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한국사회의 상징’ ➀ 엄마의 지문

엄마 손가락엔 지문이 없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엄마가 거래처에 송금한다며 인터넷 뱅킹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엄마는 변화에 무디다. 머리 스타일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주일 전에 찍은 사진도, 10년 전 사진도, 갓 난 나를 안고 서있는 사진에서도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노란 고무줄로 묶은 모양은 한결같다. 엄마에게 최신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 지문인식 등록하면 매번 비밀번호 입력 안 해도 돼서 편해. 내가 등록해줄까?” 엄마가 답했다. “나는 그거 못해.” 나는 다시 덤볐다. “내가 해준다니까? 그냥 센서에 손가락만 대면 돼!”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나 지문이 없어서 못 해.” 

엄마의 손가락에는 지문이 없다. 엄마는 예전에도 한 번 “동사무소에 갔는데 지문 인식이 안 되더라”고 말한 적 있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흘려들었다. 그 말이 가슴에 박힌 건 돈 버는 일의 슬픔을 알게 된 이후였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돈을 벌기 위해선 때론 비굴해지고,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밥을 거르고도 견뎌야 했다. 엄마의 손이 눈에 밟히자, 세상의 중심이 나에서 주변으로 넓어졌다. 취미를 포기하고 생업에 매달린 부모, 일곱 살 어린 동생 대신 부모 일을 돕는 언니가 보였다. 흥미나 적성보다 집안 형편에 맞춰 대학을 선택한 친구가 보였다. 이들의 포기나 희생이 자기 잘못이 아니듯, 내가 이룬 성취도 내 노력과 재능으로만 이룬 게 아니었다. 

손이 부끄러운 엄마

엄마는 주방에서 30년 넘게 일했다. 아빠와 함께 작은 중국집을 운영하며 요리도 하고 청소도 했다. 가게는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영업했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양파를 까고 가게를 청소했다. 엄마는 창업 초기를 제외하고는 직원을 쓰지 않았다. “인건비 줘가며 가게를 운영하면 두 딸을 어떻게 대학까지 보내냐”는 이유였다. 153cm에 43kg. 몸은 왜소하지만, 억척스럽게 가게를 운영하며 자식을 키웠다. 엄마의 손은 곧 엄마의 삶이었다. 자신의 몸을 지워가며 딸들의 삶을 지탱한 엄마의 손은 평생 노동의 상징이다. 

엄마의 손가락에 지문이 없는 건 매일 반복해 온 주방일 때문이다. 면을 삶을 땐 전분기가 있는 면들이 엉겨 붙지 않도록 뜨거운 면을 꺼내 찬물에 한 번 헹궈야 한다. 탕수육을 만들 땐 반죽이 묻은 고기를 뜨거운 기름에 튀겨낸다. 한 번 쓴 조리도구는 그때마다 씻어줘야 한다. 맨손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뜨거운 물과 찬물을 오간다. 엄마의 손은 지문만 없는 게 아니다.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오른쪽 손목 안쪽에는 지름 1cm 정도의 동그란 상처 두 개가 있다. 탕수육을 튀기다 뜨거운 기름에 데여 생긴 것이다. 관절 마디는 툭 불거져 나왔고 손등엔 핏줄이 울긋불긋 튀어나와 있다. 

간혹 쉬는 날이 아니면 엄마의 손은 늘 축축하거나 미끄럽다. 물이나 기름기 때문이다. 위생을 신경 써야 하니 손톱도 바싹 잘랐다. 습관적으로 핸드크림을 발라 향긋한 냄새가 나는 내 손과 달리 엄마의 손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매니큐어는 꿈도 못 꾸고 핸드크림은 설거지할 때 씻겨 나가니 바를 생각조차 안 한다. 결혼반지는 안방 서랍 깊숙이 넣어 두고 잊은 지 오래다. 관리 못 한 엄마 손은 거칠고 투박하다.

▲ 엄마가 물기를 앞치마에 툭툭 털고 내민 거칠고 상처투성이 손. 손가락에 지문이 없는 엄마의 손은 평생 노동으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지난 30년 삶의 증거다. ⓒ 김현주

어느 날 부부 동반 모임에 다녀온 엄마가 친구 아들 이야기를 해줬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지문이 없다고 말할 때는 부끄러워하던 엄마에게 공부하다 박인 굳은살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엄마는 “짱개집 한다”는 말에 상처받았다. 딸이 자기처럼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살지 않기를 바랐다.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 사무직이 되어 ‘편하게’ 살길 바랐다. 

몸 쓰는 일을 낮게 취급하는 한국 사회

세상은 엄마처럼 지문 없는 손을 우습게 취급하고, 공부하다 굳은살 박인 손을 높게 평가한다. ‘머리 쓰는 일’은 우대하고 ‘몸 쓰는 일’은 홀대한다. 성적과 결과 중심인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별 이견 없이 통용된다. 유치원부터 스펙을 쌓고, 수능이 있는 날은 온 나라가 들썩인다. 학벌이 사회적 성공을 담보한다. ‘시험’으로 상징되는 조건을 통과한 이에겐 안정적인 직장과 높은 급여가 보장된다. 성적과 학벌은 신분과 계급이 되고, 상층부가 된 이들은 자기들끼리 결속력을 강화하고 우월의식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는 몸 쓰는 노동자를 천박하게 대접한다. 개인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책임지는 노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몸 쓰는 일은 경쟁에서 뒤처진 자들 몫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청소노동자나 아르바이트노동자, 배달노동자는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아이들을 겁박하는 대상이 된다. 

<4천원 인생>은 <한겨레> 기자들이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체험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영호’라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가수 지망생인 그는 하루 9시간을 마트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노래 수업을 하고 헬스장에서 운동으로 몸을 단련한다. 열심히 살면서도 영호는 스스로 “끈기가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끈기란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만 뜻한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동하면서도 자기를 부끄러워한다. 마트에서 일하는 ‘영호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했으니 노동하며 살아가는 처지가 당연하다며 “세상이 공평하다”고까지 말한다. ‘영호들’ 중에는 1,400만원의 등록금을 번 철수도 있다. 당당하게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노동자들은 자기비하에 익숙하다. 세상이 노동 방식에 따라 나눈 계급과 신분은 노동자조차 인정하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 <한겨레> 기자들이 가전제품 공장, 갈빗집과 감자탕집, 가구공장, 대형마트 등 네 곳에서 일하며 겪은 일을 기록한 책 <4천원 인생>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자기비하에 익숙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 한겨레출판

일상 속의 노동 차별

개인에게 노동은 삶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노동을 통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고, 꿈을 실현한다. 노동은 사회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먹고 쓰고 입는 것 중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몸 쓰는 일, 머리 쓰는 일 모두 노동이다. 한국 사회는 몸 쓰는 일만 노동이라 여기며 노동을 천시한다. 노동자를 하층민으로 취급한다. 당연히 권리도,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다.

노동계급을 향한 천시와 차별은 일상 속에서 버젓이 벌어진다. 민주노총은 배달노동자에게 갑질을 한 아파트와 빌딩 81곳을 발표했다. 이들은 음식 냄새가 나니 화물용 승강기를 타거나 지하주차장만 이용하게 했다. 이들에게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짐짝’이다. 단지 안에 택배차량이 못 다니게 하거나 택배노동자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아파트도 있었다. 경비나 청소노동자에게 비인간적 갑질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있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2019년 10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파트 경비원 다섯에 하나(19.1%)는 입주민한테 욕설이나 무시, 폭언이나 구타 등 부당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으며, 횟수는 월평균 8.4회였다. 지난해 5월 입주민의 폭행과 갑질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경비원 최희석 씨는 죽기 전 “경비가 억울한 일 안 당하도록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비인간적 대우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청소노동자들은 여전히 휴게 공간이 없어 변기 옆에서 식사한다. 청소노동자들의 노동 실태가 여러 차례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바뀌지 않았다. KBS가 지난 1월 보도한 한국자산관리공사 청소노동자들, <한국일보>가 같은 달 보도한 여의도와 용산, 마포와 목동 청소노동자의 공간은 ‘결국 옥상 아니면 지하’였다.

▲ 노동 천시는 일부 몰상식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다. 라이더유니온은 최근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학원강사 배달 갑질 사건’에 관해 “배달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했다. 학원 측은 문제 발언을 한 직원이 학원강사가 아니라 셔틀도우미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에서 발언의 주체보다 중요한 것은 발언의 내용이다. ⓒ KBS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는 행동과 인식은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은 조국 전 장관에 관해 “초엘리트로서 그 초엘리트만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자식들은 굳이 불법이나 탈법이나 편법이 아니더라도 그 초엘리트들 사이에 인간관계 등으로 일반 서민이 갖지 못한 어떤 관계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우리 사회가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엘리트들이 자기를 인식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사회·경제·문화적 자본의 독점을 의미하고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인 채 산다. 지난해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두고 벌어진 의정 갈등에서 의사들이 보인 태도도 우리 사회 수준을 드러낸다. 그들은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가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 의대 의사’보다 우월하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시험에서 낮은 성적을 받은 사람을 ‘노력하지 않은 자’로 규정한 일차원적 발상이었다. 시험이라는 절차 이면에 숨겨진 불공정은 무시한 채 형식적 공정에만 매달려 차별을 정당화했다. 

‘노력할수록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사회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인식이다. 문제는 이제 노동조건을 둘러싼 계층과 신분이 세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소가 2015년 발표한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Ⅱ’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 학력 수준이 높을수록 자녀 학업 성적도 높았다. 김연아 성공회대 교수의 논문 ‘비정규직의 직업이동 연구: 세대 내 이동과 세대 간 전승’에 따르면 부모가 정규직일수록 자녀도 정규직일 확률이 높고 부모가 비정규직이면 자녀가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머리를 쓰는’ 이는 강자가 되고 강자는 약자를 홀대하고 특권을 나눠 갖는다. ‘몸을 쓰는’ 약자는 더욱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약자들 사회는 자기보다 더한 약자를 홀대하며 무시와 차별이 악순환하는 ‘을들의 전쟁터’가 된다.

지문 없는 손들이 대접받는 사회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노동자는 하층민이라는 인식은 엘리트계급은 우대하고, 가장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노동문화를 낳는다. 노동과 노동자를 향한 그릇된 인식은 정부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생전에 “탁월한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며 ‘천재경영론’을 내세웠다. 그 ‘천재’들이 과실을 따 먹는 사이, 반도체를 만들던 노동자들은 백혈병으로 죽어갔다. ‘무노조경영’이란 탈법이 통용될 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검찰이 2018년 삼성의 이명박 전 대통령 다스 소송비 대납 사건을 수사하며 찾아낸 삼성의 노조 와해 문건은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를 ‘문제인력’이라고 적었다.

▲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생전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경영론을 주창했다. ⓒ KBS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삼성그룹 회의에서 사장단을 향해 한 발언도 엘리트주의 중심의 한국 사회 단면을 드러낸다. “한 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극복해보라. 나는 해봤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과 노동이 불평등하고, 이에 따라 신분과 계급이 세습된다는 걸 무시한 발언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특권층이었다. 그가 학창시절에 구경도 하기 어려웠던 쉐보레 승용차를 타고 등교할 때 당장 끼니가 급한 이들은 공사판에서, 식당에서 몸을 쓰며 지문을 지우고 있었다. 세상에는 한 손을 묶인 채 24시간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만큼 지문 없는 손들도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소수의 창의적 아이디어도 소중하지만, 세상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평범한 노동자를 주목해야 한다. 매일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처리하고, 공장에서 노동하고, 택배를 처리하는 이들,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을 하는 이들 없이는 우리 일상이 제대로 흘러갈 수 없다. 단지 육체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진입 장벽이 낮은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비하하고 멸시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그들이 바로 내 부모이고 남편과 아내이며 자식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함께 기대며 살아가야 한다. 엄마가 더 이상 지문 없는 투박하고 거친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내게는 지문 없는 손이 굳은살 박인 손보다 훨씬 대단하고 소중하다.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한국사회의 상징’이다. 코로나는 이른바 ‘K자 양극화’로 불리며 부와 노동의 불평등을 심화했다. 공공 안전망이 부실한 각자도생 사회, 더 깊어진 불안과 갈등으로 신음하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오늘을 상징하는 대상과 현상으로 읽어낸다. (편집자)

편집 : 윤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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