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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 행동 모방한 악당들 밉지 않네

기사승인 2020.08.12  14: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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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정 PD outsidebox94@gmail.com

- [미디어비평]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

신원불명의 ‘교수’라는 남자가 8명의 범죄자를 모아 외딴 저택에서 무장강도 훈련을 한다. 목표는 스페인 조폐국 점거다. 조폐국을 터는 것이 아니라 장기 점거를 하면서 24억 유로를 찍어내 이를 반출한다는 계획이다. 한 명이라도 잡힐 것에 대비해, 이들은 실명을 밝히지 않고 세계 유명 도시에서 이름을 딴 코드 네임을 정한다. 여러 달 훈련을 마친 뒤, 일당은 살바도르 달리 캐리커처 가면을 쓴 채 조폐국을 장악한다. 

외부 벙커에 숨은 교수는 수도를 통해 연결한 유선으로 일당과 연락하며 이들을 지휘한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협상 전문가 라켈 무리요 경감이 등장한다. 두 사람의 치열한 지능 대결과 여론전은 드라마 <종이의 집>을 긴장과 스릴로 몰아가는 스토리텔링의 주축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 인기 2위에 올랐다.

   
▲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 시즌 4 공식 포스터. 현재 시즌 5를 제작하고 있다. ⓒ Netflix

무장강도 일당은 의적도 무뢰한도 아니다. 그들은 정부와 은행 돈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폐국에 침입한 뒤 직접 돈을 찍어 반출하려 한다. 장기간 점거가 필요해 인질극을 벌이되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은 약자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쓴다. 예외가 있긴 하다. 안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데도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헬리콥터를 동원해 공중에 돈을 뿌린다.

일당은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아들이 인질을 살해했다고 하자 함께 일당에 합류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일당 중 한 명은 경찰이 여론전을 펼치면서 자신에게 미성년자를 납치해 성을 착취한 적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오명을 씌우자 이에 분노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강도들은 선과 악을 넘어서는 복잡한 인물들이다.

반면, 체제를 받치고 있는 엘리트들은 더욱 단순하게 그려진다. 특히 남성 엘리트들은 체제에 기생하는 위선자들이다. 1, 2시즌에서 프리에토 대령은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 대응을 주장하다 일당에게 당하면서 트라우마를 겪는다. 3, 4시즌에서 타마요 대령은 날카로운 판단력을 보여주지만, 일이 틀어지자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긴다. 인질로 잡힌 조폐국장은 안정된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함께 인질로 억류된 불륜 상대인 비서를 외면하고 감언이설로 위험한 상황으로 내몬다. 비서는 비겁한 조폐국장에게 실망한 뒤 자신 안의 반체제 성향에 눈을 뜨고 강도 일당에 합류한다. 드라마는 일당의 강도 행위를 혁명과 범죄 사이에 놓는다.

자본과 체제에 대항하는 싸움인가, 범죄인가

교수는 무리요 경감에게 정체를 숨기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가 사랑에 빠진다. 시즌 1 끝자락에 무리요에게 정체를 들키자 교수는 그녀를 납치한다. 체제를 지키는 교육을 받은 무리요 경감에게 교수는 범행에 함께 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2011~2013년 유럽중앙은행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파산 위기에 빠진 유럽 은행들을 살리기 위해 천억대 유로를 매년 발행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 돈은 은행을 통해 부자들에게 갔지만, 사람들은 그 일을 ‘강도질’이라고 부르는 대신 ‘유동성 공급’이라 부른다고 설득한다.

   
▲ ‘교수’는 경감을 납치한 뒤 50유로짜리 지폐를 찢어 보이며 흐느낀다. ⓒ Netflix

“이건 그저 종이일 뿐이야.” 

그의 말대로 유럽중앙은행은 ‘장기대출프로그램’(Long Term Refinancing Operation; LTRO)이라고 명명한 계획에 따라 유로화를 대량 발행해, 1%대 저금리로 3년간 유럽 은행들에 빌려줬다. 당시 구제를 거절당한 은행은 하나도 없었다. 자본가들의 경영 실패로  일어난 위기였지만, 이 통화 추가 발행을 통해 자본가들의 수입이 유지됐다. 부담은 가계로 넘어갔고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다. 

감정에 잘 흔들리는 인물들과 가끔 느슨해지는 전개 때문에 <종이의 집>은 다른 범죄 스릴러 명작보다 속도와 긴장에서 오는 쾌감이 덜하다. 하지만 무장강도의 동기에 뼈아픈 현실을 반영한 덕택에 세계적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교차하는 성별 서사

무장 강도의 ‘당위’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일당은 반쯤 영웅이 된다. 그런데 이들의 영웅 서사는 남녀가 각각 다르다. 교수에게 강도질은 자기 아버지와 형을 애도하는 ‘의식’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이 모순된 유럽 시장경제 구조에 희생됐다고 믿는다. 그가 아버지나 형을 생각할 때 흐르는 배경음악은 우리나라 ‘임을 위한 행진곡’과 비슷한 이탈리아 민중가요 ‘벨라, 챠오’(Bella, Ciao; 잘 가오, 내 사랑)이다. 

남성 화자가 나치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나서면서 여성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는 가사는 낭만적이지만 남성주의적이다. 이 곡을 배경으로 교수는 형 생전에 함께 세운 강도 계획을 실행한다. 그는 대체로 냉정하고 치밀하지만, 갑자기 감정적으로 서툴게 대응하기도 한다. 충격을 받고 당황해서 계획을 망치기도 하고, 혼자 떠안고 고민하다가 동료의 신뢰를 잃을 뻔하기도 한다. 드라마는 그의 치밀함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한편, 감정에 어수룩한 그의 허점도 교차시킨다.

   
▲ 나이로비는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 Netflix

강도 일당에서 여성 리더 격인 나이로비의 이야기는 교수의 남성적인 서사와 대비된다. 나이로비는 자칭 타칭 ‘라 푸타 아마’(La Puta Ama; XX 여두목)이다. 카리스마가 강하고 타인의 상처를 잘 보듬어주는 캐릭터다. 작중 인물 중 감정 표현에서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공감 능력이 오히려 독이 되곤 한다. 인질을 대할 때 통제와 배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감정의 부담을 못 이겨 지휘를 스스로 포기하고, 모성애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그의 사연도 교수와 대비된다. 교수는 아버지와 형의 보살핌을 받는 쪽이었지만, 나이로비는 홀로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마약을 팔다 체포되고 양육권을 잃는다. 아버지와 형을 추모하는 교수에게 강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만, 나이로비에게는 미래에 아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료에게 의리를 지키며 강도질의 스릴을 누구보다 즐기기도 한다. 과거에 묶여있는 교수와 달리, 그는 강도를 미래를 꿈꾸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직업으로 여긴다. 밝고 씩씩한 그의 죽음으로 드라마는 강렬한 비장미를 얻는다. 일당은 이 죽음을 계기로 자기들 사이에 생긴 갈등을 봉합하고 결속을 다지는데, 이런 상황 전개는 시청자가 드라마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는 ‘종이로 만든 집’일까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달리의 캐리커처 가면을 쓴 이들의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일당 한 명 한 명은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다. 언론을 통해 조폐국을 장기 점거하고 있는 일당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들은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

드라마가 이들을 개성 넘치는 영웅들의 집합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남의 돈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성을 확대 공급한다는 명분으로 무장하고 있다. 실상은 ‘돈’ 문제로 이런저런 아픔을 겪은 상처투성이 인간들이다. 교수는 이들의 다양한 사연이 결국 ‘돈’으로 빚어진 것임을 암시하고, 그것을 분배의 불평등이 일으키는 사회체제 때문이라고 암시한다.

<종이의 집>은 뒤집어보면 성격이 제각각인 강도 일당이 돈 때문에 억울한 일이 있었다는 공통점 하나로 차이를 뛰어넘고 연대를 맺는 이야기다. 이들은 자본가들이 ‘종이’에 불과한 유동성을 공급해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폐국을 점거해 직접 지폐를 발행한 이들의 행동이 그것을 반증한다. 돈이란 정말 종이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 사회는 ‘종이로 만든 집’에 불과한 것일까?


 

편집 :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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