계획이다. 한 명이라도 잡힐 것에 대비해, 이들은 실명을 밝히지 않고 세계 유명 도시에서 이름을 딴 코드 네임을 정한다. 여러 달 훈련을 마친 뒤, 일당은 살바도르 달리 캐리커처 가면을 쓴 채 조폐국을 장악한다. 외부 벙커에 숨은 교수는 수도를 통해 연결한 유선으로 일당과 연락하며 이들을 지휘한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협상 전문가
당신이 우리를 보는 방식당신은 참 ‘의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의무와 책임을 다해라.’ 당신이 그 말을 할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꼭 슬퍼집니다. 당신은 내게 국가이고, 부모이고 친구이며, 직장 동료이고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우리는 성소수자들입니다.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이후, 당신을 더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저는 클럽에 가지 않았으니 찔릴 게 없어야 하는데, 왜 마음이 불편하고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까요? 맞아요, 이 시국에 클럽에 가는 짓은 나와 타
‘위안부 사기극’에 넘어갈 뻔한 우리 할머니작년 겨울 대구가톨릭대학교 도서관 게시판에서 화제가 된 광고가 있다. ‘경력 무관, 학력 무관, 나이 무관, 급여 월 300 이상’이라는 구인광고였다. 광고 하단에 있는 QR 코드를 찍으면 이런 글이 떴다. ‘1930년 그들도 속았습니다.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방식은 취업사기로 인한 유괴, 인신매매 등 명백한 강제징용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광고가 사기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광고였는데,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친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열예닐곱 나이 할머니는 높은 급여를 받
지상 25m의 둥근 방과 n번방4월, 나는 살아서 벚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봄을 맞는다. 신문에 실린, 사람들에게 부정당해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을 사람들 이야기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노조를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삼성에 해고당한 뒤, 지상 25m 위에 떠서 투쟁하고 있는 김용희 씨가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공포와 n번방이라는 ‘대형 뉴스’가 터진 뒤에도 여전히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있을 자책을 가슴으로 느낀다. 김용희 씨는, n번방 피해자들은 이 밤에 잠을 못 이룰 것이다. 마음 속 목소리는 주로 밤에 찾아온다. 목소리가 너를
취재진을 향해 큰절을 하자 숱이 적은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치고는 정정해 보인다. 이만희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총회장은 지난 2일 기자회견에서 많은 말을 했지만, 곤란한 질문이 들어오면 대답을 얼버무렸다. 인근 도로에서는 신천지에 심취해 가출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그를 규탄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구세주’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모습이었다.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온다면그런 모습을 보고 신천지 신자들이 어떻게 그가 신의 대리인이라고 믿는 것일까? 교주를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가장 큰 요소가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고 주장했다. 기업가가 기술혁신 등을 통해 낡은 제품이나 생산방식, 유통구조 등을 깨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게 창조적 파괴인데, 이것이 경제발전을 이끄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아이폰을 선보인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으로 세계를 연결한 마크 저커버그 등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경제 지형을 바꾼 대표적 기업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슘페터는 혁신적 기업가들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경제성장을
“괴테는 태어나기 2000년 전 로마의 거대문물을 그랜드 투어했고, 연암은 자기가 살던 시대 선진 문물을 탐사했어요. 괴테는 과거를 반추하고 싶었고, 연암은 지금 세상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열하 기행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연암을 만들어냈고, 괴테의 1년 6개월 그랜드 투어는 오늘날 괴테를 만들어냈어요.” 주민 공정여행 놀루와 대표이기도 한 조문환 작가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괴테와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인문기행’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그는 시인 겸 작가로서 집필활동을 하면서 협동조합
넷플릭스에서 <하산 미나즈의 이런 앵글>을 클릭하면, 이목구비 뚜렷하고 수염을 기른 청년이 육각형 무대를 긴 다리로 겅중대며 돌아다닌다. 손을 흔들며 무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앉은 청중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시사 코미디언 하산 미나즈다. 2017년 백악관 기자단 초청 만찬에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러시아 대선개입 의혹 등을 풍자하고, 넷플릭스 <하산 미나즈의 금의환향>이 성공하면서 입지를 굳혔다. <데일리 쇼>를 이끌었던 존 스튜어트나 그 후임인 트레버 노아처럼, 그는 코미디언이면서 시사를 진중하게 다루는 언론인이다. 코미디쇼
항구도시 부산 사람들에게, 일본은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까운 나라다.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가 보이고, 일본 라디오 방송 전파와 텔레비전 영상이 잡힌다. 가까운 거리 때문일까? 임진왜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일본이 조선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에는 일제강점기 때 흔적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남아 있다. 이전에는 그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십여년 전부터 근대를 기억하기 위해 보존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야만과 침탈을 두둔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구별하자는 취지다.적산가옥 ‘정란각’ 개조한 카페부산항 배후지역인 동구 수정동과 초량동은
“무·편·나·오·뻔, 저는 한국언론을 망치는 ‘기레기’의 특징을 이 다섯 개 첫 글자로 요약합니다. 첫째가 ‘무지’. 언론계에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공부하지 않고 자기가 모든 걸 다 알고 다 해석할 수 있는 양 처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 ‘편향’돼 있어요. 우리가 끊임없이 각성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힘 있는 쪽으로 편향하게 됩니다. 다음은 ‘나태’. 출입처에 가서 다 받아 적습니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만나서 대접받고 다니고 ‘오만’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보도에 대해 무책임하고 ‘뻔뻔’하게 나옵니다.”
아버지는 1960년 부산 주한미군 하야리아 부대 정문 앞에 있는 집에서 다섯 남매 중 넷째이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한국인보다는 일본인에 가까웠다.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해방 직후 20대가 되어 돌아온 그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굴종해야 한다고 믿었고, 정해진 시간에 일본 방송을 틀고 체조를 했다. 일본어와 영어를 잘해 미군 통역관을 맡기도 했지만,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고지식한 면이 많아 6.25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할아버지는 일자리를 얻었다
예일을 비롯한 미국 여러 대학에는 참전 군인들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낭송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내용 중에서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영웅의 활약도 많이 다루지만, 필록테테스가 홀로 섬에 10년간 버려지는 대목을 빠뜨리지 않는다. 다른 왕들처럼 그도 7척 배를 이끌고 트로이 원정에 나섰지만, 도중에 들른 섬에서 물뱀에 다리를 물린다. 통증을 참지 못해 비명을 계속 지르고 상처에서 악취까지 나자, 그리스 연합군은 그를 근처 섬에 버리고 간다. 그는 활로 작은 동물을 사냥하며 연명한다.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 실수로
부산은 항구 치고는 높은 산이 많은 도시다. 바다와 바로 맞닿아 있는 해발 500~600m를 넘는 산들이 둥그렇게 항만을 둘러 싸고 있다. 높은 산자락이 가파르게 바다로 이어져, 해변에 평지가 별로 없었던 곳이다. 그래서 부산역에서 남포동까지 구 중심가는 바다를 메꾼 매립지였다. 평지가 없으니 집들이 산중턱을 거쳐 9부 능선까지 빼곡하게 들어선, 산복(山腹) 도시다.6.25 때 파병된 유엔군 병사들이 밤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해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외항으로 들어서면서 불야성을 이룬 고층빌딩군을 보고 “아니 이렇게 발전
요즘엔 ‘말’만 가지고 하는 프로그램이 드물다. 2000년대 <슈퍼TV-일요일은 즐거워>나 <상상플러스> 등 시대를 풍미했던 게임 토크쇼들이 생각나는 JTBC <어서 말을 해>는 지난 8월 13일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소통이 중요한 요즘, ‘말의 고수’들이라는 연예인들이 나와 퀴즈를 풀고 입담을 과시하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의 말 센스를 키워주는 퀴즈쇼를 표방한다. 전현무와 박나래가 오랜만에 같이 출연해 화제가 됐다. <상상플러스>의 향수, 그러나...첫 회에 전현무가 말한다. “너무 상플이잖아!”
“일본은 사죄하라.”“아베를 규탄한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던 지난 8월 14일, 민중당 내 조직인 ‘부산여성·엄마민중당’ 소속 윤서영(42) 인권활동가가 부산 초량동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일렬로 늘어선 경찰관들을 등지고 그가 힘차게 선창하는 구호를 200여명의 집회 참여 시민들이 따라 외쳤다. 주먹을 쥐고 팔을 크게 흔드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일본총영사관을 마주 보고 앉은 ‘평화의 소녀상’은 고요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지역 청년과 ‘미래세대가 세우는 소녀상’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