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51. 자유무역

군산 금강하굿둑 진포 대첩 기념탑

전라북도 장수군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금강은 401km를 흐르며 전라북도와 충청남북도를 풍요롭게 적신다. 이어 충청남도 서천과 전라북도 군산의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든다. 금강이 서해 군산만 앞바다에 이르는 지점에 1990년 군산과 서천을 잇는 둑을 쌓았다. 금강하굿둑이라 부른다. 둑 남쪽에 조성된 군산 시민공원이 푸근하게 탐방객을 맞아준다. 공원 한가운데 높이 솟은 탑으로 가보니 좀 특이하다. 흰 탑 아랫부분에는 장수와 병졸들 조각, 탑 꼭대기에는 큼직한 화포의 몸통, 즉 포신을 올려놨다. 장수와 병졸들 앞에도 화포가 보인다. ‘진포 대첩 기념탑’이라는 안내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진포대첩.

▲ 진포 대첩 기념탑. 군산 금강하굿둑 시민공원. ⓒ 김문환

고려말 극성부리던 왜구 소탕 현장

때는 고려 말 13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마도 일원에서 활동하던 왜구들이 고려를 침략해 약탈을 일삼는다. 해안지대뿐 아니라 내륙에도 들어와 큰 피해를 준다. 심지어 수도 개경까지 노략질하는 무법천지가 이어진다. 왕실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치고 빠지는 왜구출몰에 고려조정은 골머리를 앓는다. 전 국토를 봉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기고만장 날뛰던 왜구가 가장 큰 규모로 쳐들어온 때가 1380년이다. 왜구 1만여 명이 300척의 선단을 이뤄 서해로 몰려왔다.

쌀과 재물을 약탈하며 고려사회를 수렁으로 몰아갈 즈음. 고려 조정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 정벌군으로 내려보낸다. 한국 역사 최초의 화포 무장 병선 100여 척이 앞장선다.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에 왜군 함선 300척은 모조리 불타 가라앉는다. 30여 년 가까운 왜구와 전투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결정적인 승리다. 진포대첩이라 부른다. 배를 잃고 육지로 달아난 왜구들을 이성계가 남원 황산대첩에서 모조리 쓸어낸다. 이성계는 이후 고려군부의 실권자로 올라선다. 수군의 화포 공격, 진포대첩의 주역은 누구인가?

▲ 최무선과 병졸 조각. 진포 대첩 기념탑. 군산 금강하굿둑 시민공원. ⓒ 김문환

조선왕조실록도 높이 평가하는 최무선의 화포 활약

국사편찬위원회가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4월 19일 첫 번째 기사를 보자. 진포대첩이 있은 지 15년 뒤인 1395년이다. 기사 제목은 이렇다. ‘검교참찬(檢校參贊)문하부사 최무선 졸기’ 최무선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본문을 보자. “왜구소탕은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 역시 작지 않았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참찬을 제수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된 시점의 기사다. 새로 나라를 일군 태조의 공만 칭송해도 모자랄 판에 최무선의 공을 공식적으로 높게 평가한다. 그만큼 최무선의 활약이 컸음을 말해준다. 최무선은 어떻게 고려와 조선 두 나라에서 모두 공을 인정받는 화포의 주역이 됐을까?

▲ 화약통. 조선 후기. 국립진주박물관. ⓒ 김문환

태조실록을 좀 더 읽어보자. “무선의 본관은 영주요,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 좋아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무선은 항상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이 내용에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자. 광흥창사, 강남 상인.

최무선과 예성강 벽란도의 광흥창

먼저 광흥창사를 살펴보기 위해 강화도로 가보자. 김포대교를 건너 강화읍을 지난 뒤, 섬 최북단으로 올라가면 양사면 철산리에 강화 평화전망대가 나온다. 북쪽으로 바다 건너 북한 땅 예성강 하구가 보인다. 여기서 고려수도 개성까지는 40리 길이다. 16km란 얘기다. 개성을 둘러싸는 송악산의 험준한 산세가 희미하지만 웅장한 모습으로 비친다. 예성강 하구에 자리했던 항구 이름은 벽란도다. 조선과 달리 고려는 신라나 발해를 이어 해외무역을 활발히 펼쳤다. 그 무역 중심지, 국제교역항구가 벽란도다. 벽란도는 또 전국에서 수도 개성으로 오는 모든 물자의 최종 집결지였다. 무엇보다 각지에서 받은 세곡이 벽란도로 운송됐다. 요즘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이자 김포 국제공항, 서울역, 인천항, 이 모든 것을 합쳐 놓은 곳이 벽란도다.

▲ 강화 평화 전망대. ⓒ 김문환
▲ 예성강 하구 벽란도와 송악산 사진. 강화평화전망대 전시실. ⓒ 김문환

벽란도와 광흥창사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고려 4대 임금 광종(재위 949년-975년) 때 과거시험을 시행하면서 한국 역사에 관료제가 뿌리내린다. 고려조정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는 관청을 둔다. 이를 좌청이라 불렀다. 1308년 충선왕 때 광흥창으로 이름을 바꾼다. 최무선의 아버지는 광흥창사, 그러니까, 광흥창을 책임지는 관리(使)였다. 광흥창은 어디에 설치 됐을까?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 광흥창 제도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무대를 서울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으로 옮긴다. 광흥창역. 그렇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관문이던 마포 양화진. 그 포구 옆에 광흥창을 설치해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세곡을 쌓아뒀다. 오늘날 주소지로는 마포구 창전동이다. 한양의 항구인 한강 양화진과 그 옆 광흥창, 개성의 항구인 예성강 벽란도, 그렇다면 고려의 광흥창도 벽란도에 있었다는 얘기다. 최무선의 부친은 벽란도 혹은 근처에 살았고, 최무선은 어려서부터 벽란도에 익숙했을 터이다. 관리가 된 뒤에도 벽란도를 통해 화약 제조법을 익히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 공민왕 사당. 조선 광흥창 옆에 세웠다. 마포구 창전동. ⓒ 김문환
▲ 광흥창터 표지석. 마포구 창전동. ⓒ 김문환

최무선과 강남상인 접촉지 벽란도

이제 강남상인을 살펴보자. 벽란도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으로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멀리 이슬람 상인도 드나들던 항구도시다. 최무선이 강남에서 오는 상인을 만나면 화약제조법을 물었다는 기록에서 강남은 중국 양자강 남쪽을 가리킨다. 양자강 남쪽은 오늘날 상해 남쪽으로 절강성이다. 성도는 예부터 아름다운 풍광으로 이름 높은 항주다. 이 절강성에 동아시아 최대 무역항 영파(경원, 오늘날은 닝보)가 자리한다. 고려 시대 전남 신안에 침몰한 해저 무역선의 출항지도 바로 이 영파다. 강남 상인을 개성에서 만났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벽란도에 가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1325년생 최무선이 벽란도를 다니던 젊은 시절 중국은 몽골족의 대원제국(1271년~1368년) 지배 시기였다. 대원제국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러시아까지 광범위한 교통로를 갖고 교류하던 무역의 나라다. 따라서, 최무선이 40대 중반까지 만난 대원제국 시절 양자강 이남 영파에서 오는 강남상인은 한족은 물론 몽골인, 서역에서 오는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상인도 포함된다. 물론 필담이 가능한 한족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족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또 있다. 화약의 최초 발명 지가 중국이기 때문이다.

▲ 절강성 영파. 오늘날 닝보로 불린다. 태조실록에 등장하는 ‘강남’의 항구는 영파를 가리킨다. ⓒ 김문환

화약... 중국 발명, 몽골 유럽전파, 유럽 총포류 발달

당나라 때인 8세기 화약을 발명한 중국 한족은 송나라 때 11세기 ‘화약요자작(火藥窯子作)’이라는 기관을 두고 화약을 만든다. 증공량이 1044년 쓴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화약으로 쏘는 무기를 소개할 정도로 발전하며 12세기 화포를 선보인다. 송나라 북쪽에 인접한 나라 서하 역시 1220년대 화포를 생산한다. 이 무렵 서하를 공격하며 중국으로 내려온 몽골도 화약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이슬람 세계와 동유럽 정복지로 전파한다. 울란바토르 몽골 역사박물관으로 가면 몽골군이 화약을 활용한 일종의 포를 발사해 성을 불태우는 그림을 전시 중이다. 무적 몽골군 승리의 비결 가운데 하나가 화약이었던 셈이다. 몽골이 세운 대원제국은 1288년부터 화포를 활용하고, 1293년 인도네시아 자바섬 정벌 때 배에 화포를 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50년대 대원제국에서는 화포를 활용한 전투가 일상화됐고, 1368년 대원제국을 물리친 한족의 명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 화약을 활용한 무기로 적의 성을 불태우는 몽골 군대 그림. 울란바토르 몽골 역사박물관. ⓒ 김문환

13세기 말 몽골 덕에 중국 화약을 배운 유럽은 더 적극적으로 무기를 발전시킨다.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 중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은 포를 사용해 효과를 본다. 프랑스 역시 1422년 즉위한 샤를 7세 때 바퀴로 이동시키는 대포를 만들어 낸다. 1429년 잔 다르크가 활약한 오를레앙 전투에서도 대포가 쓰였다. 1453년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튀르크는 콘스탄티노플 함락과정에 포의 힘을 빌렸다. 서양은 1480년대 성능과 효율이 뛰어난 대포나 개인 총기를 만들기 시작하며 화약의 원조인 동양을 앞서 나간다. 이후 동양 문화권은 큰 틀에서 서양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조총을 전한 것은 유럽으로 간 중국 화약이 총으로 변해 되돌아온 사건이다. 일본은 조총을 앞세워 조선을 단숨에 제압했지만, 화포를 만들지는 못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화포에 결국 고전하다 철수한 것은 명나라와 조선의 화포가 앞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 샤를 7세. 프랑스에서 대포를 본격적으로 발달시킨 왕. 루브르 박물관. ⓒ 김문환
▲ 서양의 1500년경 총. 비엔나 무기 박물관. ⓒ 김문환

최무선 중국 상인에게 화약 제조기술 습득

관료이자 무신이기도 했던 최무선은 화약을 무기로 써야 한다는 고려 사회 최초의 탁월한 안목을 갖고 벽란도에서 강남 상인을 만난다. 중국에서 화약을 단순히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하고자 집요하게 나섰던 이유다. 화약 생산을 위한 기술습득은 쉽지 않았다. 태조실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강남 상인만 오면 물었다지만, 화약 기술자가 흔하지 않았을 터이다. 또 그런 고급기술을 쉽게 가르쳐 줄 리도 만무했다. 최무선이 기술을 안다는 상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며 기술을 터득하려 시도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최무선이 배우고자 한 것은 염초를 추출한 뒤, 유황과 목탄을 혼합해 폭발력을 높이는 배합비율이었다. 최무선에게 이를 알려준 강남 상인은 한족 상인이자 기술자인 이원(李元)으로 알려져 있다.

▲ 화약 다지개. 조선 후기 국립 진주박물관. ⓒ 김문환

최무선, 조정 설득해 화약국 설치

화약 제조기술을 완벽하게 가다듬기 위해서는 국가적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안목이 없던 고려 조정의 관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에서 화약이 주로 폭죽놀이용이었고, 고려 역시 이를 수입해 같은 용도로 활용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무기로 쓴다는 최무선의 아이디어를 허황된 것으로 여겼다. 태조실록을 더 보자.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중국 상인으로부터 기술을 얻어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시험해 보자는 말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서고금에 타성에 젖은 공직사회에서 혁신을 일으키기란 쉽지 않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왜구를 물리치는 길은 화약밖에 없다’는 최무선의 신념은 결국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고려 조정의 고위 관료들도 마침내 최무선의 집념과 노력에 감복해 일단 들어주기로 결론 내린다. 태조실록을 마저 읽자.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공민왕이 죽고 그 아들 우왕 3년인 1377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과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된다. 오늘날 국방과학연구소라고 할까.

▲ 진포 대첩비 화포. 군산 금강하굿둑 시민공원. ⓒ 김문환

최무선, 다양한 화포 개발

최무선은 국가 지원 아래 고품질의 화약을 대량생산하는 길을 튼다. 이어 본인이 구상하던 화약의 병기화 즉 무기 제조로 격을 높인다. 화약을 활용하는 다양한 화포를 만들었다고 태조실록은 적는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민족 역사 최고의 국방과학기술자로 평가해도 모자람이 없는 최무선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평가다. 이때는 아직 서유럽에서도 중국에서 받아들인 화약을 사용한 실효적인 대포를 생산하지 못하던 일종의 시험기였다. 최무선이 위대한 이유다. 최무선이 국란 극복 사에 이름을 남기는 이유는 더 있다. 육상에서 다양한 화포는 이미 11세기 송나라에서 개발돼 중국에서 쓰였고, 14세기 서유럽에서도 비록 허술한 형태지만 고려에 앞서 활용됐다. 최무선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 승자총통. 1579년. 국립 중앙박물관. ⓒ 김문환
▲ 현자총통. 임진왜란 중 사용. 임진산성 출토. 국립 중앙박물관. ⓒ 김문환

화포 활용한 해전 대승... 1380년 진포 대첩

태조실록을 보자. “또한 전함을 만드는 방법을 구하고 연구해 도당에 말한 뒤 직접 제조를 감독했다(又訪求戰艦之制, 言於都堂, 監督備造)”。최무선은 화포를 육상이 아닌 해전에서도 활용할 방도를 계산에 넣고 있었다. 왜구는 배를 타고 침략해 들어온다. 그 왜선을 격침하기 위해서다. 각종 화포를 성공적으로 개발한 뒤, 이를 활용할 전함도 만든 최무선에게 기회는 바로 찾아온다.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화포를 사용할 해전의 기회. 앞서 살펴본 1380년 진포대첩이다. 태조실록을 보자.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최무선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을 알지 못하고 배를 한곳에 집결 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최무선이 기술로 나라를 구한 거다. 진포대첩이 화포를 활용한 인류 역사 최초의 해전일까?

▲ 천자총통, 별황자총통. 국립진주박물관. ⓒ 김문환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진포대첩, 이순신으로 계승

B.C5세기 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화염방사기가 사용됐다. 물론 화약은 아니었다. 화약을 활용한 최초의 해전은 중국에서 펼쳐진다. 당나라가 무너진 뒤 5대10국 시대 919년 낭산강(狼山江) 전투다. 하지만, 화포로 적선을 불태우는 해전은 중국에서도 1363년이 처음이다. 대원제국 말기 홍건적의 난을 주도하며 명나라를 일군 주원장이 강서성 파양호(鄱陽湖) 해전에서 화포를 쏘며 승리한 거다. 진포 대첩은 이로부터 17년 뒤이니 화포를 활용한 전쟁 역사 초기 전투로 세계 전사에 남을 해전이었다. 유럽에서는 이보다 100여 년 늦어 15세기 중반을 지나며 함선에 포를 싣기 시작하고 16세기 전함이 등장한다. 

▲ 서양 최초로 대항해에 나선 포르투갈 함선에 싣던 포. 15세기.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 포르투갈 전함. 16세기 리스본 해양박물관. ⓒ 김문환

조선시대 만든 다양한 화포들과 임진왜란 때 화포를 갖춘 거북선등의 전함은 그 기원을 최무선에 둔다.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 제조 기술이 그대로 조선에 이어졌으니 말이다. 태조실록은 이를 증명한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 거북선. 독립기념관. ⓒ 김문환
▲ 비격진천뢰. 조선시대. 국립진주 박물관. ⓒ 김문환
▲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을 쏘는 포. 조선시대. 국립 진주박물관. ⓒ 김문환

왜구를 묘사한 16세기 명나라 그림

북경 천안문 광장의 국가박물관으로 가보자. 최무선이 화약과 화포를 활용해 물리친 왜구. 그 왜구의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있다. 북경 국가 박물관에는 중국 절강성에 침략한 왜구와 명나라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16세기 그림을 전시 중이다. 옷을 벗고 훈도시만 찬 채 창을 들고 달려드는 왜구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연상하던 대로다. 왜구가 탄 배가 생각보다 무척 작다. 작은 배를 타고 중국 해안까지 노략질 하러 다닌 왜구의 극성스러움이 잘 묻어난다.

▲ 절강성을 공격하는 왜구 그림. 1555년. 북경국가 박물관. ⓒ 김문환
▲ 절강성을 공격하는 왜구와 중국군의 전투 그림. 1555년 북경국가 박물관. ⓒ 김문환

왜구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왜구는 대한해협의 대마도, 이키섬, 마쓰우라 등을 근거로 활동한 해적집단을 가리킨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무려 400년 가까이 이어졌다. 1223년 고종 때 김해 지방에 처음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1265년까지 11차례 침략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후 잠잠하다 1350년 충정왕 때 다시 나타났고, 우왕(재위 1374년-1388년) 때 재위 14년 동안 무려 378차례나 쳐들어온다. 1366년 공민왕 때 사신을 일본 아시카가 막부에 보내 협조를 부탁하고, 우왕 때 1375년과 1377년에는 정몽주가 일본으로 가 잡혀간 고려인 포로를 데려오기도 한다. 진포대첩 뒤, 1389년 창왕 1년, 조선으로 넘어와 1396년 태조 5년, 1418년 세종 1년에 대마도 정벌이라는 발본색원의 강수를 둔다. 하지만, 왜구는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면서 조선을 괴롭힌다. 앞서 명나라 절강성 해안 전투 그림에서 보듯 중국 절강성 해안도 극심한 피해를 본다. 왜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17세기 사라진다.

▲ 창의토왜도. 정문부가 활약한 함경도에서 왜군 처단 장면. 국립 진주박물관. ⓒ 김문환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정소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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