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매매’

▲ 박진우 기자

며칠 전부터 왠지 키보드가 불편하다. 못 쓸 정도는 아닌데 어느덧 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머릿속에 온통 키보드만 떠오른다. 다른 일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다. 네이버에서 만만한 키보드의 최저가를 검색하고 외국 사이트도 들어가 본다. 여느 창작 도구가 얼마간 소유자의 애착을 유발하듯 키보드 세계에도 마니아층이 존재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만의 세계에 잠깐 발을 담가보았다.

116,000원. 최종 간택을 받은 키보드의 가격이다. 키보드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헐' 소리 나는 금액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석 박힌 것은 수억, 수천만 원에 이르는 몽블랑 만년필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꽤 고무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국민건강보험법을 통과시킬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스물두 개 만년필로 서명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입력 도구가 각별한 의미임을 말해준다. 분수에 어긋난 발칙한 생각까지 하고 보니 116,000원이 떳떳해지고 오히려 조금 소박해 보인다.

▲ 상자를 뜯었을 뿐인데 16,000원의 가치가 하락한 키보드. ⓒ 박진우

단번에 저만한 물건을 고른 건 아니다. 처음은 적당한 가격으로 시작한다. 다행히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행운이지만 대개 그렇지 않다. 결국 어느 선에서 타협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욕구를 저울질하는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수행 기간 내내 저울 바늘은 파르르 떨린다. 절제의 고통을 감내하는 그 떨림을 상상하면 마음이 애잔하다.

새벽 두 시에 결제하고 이틀 뒤 키보드를 받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하루 더 고민하다 중고나라에 매물로 내놓았다. 놀랍게도 '확인' 버튼을 누른 지 3분도 안 돼 구매 문자를 받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0을 하나 빠뜨렸나' 불안한 생각이 든다. '이게 보통인 건가'라는 의심과 함께 어둡고 작은 방 안에 숨죽인 채 중고나라를 감시하고 있을 전국의 아무개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이후 거래는 별 탈 없이 이뤄졌다. 계좌로 물건값을 받은 뒤 우체국 택배를 부치면 그만이다. 대금을 받는 순간 내 물건이 아니라는 배덕감이 들어 마음이 조급하다. 물건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전에 쓰던 키보드가 사뭇 삼삼해 보여 괜히 겸연쩍다. 매매 차액 16,000원은 수업료라고 애써 위로해 본다. 애잔한 줄 알면서도 잦아들지 않는 저울의 떨림을 생각하면 그 수업료도 헛수고란 걸 알지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연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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