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⑭ ‘떡·과자’ 빚는 동서양 풍습

“세모(歲暮). 이웃집 방아 소리에 아내는 곡식이 없음을 탄식한다. 선생은 ‘부귀가 하늘에 달렸는데 어찌 상심하느냐’며 금(琴)을 타 방아 소리를 들려주며 위로하니 이를 ‘대악(대樂)’이라 불렀다.”(<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세모는 해(歲)가 저무는(暮) 음력 12월 30일(섣달그믐)이다. 대악은 방아(대) 노래(樂), 즉 ‘방아타령’이다. 명절을 맞아 텅 빈 쌀독 앞에서 수심 가득한 ‘빈처(貧妻)’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선사한 이 낭만파(?) 음악가, 가난을 예술로 승화시킨 고대 사회 ‘현진건’은 누구일까? 신라의 백결(百結) 선생. 민족의 큰 명절 설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방아 찧어 떡을 예쁘게 빚던 동서양 풍습을 들여다본다.  

백결 선생 ‘탄금곡(彈琴曲)’, 방아 찧는 정경을 선율로 옮긴 예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보자. 1층 신라 전시실 맨 끝에 희귀 토우(土偶·흙으로 빚은 인형) 전시 공간이 나온다. 5~10㎝ 내외 작은 토우 가운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 위에 현악기를 올려놓고 타는 사람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경주에서 출토한 신라 유물이다. 그렇다면 경주에 살던 백결 선생이 설 하루 전 자작곡을 부르며 금을 타던 ‘탄금곡(彈琴曲)’ 장면이 바로 이 모습일까? 백결 선생이란 이름부터 풀어보자. 몹시 가난해 옷을 제대로 구할 수 없어 무려 100군데나 기워(結) 입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언제 사람일까? 

1145년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경주 낭산(狼山) 밑에 살던 가난하지만, 세상사에 달관한 인물이라는 기록만 나온다. 생몰연대 미상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무소유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닮은 백결 선생 기록이 한 군데 더 전한다. 영해 박씨(寧海朴氏) 족보다. 이름은 박문량(朴文良), 실성 마립간 때인 414년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났다. 눌지 마립간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 사신으로 가 죽고, 어머니와 누나 둘이 자결한 가운데, 나머지 누나 아영(阿榮)의 손에 자라 귀족 가문 딸과 결혼했지만, 초탈한 삶을 살았다. 

신라 충신 박제상의 아들, 백결 선생이 탄 악기는 고구려 거문고? 

▲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된 삼한시대 현악기. 광주 신창동 마한 유적에서 출토됐다. ⓒ 김문환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으로 가보자. 가야의 금(琴), 가야금을 만든 우륵의 고향이다. 백결 선생은 중국 춘추시대 현악기를 타며 은둔했던 영계기(榮啓期·BC 571년~BC 474년)를 흠모했다. 전국시대(BC 403년~BC 221년) 정나라 사람 열자(列子)가 지은 도가 서적 <열자(列子)> '천서(天瑞)'에서 공자를 만난 영계기가 “가난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감내하는 것, 출세 대신 마음 편하니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한다. 청빈사상을 본받은 백결 선생의 악기, ‘금’이 가야금일까? 우륵이 풍전등화의 조국 대가야의 가실왕 품을 떠나 신라 진흥왕에게 귀의한 때는 6세기 중반, 백결 선생 시기보다 100여 년 뒤다. 백결 선생의 금이 가야금이 아니란 얘기다. 장소를 광주광역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긴다. 삼한(三韓)시대 마한 지역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발굴한 국내 최고(最古) 현악기가 기다린다. 신창동은 지금까지 발굴된 삼한시대 국내 최대 농촌유적지다. 여기서 반(半)은 훼손됐지만, 반은 보존된 현악기가 나왔다. 현을 맸던 구멍까지 선명해 2000년 전 우리 민족 현악기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 백결 선생의 금일까?

여기서 거문고를 떠올린다. <신라고기(新羅古記)>라는 지금은 멸실된 책을 인용한 <삼국사기>에 진(晉)나라가 고구려에 칠현금(七絃琴)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재상 왕산악이 칠현금을 개량한 거문고로 100여 곡을 작곡, 연주했다는 내용도 덧붙인다. 여기서 진나라는 동진(東晉·316~419년)이다. 1949년 북한이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발굴한 3호 고분에 줄을 누르고 술대로 현을 타는 거문고 연주가 그려졌다. 안악 3호 고분이 357년 축조됐으니 칠현금 전래, 왕산악의 거문고 제작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특히 4~5세기 신라는 고구려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에 5세기 신라 백결 선생의 금은 거문고일 확률이 높다. 

판소리 심청가 방아타령은 ‘방아’ 빗댄 성(性)담화로 진화 

▲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된 삼한시대 절굿공이. 대구 매천동과 안동 저전리에서 출토됐다. ⓒ 김문환

장소를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 보자. 경주 백결 선생 동네에서 ‘쿵덕쿵덕’ 방아 찧는 소리를 낸 주인공, 절구나 절굿공이를 볼 수 있을까? 대구 매천동과 안동 저전리에서 출토된 삼한시대 나무로 만든 절굿공이가 전시돼 있다. 나무제품은 대부분 썩지만, 이들 지역은 건조한 지대여서 썩지 않고 2000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백결 선생이 살던 시기보다 수백 년 앞선 시기부터 방아를 찧어 떡을 만들던 우리 민족의 풍습을 보여준다. 

백결 선생이 지은 대악, 방아타령은 어떻게 됐을까? 전하지는 않고, 판소리 한 대목이나 민요로 이어질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탄금대(彈琴臺) 방아타령’처럼 방아 찧을 때 노동요로도 불리지만, 전혀 다른 대목으로 진화한다. 판소리 '심청가'에서 방아타령은 맹인잔치에 가던 심봉사가 여인들과 나누는 성(性)담화로 옷을 바꿔 입는다. 남성의 상징처럼 생긴 절굿공이를 빗대 생식과 번영이라는 주술을 담아 방아 찧기를 성적 묘사로 풀어낸다. 역동적인 자진모리장단으로 음악적 흥겨움에 해학을 덧붙였다.

조선 시대 농가월령가 ‘세모’ 풍습 으뜸은 떡 만들기 

1843년 조선 헌종 9년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12월조에 그려진 세모의 풍경을 읽어 보자. “앞뒷집 타병성(打餠聲)은 예도 나고 제도 나네… 윗방, 봉당, 부엌까지 곳곳이 명랑하다….” 타병성. 신라 시대 집집마다 세밑에 떡방아 찧던 풍습이 그대로 이어진 모습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명절 때 시골 방앗간은 김이 무럭무럭 솟는 고두밥이 연신 기계로 들어가고, 이어 흰떡이 쉬지 않고 길게 꼬리를 물고 나왔다. 침을 삼키며 이를 바라보던 동네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로 가득했는데…. 이렇게 만든 흰떡을 썰어 떡국을 끓여 먹어야 한 살 먹는 걸로 여겼다. 한수 이북 지방에서는 떡국에 만두를 곁들였다. 흰떡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시루떡도 찌고 절편도 빚는데, 절편에 어떻게 무늬를 넣었을까?

신라 때 시작된 원단(元旦), 떡살로 예쁜 모양 빚어

▲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된 19세기 나무 떡살과 도자기 떡살. ⓒ 김문환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가보자. 설에 먹는 절편에 ‘복(福)’이나 ‘수(壽)’ 같은 글자, 연꽃이나 십장생, 봉황, 잉어 등 다양한 무늬를 새기는 도장 같은 도구 ‘떡살’이 박물관을 곱게 수놓는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대로 정성 들여 떡살을 누르며 보기 좋은 떡을 만들던 풍습은 이제 민가에서는 사라지고, 저잣거리 떡집에만 남아 설 풍습을 이어 간다. 

우리 민족이 설을 쇠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진(晉)나라의 진수가 280년경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 은정월(殷正月·은나라의 정월, 12월 섣달) 등을 언급해 새해 풍습을 암시한다. 1281년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소지 마립간(479~500년) 때 궁궐에서 궁주(宮主·후비 혹은 공주)와 스님의 통정 사건 뒤로, 정월에 근신하며 제사 지내는 ‘달도(달도)’ 풍습이 생겼다고 적는다. 하지만 본격적인 설은 당나라 636년에 펴낸 수나라 역사책 <수서(隋書)>에 “신라는 매년 원단(元旦)에 왕이 연희를 베풀고 일월신(日月神)에 배례한다”는 기록으로 봐 7세기 초에 설이 명절로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설의 기원 중국, 떡에 예쁜 모양 넣는 황허문명 4000년 풍습

▲ 중국 허난성박물관에 보관된 하나라 때 흙으로 구운 떡. 떡살을 이용해 무늬를 넣었음을 보여준다. ⓒ 김문환

중국 황허(黃河)문명지,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의 허난성 박물관으로 가보자. 특이한 유물 하나가 관심을 끈다. 앙소(仰韶) 이리두(二里頭)에서 1960년 출토된 하나라(夏·BC 2070년~BC 1600년) 시대 유물 '선와문회도병(旋渦紋灰陶餠·Pottery cake with whorl design)'. 진흙으로 만든 소용돌이무늬 도자기 떡이다. 신석기 황허 농사문명지에서 이미 4000년 전 쌀로 떡을 빚었고, 떡살을 이용해 소용돌이무늬를 찍어 미적 감각을 더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설에 중국 북방 지역은 우리나라 만두의 기원인 교자(餃子), 남방에서는 만두(饅頭·속이 없는 찐빵)와 찹쌀떡 연고(年고)를 먹는다. ‘녠가오’라고 불리는 연고는 찹쌀가루에 설탕 녹인 물로 반죽해 만드는데 복(福) 같은 글자를 떡살로 새긴다. 황허문명에서 이어지는 4000년 전통이다.

중국 설은 요임금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순임금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낸 데서 시작된다. 순임금 다음이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니까, 제사 때 허난성 박물관의 소용돌이무늬 떡을 빚어 바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BC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무제(武帝·BC 141년~BC 87년) 때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 태사령 사마천(<사기(史記)>의 저자)이 새 달력을 만들면서 새해 첫날을 원단으로 삼았다. 신라의 원단은 물론 황허문명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설의 기원이다. 2000년이 흐른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은 음력을 폐하고 양력 1월 1일을 원단, 기존 원단이던 음력 1월 1일을 입춘(立春)맞이 춘제(春節)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한니발의 고국, 지중해 카르타고에서도 예쁜 과자 무늬 찍던 도구

▲ 카르타고박물관의 BC 7세기 과자 무늬를 찍던 틀. ⓒ 김문환

장소를 멀리 지중해 한가운데, 북아프리카 해안 튀니지로 옮겨 보자. 수도 튀니스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콜린 드 비르사(Colline de Byrsa·비르사 언덕·프랑스 식민지였던 튀니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 사용)’라고 말하면 30~40분 만에 카르타고 핵심 유적지, 아름다운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비르사 언덕에 이른다. 로마를 멸망 위기로 몰아넣었던 2차 포에니 전쟁(BC 218년~BC 201년)의 주역, 한니발이 태어난 카르타고의 심장부다. 오늘날 레바논 땅인 페니키아 티레의 공주 디도가 고국을 떠나 BC 814년 새로 세운 나라 ‘카르트 하다시트(새로운 도시, 새로운 티레)’의 준말이 ‘카르타고’다.

비르사 언덕 카르타고 박물관은 전 세계 탐방객이 몰려 연중무휴다. 여기서 마치 우리네 구멍가게 과자봉지에서 꺼낸 것처럼 생긴 유물을 만난다. BC 7세기 과자에 무늬를 찍던 도구, 우리로 치면 떡살이다. 카르타고의 과자는 밀과 꿀로 만들었다. 카르타고의 마곤이 쓴 <영농서>는 시대를 초월한 명작으로 손꼽힌다. 비록 BC 146년 3차 포에니 전쟁 패배로 로마의 손에 카르타고 문명의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지만, <영농서>는 살아남았다. 28권짜리 이 농업 백과사전을 BC 2세기 카르타고 근처 우티카 태생의 그리스인 디오니소스가 그리스어로 번역했고, 로마원로원도 유니우스 살리누스에게 돈을 대 라틴어로 번역시켰다. 이 두 저작을 인용한 후대 저술을 통해 카르타고의 밀재배와 양봉기술이 전해진다. 그 기술로 농사를 지어 만든 맛난 과자 무늬 틀과 함께 말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동서고금의 인지상정(人之常情)과 떡살을 떠올리며 이번 설에 예쁜 무늬의 떡과 만두를 빚는 것도 좋겠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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