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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가 ‘예술’이 된 피카소

기사승인 2019.12.19  15: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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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교양특강] 이택광 경희대 교수
주제 ① ‘피카소’는 무엇인가

"피카소는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의 개념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현대미술이란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거예요.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라는 뜻이죠. 삶과 미술의 경계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인데, 피카소가 살아온 모든 것이 예술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 1973)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살아생전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삶의 모든 것이 이슈가 되었던 피카소. 문화비평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피카소가 예술가의 삶의 형태를 처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식당에서 사용한 컵, 밥 먹은 숟가락, 입고 있던 속옷이 '예술 작품'이 되고, 그가 밥을 먹은 식당은 명소가 됐다.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삶 자체가 이슈가 되는 '슈퍼스타로서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그가 처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피카소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afridha putri
   
▲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던 시절 피카소의 모습. 대가의 고집스러움이 얼굴에 묻어난다(왼쪽). 젊은 연인 프랑수아 질로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피카소의 모습.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여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성이 그의 뮤즈가 됐다(오른쪽). ⓒ 이택광

이 교수는 피카소를 미술사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라고 표현한다. 살아생전 본인의 성공을 본 작가들이 드문데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 떼돈을 번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림의 가치를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가 된 사람. 피카소가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그가 건드리면 전부 다 금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피카소가 직접 말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아들이 찾아와 돈을 달라고 하자 금고를 열고 돈을 꺼내 주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려줬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것이 바로 그 당시 피카소의 삶이라고 말한다.

전쟁의 공포를 감각으로 전달하다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소?"

"아니요, 이 그림은 당신들이 그렸소."

   
▲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1937). ⓒ 이택광

1939년, 유명 작가인 피카소의 파리 작업실에 들른 한 나치 장교와 피카소의 대화다. 나치 장교는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1937)를 보고 그렇게 물었다. <게르니카>를 그린 건 자신이 아닌 나치라는 피카소의 대답은 무슨 의미일까? <게르니카>는 독일이 스페인 한 마을을 폭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소는 앞발과 머리만 남아있고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왼쪽 아래 누워있는 사람은 눈이 짝짝이다.

이 교수는 “실제로 게르니카의 폭격 장면을 찾아보면 사진이 나온다”며 “사진을 보면 말 그대로 민간인을 무차별 폭격한 것”이라고 했다. 원래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원과 민간인을 엄격히 구별해 민간인은 전투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돼 있다. 나치는 민간인을 전투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전시 도덕’을 무시하고 민간시설을 폭격한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린 건 전쟁을 일으킨 나치 군인들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린 자신은 전쟁의 공포를 감각으로 전달한 전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피카소가 이 작품을 그림으로써 일약 정치작가로 급부상해 반나치 전선의 영웅이 됐다고 설명한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자발적으로 그린 건 아니었다. 피카소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려 달라는 당시 게르니카 시청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게르니카>가 완성되었을 때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말한다. 고객은 나치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작가가 '이런' 그림을 그린 거다. 피카소의 '난해한' 작품을 대중이 과연 이해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었다. 피카소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쟁의 모습을 그림에 옮겨도 그것이 대중의 진솔한 경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피카소처럼 전쟁의 ‘감각’을 재현하는 게 필요하다는 논리다. 재현에 도전하는 반재현이 중요하다는 역설이다. 이 교수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이 재현되지 않는 걸 그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에 맞선 미국이 키워낸 화가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서구 여러 나라 원조계획인 ‘마샬 플랜’을 가동했다. 미국은 마샬 플랜의 일환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문화적 지원에 주력했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 문화가 수준 높다는 심증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나치로부터 해방됐을 때 대부분 대학교수들이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돼 있었다. 한국에서도 지식인들은 미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2차 세계대전 때 한국이 전쟁에 동원돼 미국과 싸웠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미국의 자유라는 가치와 공산주의 국가의 평등주의적 가치가 서로 경쟁하는 형국이었다”고 시대 배경을 설명했다.

이 때문에 세계 예술 시장에서도 미적 가치를 둘러싸고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미국이 반공노선 전략으로 단색화나 추상화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런 문화적 지원으로 키워진 작가가 피카소다. 이 교수는 피카소의 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평가들이 많다고 말한다. 피카소를 세계적인 명장으로 만든 어떤 ‘과정’이 있었다는 의심이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6년 원작 <시녀들> (왼쪽), 피카소가 1957년 재해석한 <시녀들> (오른쪽). ⓒ 이택광

무엇이 명작인가?

그 비판 중 대표적인 게 위 그림이다. 위 작품 중 왼쪽이 1656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원작 <시녀들>이고 오른쪽이 1957년 피카소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재해석한 그림이다. 이 교수는 “두 그림의 모티브는 비슷한데 피카소가 뭘 재해석한 것인지 모호하다”고 말했다.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알제리의 여인들>을 피카소가 재해석한 그림을 또 하나의 예시로 들었다.

   
▲ 외젠 들라크루아 1834년 원작 <알제리의 여인들> (왼쪽), 피카소가 1955년 재해석한 <알제리의 여인들> (오른쪽). ⓒ 이택광

“(미술)교과서를 보면 이 그림을 피카소의 명작이라고 해요. 피카소의 ‘마스터피스’(masterpiece), 곧 그의 최고 명작이라고 비평가들은 평가하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비평가들이 ‘마스터피스’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저걸 피카소 그림이라고 이야기 안 하면 저게 무슨 그림인지 누가 알겠어요? 물론, 조금 괴상한 그림을 피카소 그림 풍이라고 이야기할 순 있지만, 명작이라고 말하기엔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납득이 잘 안 가는 거죠.”

자기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고흐와 피카소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등 유화는 오랫동안 서양미술의 표준으로 여겨졌다. 당시 미국은 다른 표준을 세우고자 했는데 그 노력이 팝아트다. 역설적이지만 미국 팝아트를 대표하게 된 건 이민자 출신인 앤디 워홀이었다. 팝아트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앤디 워홀 덕분에 미국을 중심으로 팝아트라는 장르가 확산했다. 이 교수는 앤디 워홀 덕분에 미국이 자존심을 지켰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 지식인들은 앤디 워홀 작품을 통해 미국을 알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 ‘문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엘리트들은 유럽의 고급스러운 사교 문화를 동경해 뉴욕에 들여오기도 했다. 그들은 ‘저급한’ 힙합이나 햄버거, 할리우드 영화 등의 문화 중 하나인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미국을 대표하게 된 것을 개탄스러워했다. 그런 미국 엘리트들에게 낙점된 작가가 바로 피카소다.

이 시기 피카소는 온갖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이 교수는 “피카소가 살아있는 작가로서 고흐의 그림 가격에 준하는 작품을 그려낸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화가가 죽은 뒤에 그림 가격이 오른다’는 미술 시장의 통념을 깨뜨린 작가라는 것이다. 고흐와 피카소의 공통점이 있다면 작가 자신이 자기 그림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정반대다. 고흐는 그림이 팔리지 않아서 자기가 소장한 것이고 피카소는 자기 그림이 가장 비싸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작품의 상품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피카소에게 그림은 하나의 재테크였다. 그는 자기 그림을 팔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피카소재단은 미술재단 중 가장 돈이 많다고 한다. 이 교수는 “세계에 여러 화가론이 있는데 그중 드문 화가론이 피카소 화가론”이라며 피카소 화가론에 관한 책을 내려고 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제가 피카소에 관한 책을 원고까지 다 써서 내려고 했는데 못 했어요. 책에 피카소 그림을 넣으려면 그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다른 화가들 열 배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못 냈어요. 피카소 그림을 넣은 책이 나오기 어려운 거죠.”

피카소, 현대미술의 딜레마를 드러내다

이 교수는 피카소가 자본주의의 물신화 속으로 예술가의 삶 자체를 편입시켰다고 평가했다. 피카소 이전까지는 화가 자신이 자산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개 화가보다는 작품에 예술적 가치를 두었다. 피카소는 이런 미술시장의 흐름에 변혁을 일으켰다. 그는 예술이 가지고 있던 신비주의를 해체하고 동시에 자기 스스로 사물이 되었다. 예술의 범위를 그림뿐 아니라 작가의 사생활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 교수는 피카소의 이런 행보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없애려는 아방가르드 정신의 실천”이라고 설명한다. 예술가들이 엘리트주의를 포기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게 현대 예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것이 현대미술의 ‘딜레마’라고도 말했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전시공간의 아방가르드다. 피카소가 활동하던 때만 해도 작가들이 작품을 생산해 일정한 전시공간에 전시하면 관중들이 관람하러 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몇십 년 전 고문실로 쓰던 것을 그대로 전시하거나 연예인 김혜자 씨가 살던 집을 카페로 운영하기도 한다. 전시공간 용도로 처음부터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늘 사용하던 다른 용도의 공간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전시 공간의 아방가르드가 많이 이뤄진 게 독일이에요. 독일은 양조장이 많은데 그게 맥주를 제조하는 솥 같은 걸 설치하는 공간도 필요하고 술 같은 걸 쌓아 놓아야 해서 천장이 높거든요. 근데 그 공장들을 미술관으로 바꾼 거예요. 천장도 높고 공간도 넓어서 전시하기 좋거든요.”

   
▲ 칠판에 피카소의 그림을 따라 그린 이 교수가 현대미술의 딜레마를 설명하고 있다. ⓒ Afridha putri

이 교수는 또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그는 광주비엔날레 학술위원으로 참여해 강연 행사의 총감독을 맡았던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기획한 강연 자체도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라고 부르는 예술 작품으로 포함됐다고 한다. 그는 "이런 걸 보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며 "이게 아방가르드, 현대미술의 딜레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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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신수용 기자

Afridha putri PD 권영지 이나경 기자 afridhaputri9@gmail.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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