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⑧ 부산 ‘문화공감 수정’

항구도시 부산 사람들에게, 일본은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까운 나라다.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가 보이고, 일본 라디오 방송 전파와 텔레비전 영상이 잡힌다. 가까운 거리 때문일까? 임진왜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일본이 조선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에는 일제강점기 때 흔적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남아 있다. 이전에는 그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십여년 전부터 근대를 기억하기 위해 보존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야만과 침탈을 두둔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구별하자는 취지다.

적산가옥 ‘정란각’ 개조한 카페

부산항 배후지역인 동구 수정동과 초량동은 부산에서도 특히 일본문화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부터 일본 상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개방된 뒤 조선시대부터 일본인 거주지역인 왜관(倭館)이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인 거류지로 출발한 왜관은 일제 때는 조선침략의 전초기지 구실을 했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초량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오면 만나는 일본총영사관 앞에는 ‘강제징용 노동자상’과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일제의 야만과 폭력을 되새기는 조형물이다. 그 앞에서 수요집회와 토요집회 등 아베를 규탄하는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 부산시 동구 수정동에 있는 카페 ‘문화공감 수정’. 기와와 고목이 건물의 연륜을 말해 준다. © 박서정

그 총영사관 뒤 언덕길을 따라 북쪽으로 500m쯤 올라가면 일제의 침탈과 폭력을 두둔하지는 말되 기억하자는 공간이 있다. 일제시대 적산가옥 ‘정란각’을 개조한 카페 ‘문화공감 수정’이다.

이 집은 1943년에 일본 섬유∙무역회사 중역 출신인 다미다 미노루(玉田穰)가 지었다고 한다. 일본 무사계급이 주거 양식으로 많이 사용하던 쇼인즈쿠리(書院造)식으로 지은 목조건물이다. 액자를 걸거나 도자기를 진열해 두는 2층의 도코노마를 비롯한 내부 공간과 목조 가구, 정원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일본식 건축물 중 규모나 의장 공간구성이 뛰어난 고급주택으로, 일제 강점기 근대 주택사와 생활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해방 후 한국 사람에게 ‘적산(敵産, 적의 재산)가옥’으로 불하된 뒤 1960~70년대에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고급 요정으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정란각(貞蘭閣)이란 이름이 붙었다. 주로 일본 고위관리들이 드나들었고 한국인은 출입이 금지됐다고 한다. 한창 번성할 때는 종업원이 200명이나 됐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2007년 7월 3일에 등록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됐고, 2010년에 문화재청이 건물과 주변 터를 매입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를 맡아 ‘일제 수탈의 역사적 사실과 아픔을 간직한 공간으로 보존하기 위해’ 2012년부터 4년 동안 시설을 복원했다. 2016년 6월 개소식을 한 뒤 부산 동구노인종합복지관과 문화유산신탁이 함께 전통찻집 ‘문화공감 수정’의 문을 열었다.

▲ ’문화공감 수정’의 문을 들어서면 키오스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매화꽃차나 맨드라미차, 당아욱꽃차 등 우리 전통차를 주문하고 돈을 지불한 뒤 티켓을 뽑아 주방에 건네면 차를 달여 내준다. © 박서정

일본식 정원 사이 장독대와 배추

집안으로 들어서면 본채를 둘러싼 마당에는 자갈이 깔렸고, 작은 크기로 다듬어진 나무들이 다소곳하게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다. 석등과 징검돌이 정갈한 느낌을 더해준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된 일본식 정원인가 싶다가, 장독대를 발견하면 ‘기분 좋은’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본채는 한쪽 면 전체가 창으로 돼있는 등 유난히 창이 많고 미닫이문들이 이어진다.

▲ 정원에는 작고 아담한 꽃나무들을 분재처럼 심어놓아 깔끔한 느낌을 준다. 기와장식이 튀는 듯하면서 정원과 제법 잘 어울린다. © 박서정
▲ 정원 안에 놓인 장독대(왼쪽)와 꽃배추를 심어 놓은 꽃밭(오른쪽). 이런 부조화가 일본식 정원이주는 인공적인 분위기를 많이 덜어 준다. © 박서정
▲ ’문화공감 수정’ 본채 뒷 모습.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 구조와 외관을 보여준다. © 박서정

미로 같은 1층, 초량의 ‘근대역사박물관’

‘문화공감 수정’ 1층은 근대 초량의 역사박물관처럼 꾸며졌다. 이 건물의 역사를 담은 사료와 사진은 물론, 20세기 중후반 이곳 수정동과 초량의 곳곳을 담은 흑백사진과 인형 등 근대 초량을 돌아볼 수 있는 소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차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잔을 내려놓고 둘러볼 수 있는, 초량과 수정동의 근대를 기록한 ‘박물관’이다. 복도와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일본식 가옥의 특성이 드러난 미로 같은 구조도 눈길을 끈다. 주방과 전시실 그리고 큰방과 작은 방 등 서너 개 방으로 이뤄진다. 미로라고 해도 좁은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디로 가도 결국 다시 만나게 돼 있어 길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왜색’문화가 미묘하게 섞여 있는 것 같은 근대 부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문화공감 수정’ 1층 주방과 연결된 창가에 놓여 있는 소품(왼쪽)과 바깥쪽 다다미방에 놓여 있는 인형과 장식품들. © 박서정
▲ 1층 복도 한 편에 정란각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사료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박서정
▲ 1960년대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요정으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는 1층 화장실. 일부는 원 형태로 만들어진 화장실 구조와 가림막이 눈에 띈다. © 박서정
▲ 1층 안쪽 방 두 칸은 온돌로 개조했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은 초량 이바구길에서 내려다 본 부산항의 옛 모습. © 박서정
▲ 1층 바깥쪽 방은 탁 트인 다다미방 그대로 두었다. 다다미방에서 미닫이문을 열어두고 정원을 내다보며 차 한잔 마시는 재미가 그럴듯하다. © 박서정

큰방에서 차 한잔 하며 일본 살펴보기

▲ 2층 방을 빙 둘러싸고 있는 복도는 바깥벽과 방 사이가 모두 창으로 돼 있다(왼쪽). 벽에는 ‘산을 읊다’는 뜻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 ‘詠山’(영산)을 새긴 현판이 붙어있다(오른쪽). © 박서정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서면 큼직한 방 셋이 미닫이문으로 길게 연결돼 있다. 원래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그대로 보존해두었다. 방 하나 크기가 큰 아파트 거실 만한데 탁자가 서너 개 놓여 있다. 복도가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방 세 칸을 둘러싸고 있다. 복도와 방 사이는 창으로 돼 있어 방 안에서 복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고, 복도에서 방안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밑층 다다미방과 마찬가지로, 바깥 경치와 함께 차와 담소를 즐길 수 있다.

‘문화공감 수정’은 별도 입장료는 없고 차만 마셔도 된다. 적산가옥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일제의 야망과 침탈, 폭력을 생각하면서 지금 아베와 일본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은 곳이다.

▲ 2층에 있는 큰방. © 박서정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박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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