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열망과 절망’

▲ 민수아 기자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치아키’는 그림 하나를 보려고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여행을 왔다. 여자 주인공 ‘마코토’의 이모는 이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은 대사로 감상을 전한다. “계속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이 편해져. 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때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사고는 편협해질까, 아니면 더 근원적인 고민을 하게 될까? 10년 전에 본 영화지만 여전히 질문을 남기는 장면이다.

▲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남자 주인공 ‘치아키’는 과거의 그림을 보러 미래에서 시간여행을 왔다. ⓒ 네이버 영화 스틸컷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또는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서문에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을 인용한 데서 유명해졌다.

1920년대 미국은 역설적이다. 물질과 기업의 확장 시기로 미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시대로 알려졌다. ‘정상 상태로 돌아가자(return to normalcy)’를 슬로건으로 내건 워런 하딩의 1920년 대선 압승은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1920년대는 현대 미국 문학의 기초를 세운 혁신적 시기이기도 하다. 환멸의 상태로 전장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은 사회 불안정에 맞서 창작을 통해 자신의 공허, 무력감, 목표 상실, 정신적 해체 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려 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물질과 쾌락만을 찾는 사회현실에서 인생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들은 절망의 시대를 살았지만 새로운 가치에 열망했다.

한국의 ‘N포 세대’도 절망의 세대다. 한국의 청년 세대는 가구경제의 변화와 불안을 통해 IMF 위기를 간접 경험했다.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할 나이에는 보수정권 9년의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졌다. 집단적 ‘노오력’에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좌절감은 더욱 커진다. ‘노량진 공시족’으로 인생의 진로가 수렴되는 이들이 열망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뿐이다. 평균의 삶을 열망하는 청년들의 기억에서 ‘성취’나 ‘성공’이라는 단어는 사라져버렸다.

▲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5급 공채 및 외교관후보자 시험, 국가직 및 지방직 7·9급 등의 응시 인원을 모두 더하면 70만6000여 명(원서 접수자 연인원)에 이른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인원을 10만 명 이상 웃도는 숫자다. ⓒ KBS <명견만리> '40만 공시족 정답을 묻다' 화면 갈무리

젊은 세대가 새 정권에 희망을 거는 것을 단순히 현실을 타개해 줄 메시아를 바라본다거나 민주정권 1·2기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이라는 칼럼에서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썼다. 지옥은 진정한 토론이 없기에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2002년 ‘붉은 악마’가 외친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 사이에서 사라진 것은 토론과 그에 따른 희망이다.

직접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고, SNS를 활용하여 사회를 바꾼 게 한국의 청년 세대다. 단순히 실패가 축적된 자신의 삶을 해결해달라고 발악한 게 아니다.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지극히 정상적인 태도로 요구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작은 성공을 경험하고 희망을 품은 이들에게 맹목적이라며 청년 세대의 ‘문빠’ 현상을 깎아내리는 것이 불편한 이유다.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는 사회학습이론에서 자기효능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기효능감이란 자신이 어떤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 개인적 신념이다. 그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자기조절 과정의 하나로 자기효능감을 들었다. 구조가 왜곡되어 자기효능감이 부족했던 한국의 청년들이 정권교체를 통해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 이들이 열망하는 바는 경제적 차원을 넘을지도 모른다.

▲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좋은 시대’라는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파리의 시대상을 말한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스>의 '아드리아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살지만 '벨 에포크'를 동경한다. ⓒ 네이버 영화 스틸컷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좋은 시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파리의 시대상을 말한다. 프랑스는 근 80년 동안 혁명과 폭력, 정치적인 격동기를 치른 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2012년의 ‘길’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선망하고, ‘로스트 제너레이션’인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를 동경한다. 한국의 청년 세대가 ‘길’이나 ‘아드리아나’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의 열망이 절망에 지지 않는 시대가 오기를 열망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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