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⑤ 경남 진해요(鎭海要)

진해는 해군의 고향이다. 벚꽃축제까지 충무공 동상 앞에서 열면서 '군항제(軍港祭)'라 이름 지었듯이, 군항도시는 진해가 열성적으로 내거는 정체성이다. 일제강점기에 군항을 설치하면서 심은 벚나무는 해방후 해군기지 안 말고는 다 베어냈다가,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주장이 대두하면서 진해의 자랑이 됐다. 왕벚나무 원산지가 어디든 행정구역이 어떻게 나뉘든 진해는 잘 바뀌지 않는다.

시간을 잡아둔 카페 '진해요'

진해에서 변화의 흐름이 느리다는 건 시장이나 오래된 주택가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구분도 정리도 없이, 골목골목에 한국 근대의 흔적이 고요히 남아있다. 군항제가 열리는 장소이지만 평소에는 한적한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터리 사잇길에는 주택가가 이어진다. 60~70년대에 지어진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서면 여염집 같지 않은 집이 한 채 눈에 띈다.

▲ 진해구 중원로에 있는 카페 ‘진해요’. 일반 주택을 개조한 카페 오른쪽 유리문에는 진해요 상징인 백구(白鷗), 하얀 갈매기가 그려져 있다. ⓒ 박서정

한적한 주택가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아담한 카페가 길손을 맞이 한다. ‘진해요’다. 간판에 새겨진 이름만 보면 도자기 굽는 곳이나 공방으로 생각하기 쉬운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진한 목향(木香)이 배어난다. '진해요'는 2년간 방치돼 있던 가정집을 개조해 2018년 7월 문을 연 찻집이다. ‘진해요(鎭海要)’란 이름은 언어유희로, '(커피가) 진해요', '(같이 잘) 지내요' 그리고 '진해의 요지'라는 뜻을 겹쳐서 담았다. 

진해요의 주제는 향수(鄕愁)다. 현수막에는 편백(扁柏)과 백구(白鷗)가 ‘진해요’ 양 옆으로 써져 있다. 편백나무와 하얀 갈매기. 벚꽃에 가렸지만 편백나무와 갈매기도 진해의 자랑거리다. 진해드림로드의 일부인 장복산 편백숲은 치유의 숲으로 인기 있는 나들이장소다. 하얀 갈매기는 지금도 해군 작전·시설이나 식당 이름에서 자주 등장한다. 진해가 시(市)였던 시절 시조(市鳥)다. 벚꽃과 축제는 번개같은 순간이지만 편백나무와 갈매기는 진해 사람들과 늘 함께한다. 

단정한 화려함을 추억하며

▲ 입구 계단에서 내려다 본 카페 앞마당. 펼쳐져 뻗어 나가는 듯한 소나무 가지가 인상적이다. ⓒ 박서정
▲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화려한 발매트가 손님을 맞이 한다. 귀퉁이에는 60-70년대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갖춰 놓았을 법한 슬리퍼가 손님을 맞는다. ⓒ 박서정

진해요는 정갈하면서 따뜻하다. 슬리퍼를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서면 친척집이라도 온 듯 편안한 분위기가 감돈다. 1층 거실과 방 두 개, 그리고 2층 거실에 알차게 꾸며놓은 소품들 하나하나가 어디서 본 듯한데, 어느새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이다. 익숙한 느낌 덕분일까? 찾는 이들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마실 나온 중년들과 일을 마치고 온 이삼십대 청년들이 모여 앉아 편안하게 수다를 떤다.

▲ 거실 한 켠에 있는 피아노 위에 90년대 가요 '사랑의 서약' 악보가 올려져 있다. ⓒ 박서정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어요 / 모든 사람의 축복에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죠
세월이 흘러서 병들고 지칠 때 / 지금처럼 내 곁에서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나요……..' 

거실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으면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 켠에 놓여 있는 피아노 위에 ‘사랑의 서약’ 악보가 올려져 있고 건반을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울려 나온다. 60-70년대 동네 부잣집 풍이다.

▲ 안방 벽에 붙어 있는 80년대 영화 포스터. ⓒ 박서정

20세기 중후반을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

디자인을 전공한 카페 주인이 애써 모아 하나하나 신경 써서 비치한 소품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제품은 물론, '이런 게 있었나' 하며 새로운 물건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시각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오래된 집 냄새와 함께 계단을 오를 때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 낡은 책을 펼칠 때 '쩍'하고 나는 소리는 우리가 옛 추억과 그토록 떨어져 있었다는 걸 새삼 일깨운다. 60~70년대를 살았던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삶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 같은 분위기다.

▲ 80~90년대 가수 박남정과 변진섭의 LP. 전축 밑에는 집마다 한 갑씩 있었던 ‘신흥’표 성냥이 놓여 있다. ⓒ 박서정
▲ 70년대 문우사가 펴낸 삼국지 전집.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로 읽도록 인쇄돼 있다(왼쪽). 현관 옆 방 커튼 사이로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오른쪽). ⓒ 박서정

빛과 색, 유리

진해요에는 빛이 고즈넉하게 들어온다. 그 빛을 받는 사물들의 강렬한 색이 순간 마법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빛을 잘 활용해 사진을 찍기 좋게 배려한 것 중 하나가 거울이다. 단골들 사이에서 거울이 많아 '거울맛집'으로도 통한다. 시간과 빛, 거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나는 게 우연은 아닐 테다. 앨리스는 그 기이한 토끼굴 세상에서 부모와 언니를 잊고 홀로 여행하며 자신에 집중한다. 이런 카페에 와서 기묘한 분위기에 홀려보면서 내 주위를 잠시 잊는 것도 휴식이 아닐까?

▲ 진해요 곳곳에 걸린 거울들.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진해요에서 거울을 보다 보면 기분이 묘하다. ⓒ 박서정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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