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국가’ ② 차별

당신이 우리를 보는 방식

당신은 참 ‘의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의무와 책임을 다해라.’ 당신이 그 말을 할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꼭 슬퍼집니다. 당신은 내게 국가이고, 부모이고 친구이며, 직장 동료이고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우리는 성소수자들입니다.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이후, 당신을 더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저는 클럽에 가지 않았으니 찔릴 게 없어야 하는데, 왜 마음이 불편하고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까요? 맞아요, 이 시국에 클럽에 가는 짓은 나와 타인을 위험으로 내모는 어리석은 짓이죠. 

그런데 저는 차마 클럽에 갔다는 우리 중 일부를, 범죄를 지은 것처럼 ‘자수하라’는 말에 더 숨어버린 이들을 질타할 수 없습니다. ‘일반’ 여러분도 두려워하는 코로나 환자 딱지가 ‘이반’인 우리에게 올 때, ‘이태원’까지 덤으로 딸려옵니다. 이 ‘이태원’ 딱지는 타자를 향한 공포와 자기가 아는 세상 그 너머를 보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을 건드려 당신과 우리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우리는 숨 쉬고 다니기 힘들었어요. 우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농담거리로 삼으면 멈칫합니다. 특히 당신이 내 옆자리에서 말할 때는 어색하게 웃기까지 하느라 더 괴롭습니다. 기사를 검색하다 ‘성소수자들은 문란하다’며 편견을 일반화하는 댓글을 보며 한숨을 쉬곤 합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지난 20년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성소수자 문화는 양지로 올라왔습니다.

▲ 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 공동체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6월은 ‘성소수자 인권의 달’로, 이때를 기점으로 퀴어문화축제가 활발히 열린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전국 각지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들은 문화축제를 온라인으로 대체하고 있다. ⓒ pixabay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다른 사회적 약자들처럼,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틀에 가둡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가 기대하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더 그 틀에 스스로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늘 당신의 시선을 느낍니다. 우리 중에서 그곳에 간 이들은 잠깐이라도 세상의 눈길을 피해, 우리 문화 안에서 잠시 편안하게 있고 싶었을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개성이든 드러내면 삶이 피곤해지는 건 당신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런 개성 중에서도 성소수성은 유독 자극적이고 일반화의 오류가 심한 낙인입니다. 예를 들어,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를 딱 한 사람 아는데, 그 사람만을 보고 ‘모든 성소수자는 이 사람 같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재단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2등 시민의 외침

우리는 이 나라의 2등 시민일 뿐입니다. 국가가 규정한 ‘정상’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빼앗긴, 국민이라면 당연한 행복 추구권을 위해 투쟁해야 하니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맺은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몸과 다른 내 성별을 공문서에 기재하려면, 꾸준히 내 권리를 주장하는 한편,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튀는 행동을 하지 말고,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심지어 악의를 가지고 던진 말에 받은 상처를 하소연해선 안 돼요. 당신은 우리가 없는 권리를 얻어내는 주제에 무슨 불평할 자격이 있냐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당신 말에 따라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도, 일부가 당신 말을 무시하고 자기를 드러내 버리면 우리는 다 같이 손가락질당합니다. 그저 우리가 우리여서 거부하는 사람과 일터가 여전히 많습니다.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우리에게 기다리랍니다. 기다리라는 말, 익숙하지 않은가요? 세월호에서 학생들이 들었던 말이고, 백인 목사들이 버밍햄 감옥에 갇힌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낸 편지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목사들은 킹 목사가 이끈 평화 시위가 불법이기 때문에 “현명하지 못하며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라고 강변했어요.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은 오로지 법정에서만 이뤄져야 하고, 법원의 판결에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가 답신인 <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에 썼듯, 그때는 손 놓고 기다린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려면 행동해야 합니다.

다시 차별금지법이 발의됐습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라고 전부를 지칭하기엔 너무 다양합니다. 우리는 부자와 빈자, 고학력자와 저학력자에 성적 정체성도 다 다릅니다. 스스로를 특정 성별로 규정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하고, 연애 감정은 느끼지만, 어느 대상에게도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데도, 세상은 우릴 한 덩어리로 묶어 ‘비성소수자’가 주류인 국가에 위협이라 여깁니다. 에이즈를 퍼뜨리고 다닌다는 근거 없는 말은 둘째 쳐요. 성소수자가 미디어에 나오면 아동에게 잘못된 성적 지향성을 ‘전염’시킨다 믿습니다. 단군 이래 동성애 청정국이라며, 서양에서 들어온 유행으로 치부하기도 해요. 헛웃음이 나옵니다. 성적 지향이 전염된다면, 어려서부터 미디어에서 ‘비성소수자’ 남녀의 연애만 보고 자란 우리는 왜 모욕이나, 길게 설명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하며 성소수자를 자처할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근엄하게 허황된 비난을 참고 견디라고만 하실 건가요?

▲ 정의당을 중심으로 의원 10명이 지난 6월 29일 가까스로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법안은 모든 사람을 성별과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에 따라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고, 악의적으로 차별할 경우에는 손해 배상을 하도록 했다. 차별금지법은 그동안 7차례나 발의됐지만 번번이 본회의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 KBS

다시 차별금지법이 발의됐습니다. 소수정당과 몇몇 의원이 모여 간신히 올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다시 가짜뉴스들이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이번에도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역차별이라고 선전합니다. 다수당 의원들은 이들의 공세가 무서워 거의 움직이지 않을 거란 전망도 나옵니다. 지난 8일 종교 지도자들이 정의당과 함께 한 간담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며 일부의 의견이 과대 대표됐다고 밝혔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 희망은 있습니다.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20만이 넘는 국민이 차별금지법 반대 청원에 동의했습니다. 몇몇 목사는 땡볕에 나와 차별금지법이 ‘목사처벌법’이며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를 반대한다고만 해도 붙잡혀간다고 가짜뉴스를 퍼뜨립니다. 당연히 구금을 위해 수사와 재판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조항은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안전장치일 뿐입니다. 보수기독교계가 주류인 미국에서조차 인정되는 차별금지법이 이 땅에서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당신이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듯이, 우리도 다르지 않게 살아갑니다. 일상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조심할 이유가 당신보다 하나 더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세요.  


지난 가을학기에 연재한 [청년기자들의 시선]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봄학기 [청년기자의 시선2]는 현상들 사이(Between)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갈등과 대립 너머(Beyond)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국가’이다. ‘뉴노멀’을 요구하는 '위드코로나' 시대, 국가도 새로운 비전과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수도권, 차별, 국민' 세 키워드로 국가의 정체성과 역할을 돌아본다. (편집자)

편집 : 김은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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