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공론조사

▲ 박진홍 기자

주민 20만명이 사는 중국 웬링시 제구오진에서는 공공사업 우선순위를 공론조사로 결정한다. 참가자는 제비뽑기로 뽑은 주민들이다. 이전까지 의사결정을 담당했던 전문가들은 무작위로 선정된 주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행정책임자들은 결과를 인민위원회에 회부하는 절차를 담당할 뿐이다. 공론조사 참여자 중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었지만, 제구오진 주민들은 이 방식을 예산 편성‧심의로까지 확대했다. 글자를 모른다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니, 도움을 받아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다면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덕분에 노인복지나 학교 건설 등 시급한 현안이지만 전문가들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포기했던 사업들이 주민 결정 순서대로 되살아났다.

대의민주주의가 ‘그들만의 민주주의’라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신고리 5‧6호기 건설 여부는 제구오진처럼 공론조사로 결정하는 게 옳다. 선거로 뽑은 대표자들이 현안을 결정할 때, 그들이 밝히지 않는 이상 내막을 알 수 없다. 신규원전 건설 근거인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세울 때 대표자와 전문가가 나눈 논의 내용을 시민들이 상세히 모르는 이유다. 그동안 원전 관련 의사결정은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전적으로 소수 이해관계자에 맡겨 왔다. 그 결과 한수원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공부한 특정 학교 출신들이 학회부터 정부까지 이론과 실무를 모두 장악하고 원전 친화적인 결정을 내려왔다.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결론을 내린 후, 시민들에게는 “원전은 안전하니 걱정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하버마스가 정의한 성찰과 통합의 '공론장(Public Sphere)'은 없었다.

▲ 공사 재개‧중단을 두고 공론조사가 진행 중인 신고리 5‧6호기 공사 현장. ⓒ 박진홍

공론조사는 전문가라는 탈을 쓴 그들만의 ‘닫힌 공론장’을 여는 열쇠다. 제구오진의 ‘제비뽑기’를 설계한 제임스 피시킨은 “공론조사에서는 쟁점이 특정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증거에 기반을 둔 ‘동등한 고려(Equal consideration)’로 해결 가능하다”고 민주성에 방점을 찍는다. 덴마크 역시 이런 민주적 절차에 높은 점수를 줘, GMO 도입 여부나 줄기세포 연구 등 주요 과학기술 정책 결정도 ‘시민합의회의’에서 결정짓는다. 목사‧변호사‧택시운전사 등 업계와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 시민을 무작위로 뽑아 다수결이 아닌 총의(consensus)를 이룰 때까지 토론하는 방식이다. 토론 과정에서 시민들은 사안 결정에 필요한 지식을 숙지하고 입장을 정한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문가들끼리 결정하는 것보다, 정책 결정으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받는 시민이 ‘숙의’를 통해 내린 결정이 더 합리적이라는 게 덴마크 사람들의 생각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후에 <정치적 질서와 정치적 쇠퇴>에서 “자유민주주의도 계속 자기갱신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쇠퇴, 자멸한다”고 경고했다. 그동안 원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대의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후쿠야마의 경고는 가정이 아닌 현실이다. 후쿠야마는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덴마크를 꼽는다. “번영을 누리고, 안전하며, 잘 통치되고, 부패 정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 바탕은 대화와 토의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의 정착이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를 결정할 공론조사는 덴마크와 제구오진에서처럼 대의제 한계를 보완하고 정책 결정의 민주성을 담보할 절호의 기회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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