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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해결’과 175년 징역의 ‘공적 해결’

기사승인 2018.01.26  19: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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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사전] ‘성범죄’

   
▲ 박희영 기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친구와 헤어진 뒤, 윤동주의 시 ‘병원’이 떠올랐다. 새해의 들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무기력.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기운이 그녀를 휘감고 있다. 중견기업 2년 차 사원인 그가 청년실업 시대에 이직을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년계획을 세우자며 나를 불러낸 것은 그녀였다. 기자 지망생 눈에 ‘직장인’인 그녀는 별 걱정 없이 태평한 삶을 즐길 것처럼 보였다. 취업하고 보니 그 회사는 ‘갑’의 위치에 있고 업무 만족도도 높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신년계획이 “이직”이란다. 회장 아들이 술 마신 새벽이면 그녀에게 “업무 말고 다른 데 더 관심 있다”며 전화를 한다는 거였다. 카카오톡 메시지는 거의 매일 온다고 한다.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연락을 상사가 한다면? 회사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오너 일가라면? 유부남인 그는 2년차 여사원이 상사에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 예의’와 ‘평탄한 회사생활’을 인질 삼는다.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내 말에 친구는 “그럴 수 없다”며 “직급이 훨씬 높은 간부도 그의 눈치를 보고, 그가 나를 예뻐하는 것 같으니 나한테 잘해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24일 미국 여자 체조선수 150여명에게 30년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한 대표팀 주치의에게 징역 175년형이 선고되자 피해자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 BBC

조직 내 상급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자행하는 ‘갑질 성범죄’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인테리어 기업 한샘의 성폭행 의혹 사건이 논란이 된 바 있다. 피해자인 신입 여사원에게 가해자인 인사팀 교육담당자와 인사팀장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조직 내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2014년 449건, 2016년 545건으로 계속 증가했다. 한샘의 피해자는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가해자와) 앞으로도 회사에서 볼 텐데’ ‘사회생활이 걸려있으니’라고 걱정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힘의 역학을 이렇게 말한다. “사적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 이익은 사적 해결을 원한다. 외부 개입 없이 갈등이 사적인 채로 남아 있는 한, 강자가 갈등의 결과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사람은 약자다.” 강자들이 원하는, ‘사적인 채로 남아 있는 갈등’은 일개 민원으로 전락한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구경하게 된 ‘사회화한 갈등’은 사회문제로 발전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의 시작은 대부분 민원으로 전락할 만한 하나의 개인적 사건을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해야 할 사회문제로 만드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기력은 금세 전염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에게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비난의 화살이 피해자에게 향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내 나이 스물일곱, 그녀는 스물여덟. 우리는 신년계획을 접어두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여성은 취업해도 뜻밖의 ‘헬 게이트’가 열릴 수 있구나.' 회장 아들이 좋아한다니! 드라마에서나 ‘왕자님’과 ‘로맨스’지, 현실에서 그는 ‘유부남’이고, 그의 마음은 이직을 고민하게 만드는 ‘추근덕거림’이다. 그녀를 휘감은 무기력이 끝내 그녀를 집어삼키는 일을 방조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나마 기록을 남긴다.

우리는 이제 태도를 바꿔야 한다. 남의 일 같지만 실은 자기 일이 될 수 있는 사안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미국에서는 체조선수 150여명에게 성폭행과 성추행을 한 선수단 주치의에게 175년 징역형이 선고됐다. 30년간 계속된 그의 범행이 들통난 것은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를 딴 선수가 최근 방송에서 폭로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의 시처럼 연민이나 짝사랑마저 선을 넘으면 안 되는데, 권력이나 폭력을 동원하는 성범죄에 관대할 수는 없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조승진 기자

박희영 기자 hyg91418@naver.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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