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흠' '틈'

   
▲ 이창우 기자

‘흠잡을 데 없다.’ 누구에게든 이만한 찬사가 있을까? 흠이라는 말은 ‘모자라다’, ‘빠진다’는 뜻의 한자 흠(欠)에서 왔다. 사람들은 흠 없음에 열광하면서도 질투한다. 흠은 사회 일반을 관통하는 ‘올바른’ 기준에 의해 ‘잡아내거나’ ‘잡힌다’. 웬만큼 잘나 보이는 사람도 매서운 눈으로 관찰하면 하나쯤 빠지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 사람은 다 좋은데 무엇이 흠이야’라며 험담한다.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다거나, 융통성이 없다거나, 장애가 있다거나, 수입이 적다거나 하는 개인의 특성들은 비정상, 곧 ‘흠’으로 수렴된다. 그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는 사람은 모난 돌로 낙인 찍힌다. 사람들은 ‘비정상’의 영역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분주해진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적 개인이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에 갇힌 상태라고 봤다.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 본다’는 뜻으로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이다. 수감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감시자의 시선을 내재화해 결국 스스로 검열한다. 푸코는 파놉티콘을 더 넓은 개념으로 부활시켰다. 그는 근대사회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를 파놉티콘과 같은 감시체제라고 진단했다. 규율과 훈련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법을 익힌 근대적 개인은 감시자가 없는 곳에서도 정상인으로 남기 위해 자신을 감시한다는 내용이다. 흠 잡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다. 그렇다면 이 답답한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 벤담의 '파놉티콘'이 그대로 구현된 쿠바의 감옥 프레시디오 모델로(Presidio Modelo).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 역시 이곳에 수감된 적이 있다. 혁명 성공 후에는 그 역시 쿠바의 정치범들을 이곳에 수용했다. 1967년 영구 폐쇄되어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사람들이 흠 대신 틈을 보는 눈을 가지면 좋겠다. 틈은 공간이다. 무언가를 열어젖힌다는 뜻의 동사 ‘트다’에서 나왔다. 흠이 사회적 기준에 따라 이미 규정된 영역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완결적이라면 틈은 능동적이고 가변적이다. 여유이기도 하고 기회이기도 하며, 균열이기도 하고 위기이기도 하다. ‘틈바구니’ ‘틈새시장’ ‘빈틈’ ‘틈타다’ ‘틈 막이’ 등 파생되는 단어도 다양하다. 우리 안의 틈, 사회 곳곳의 틈을 더 낼 것인지, 닫을 것인지, 그대로 둘 것인지 고민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훨씬 자유로워진다. 사회가 규정한 인식체계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

더 내야 할 틈이 있다. 노동자들의 틈이다. 근로기준법의 출산휴가나 육아휴가를 제대로 쓰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주위 시선 때문이다. 퇴근 후에도 업무지시를 내리는 직장상사와는 틈이 더 벌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낸 ‘틈을 타서’ 가족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공부해서 원하는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어야 한다. 성소수자들의 공간은 어떤가? 아웃팅의 위험 때문에 일반인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의 틈바구니에 고립됐다. 장애인에게 허용된 공간은 더욱 좁다. 휠체어가 갈 수 없는 곳은 너무 많고 시각장애인에게 도시는 너무 위험하다. 소수자에게는 더 넓은 틈이 절실하다.

메워야 할 틈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 문제,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 등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틈이다.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들은 너무나 약한 고리로 이 거대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균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작은 구멍도 댐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성수대교와 상품백화점 붕괴 등 최악의 참사도 전조가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사회는 균열이 잘 보이지 않게 뭔가를 덧댄 채 방치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강성 노조’ 등의 나쁜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고 수억 원 배상금을 청구한다. 여성들의 유리천장은 깨지질 않고, 데이트 폭력은 오늘도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갈라지고 있는 이 틈에 주목하지 않으면 그 여파는 사회 전체에 미칠 게 뻔하다.

푸코는 관례적인 이분법을 넘어 여성, 아동, 고령자,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동성애자 등 타자로 규정되던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틈을 보는 눈이 많을수록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일은 의미가 없어진다. 흠잡을 일도, 흠잡힐 일도 사라진다. 그런 날이 오면 ‘흠’이라는 말의 사용법도 변했으면 좋겠다. 한번 틈이 나면 메우더라도 작은 흠이 남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흠은 단순한 흉이 아니다. 왜 생겼는지 잊지 않고 가끔 돌아봐야 할 기억이고 역사다. 한 걸음 나아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흠잡을 데 없다’는 말이 오히려 흠이 되는 세상이 와도 좋으련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0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1학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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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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