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흠'

▲ 정소희 기자

나는 몇 달째 팔리지 않고 있다. 말이 몇 달이지 매장에 나온 지는 2016년 2월부터이니 1년 반이 지나도록 전시(展示) 상태 그대로다. 전시상품(展示商品)이다 보니 흠이 있어 그런가, 스펙은 나름대로 괜찮은데 데려가겠다는 이가 없다. 전시상품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들었다. 공장에서 바로 나온 제품보다 값도 싸고, 매장에서 가동되어 본 경력도 있으니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팔리지 않는 걸까?

이 자리로 옮긴지는 세 달 정도 되었다. 전등 빛도 안 와 닿는 매장 구석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판매 부진은 나의 애매한 시장성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국내 최대 가전회사의 야심작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상품개발과 시험가동 단계에서 아주 까다로운 상품이 되었다. 회사 예상과 달리 나는 아주 ‘문제 상품’이 된 것이다. 기획자의 능숙한 조작에도 이상한 출력값을 내거나, 소비자들이 좋아할만한 기능을 첨가하면 오류가 나기 일쑤였다. 이미 기획∙개발∙제작 단계에서 돈을 너무 많이 쓴 터라 손실을 메우려면 어떻게든 시장에 내놓아야 했다.

회사는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팔리지 않을 것이 뻔했다. 팔린다고 해도 회사 브랜드 가치를 깎아먹을 상품이었다. 우리 회사 제품은 소비자들 입맛에 꼭 맞는 상품들만 출시해왔는데,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까다로운 상품은 회사의 불명예로 남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래서 그 흔한 보도자료 하나 없이 조용히 시장으로 밀어내졌다. 브랜드 좋고, 스펙 좋고, 환경과 조건에 예민해 조금 신경을 써야 하지만 가동을 시작하면 뒤떨어지는 상품은 아닌데, 가격이 좀 나가서 그런 걸까? 이만한 스펙에 이 정도 가격을 바라는 게 큰 욕심일까? 회사 이름 때문에 값을 후려칠 수는 없어서, 나는 애매한 포지션으로 시장과 매장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나는 존재만으로 반(反)시장적 제품이 되어버렸다.

▲ 때로는 오래된 상품의 가치가 신제품을 상회하기도 한다. Ⓒ flickr

여하튼 나는 안 팔리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점장은 나를 치울 궁리를 한다. 영업사원 출신인 그는, 우선 주변인에게 나를 넘기려 했다. “혹시 주변에 필요한 사람 없대? 좀 크긴 해도 막상 들여놓으면 괜찮다니까. 일도 잘하고, 튼튼하고, 고장 한번 없고 성실해.” 그의 영업력은 아쉽게도 나의 결점을 감싸지 못했다. 그런 그가 어제부터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나를 이따금 빤히 쳐다본다. 바쁘게 통화하며 나를 이리저리 훑는다. 얼핏 ‘기스’ ‘경매’, ‘중고’ 뭐 이런 단어가 들린다.

그러더니 바짝 다가 온다. 손에는 사포와 나사돌리개가 들려있다. “본사에서 가격을 내리려면 기스, 곧 흠이 나든가 부품이 빠져있어야 한다지 뭐냐. 겉에 기스 좀 나는 게 낫지 뭐.” 사포로 나를 문대며 그가 중얼거린다. “니가 좀 오래됐냐? 신상들 치고 올라오는 판에. 요새 나오는 애들이랑 비교하면 스펙 좋은 것도 아냐. 가전제품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같은 거야.” 흠이 묵직했다. 아프다기보다는 무거웠다. 흠을 새긴다는 건 물러날 곳이 없다는 얘기다. 이제는 오버스펙이니 언더스펙이니 평가받을 필요도 없겠지. 가격 하나로 승부를 보고, 나는 팔린다.

근데 내가 누구냐고? 나는 삼성공화국의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정소희다. 나는 아직도 안 팔리고 있다. 나를 좀 사주세요.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0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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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황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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