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시간여행

▲ 안윤석PD

20년 전의 남자가 날 바라본다. 눈을 지그시 뜬 모습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지만 치아는 또 보이지 않으니, 필경 이건 억지로 웃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자세히 보니 얼굴 왼쪽이 전체적으로 흐렸다. 움직이는 사람을 찍었을 때 나오는 스틸컷처럼 카메라가 살짝 흔들린 것 같은 모습이다. 그렇다. 난 지금 20년 전 내가 사랑했던 한 남자의 사진을 보고 있다. 20년째 보는 얼굴이지만 40대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지금까지 시간여행을 하는 그를 보노라면 어쩔 땐 기쁘다가도 어떨 때는 한 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당신 스스로 찍은 영정사진 앞에서 억지로 웃으려 노력하고 있는 이 남자는 내 아버지이자 ‘빛을 잡는 사람’인 사진사이기도 했다.

“빛과 같은 속도로 가면 시간이 멈추는디, 아부지는 빛을 잡아버리는 사람이여!” 아버지는 빛을 잡는 사람, ‘포토그래퍼’가 그렇게 되고 싶어 했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데이트 할 때, 항상 옆에 딸린 것은 무겁디무거운 니콘 렌즈와 코닥 카메라, 필름 세 통이 든 가방이었다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씁쓸하기도 했다 말씀하신다. 개나리가 폈을 땐 개나리가, 장마가 끝난 무더위에는 다도해를 배경으로 한 바다가, 가을에는 은행이, 겨울엔 목도리가 매어진 눈사람이 연애 시절 사진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배경을 벗 삼아 사진 속에서 홀로 웃고 있는 30년 전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 보고 있노라면, 아버지는, 20대 시절 늙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선물로 남기고 간 셈이다. 지금 나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 사진 속 인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채로 오랜 시간여행을 한다. ⓒ PIXABAY

우리 집에는 빛이 보존한 유령들이 많다. 태어나서 얼굴도 못 본 할아버지. 3살배기 나를 업고 있는 외할머니. 이런 분들이 인화지 속으로 들어와 시간여행을 하며 숨 쉬고 계신다. 그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모르게 마음 한쪽이 허했는데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카메라 밖에서 어머니를, 외할머니를, 할아버지를 인화지 속으로 시간여행을 시켜준 그였지만, 정작 당신은 빛을 포착만 했을 뿐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다. 빛이 보존한 유령으로 남은 유일한 모습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면서 짧은 시간 타이머에 쫓겨 빨리 앉으려다 살짝 흔들려 버린 납골당 속 그의 영정사진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아버질 바라보다 든 찰나의 생각. “내 사진은 있었던가?” 생각하며 스마트 폰을 열어본다. 아들, 아들, 아들, 딸, 딸... 죄다 자식 사진뿐이다. 나름 가족사진도 많았는데 얼마 전 스마트폰을 화장실 변기에 빠뜨리는 바람에 죄다 날아가 버렸다. 빛을 포착만 했을 뿐 추억으로 남기지 못한 대가를 톡톡 치른 셈이다. 그때 생각했다. 무조건 인화해서 ‘기록’으로 남기리라.

‘기록’보다는 ‘저장’이 편리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막상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나에겐 이제 갓난아기 때의 아들 모습도, 걸음마를 막 시작한 딸의 모습도, 바쁘다는 핑계로 변변찮게 찍었던 가족사진도 사라져 버렸다. 이것들은 눈을 감고 기억을 해야만 볼 수 있는 ‘잔상’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사진이라는 건 다른 형태의 시간여행이다. 50대가 돼버린 지금도 20대의 어머니가 개나리를 들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아버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프레스코 벽화도, 파피루스도, 코란도 모두 기록으로 남겨져 저마다의 시간여행을 하는데, 오늘의 나는 제대로 된 가족사진 한 장이라도 있는지... 스마트폰만 계속 뒤적거리다가 말아버린다. 마음이 허해졌다.

아들, 딸, 아내에게 말해야겠다. 내일이라도 예쁘게 단장하고 사진관에 가 제대로 된 가족사진 한 장 찍자고... 아마 그 사진은 내 아들딸이 40, 50, 60 아니 70대가 되어도 기억될 것이며 지구가 멸망하는 그 시간까지도 난 50대로 사진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난 빛이 보존한 유령이 되어 영원한 시간 여행을 할 것이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편집 : 박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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