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틈’

▲ 윤단비

“녹내장이네요.” 방송국 PD인 B에게 녹내장이란 단어는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었다. “시력을 잃게 되는 건가요?” B가 걱정스럽게 묻자 의사가 대답했다. “치료받으면 실명까지 이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야가 점점 좁아져 좁은 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겁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는 게 이런 기분이었던가? 여태까지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던데,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건지 B는 생각에 잠겼다.

B는 최근 방어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연애는 시작하기조차 힘들었다. 자신을 좋아할 만한 사람만 좋아했고 짝사랑은 해본 적도 없다. 인간관계도 힘들어졌다. 어느 순간 친구들도 자신을 피한다고 느꼈다. ‘어떠한 이유로 당신이 불편해’라고 명확히 말해준다면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도저히 경위를 알 수 없는 이유로 홀로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을 해댔다. 이미 머릿속은 헝클어져 버렸고, 다시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내면의 전쟁을 멈추지 못했다.

B는 자기검열을 하게 되었다. 머릿속을 청소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상황을 맞게 될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봤다. 무엇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건지 인과관계를 더듬어봤다. 하지만 설명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설령 이유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 그 끝에 서니 모든 일에서 방어적 태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자기검열의 필터는 끊임없이 작동했다. 자책이 이어진다.

이제 B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처럼. 대통령 선거 날에는 SNS에 해외여행 사진을 올렸다가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황급히 사전 투표 인증사진을 이어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고, 하고 싶은 말 중에 반박받지 않을 말들만 골라냈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시대라면서?’ B는 투덜대며 스크롤을 내렸다. 부러움을 자아내는 게시물에는 ‘좋아요’도 잊지 않았다. 자신 또한 그렇게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다는 사실은 모른 채.

▲ 현대 사회는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처럼,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flickr

“흠결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민낯을 드러내 보세요. 민낯이 정상인데도 사람들은 꾸미는 게 일상화해 있죠. 결국, 세상의 욕망은 단순해질 거고, 사람들은 좁은 틈으로만 바라볼 거예요. 전염성이 짙은 병이죠. 세상의 시야도 점점…” 의사의 설명이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야가 더 좁아지기 전에 프로그램 기획을 몇 개 더 해놔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단순 결벽증인 줄만 알았는데…” B는 중얼거리며 복잡한 마음으로 진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정신적 녹내장’이라 적힌 의사 소견서가 B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날아갔고, 진료실 문밖에서는 정신의학과라는 팻말이 흔들렸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10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경북대 졸업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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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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