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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사도를 보다

기사승인 2017.08.02  17: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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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비평] 영화 '사도' 정신분석학적 비평

   
▲ 안윤석PD

"오, 결혼이여, 어찌하여 너는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을 뒤섞어 놓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를 구별하지 못하였는가?”

연극 <오이디푸스 왕>에 나온 대사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테바이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곧 태어날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듣는다. 오이디푸스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버지에 의해 인적 없는 산에 버려졌다. 하지만 목동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았고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왕자로 성장하게 된다. 사건이 진전되면서 오이디푸스는 결국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고,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른 채 어머니와 결혼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차용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어머니를 향한 남자아이의 억압된 근친상간적 욕망과 부친 살해 의지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골자다. 한 아이의 정신적 발달 단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이가 반드시 넘어야 할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자 전환점이라고 프로이드는 주장한다. 한 아이의 정신적 발달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은 건강한 초자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적대자와의 타협, 즉 아버지의 규칙과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도덕성과 양심을 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에 실패한 경우에는 아이의 초자아와 자아 사이에 긴장감이 생기면서 도덕적 죄의식, 죄책감, 그리고 불안 등 심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매정한 아버지이자 왕, 영조

“...말씀을 가려 쓰셨는데 죽을 사(死), 돌아갈 귀(歸)자는 모두 꺼려 쓰지 않으시니라. 정무회의 등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는 입었던 옷을 갈아입으신 후에야 안으로 들었고, 불길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들으면 양치질하고 귀를 씻고 사람을 불러 한마디라도 말을 한 다음에야 안으로 들었다.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할 때 드나드는 출입문을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셨다.”
 
   
▲ 영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강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 영화<사도> 갈무리
영화 <사도> 속 영조는 길흉에 집착하고 강박적 증상을 보이는 등 심리적인 불안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대리청정시키면서 무의식적으로 시기하고, 굴욕을 주었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매정한 아버지이자 왕이었던 셈이다. 
 
영조는 출생부터 어머니가 무수리, 즉 천민 출신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27명 중 천민의 피가 흐르는 왕은 영조 단 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유달리 심했다. 심지어 아버지 숙종은 영조와 그의 어머니를 궁 밖으로 내쳤다. 궁 밖에서 빛 보다는 그림자로 살아야 목숨을 부지하는 왕족이란 환경을 영조는 긴 시간동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이복형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며 영조는 내심 자신이 왕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든세 살의 나이로 죽기 전 삼 개월까지도 왕권을 놓지 않을 만큼 권력욕이 큰 영조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소망을 드러낼 수 없었다. 욕망을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어서다. 본심을 억누르는 삶을 살아가며 영조의 무의식 속에는 여러 억압들과 공격성, 그리고 시기심이 축적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의 강박적인 행동은 이에서 비롯됐다.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결핍 덩어리였던 자신의 과거가 환기되는 과정이었다. 영조는 친어머니가 아니라 숙종의 정비인 인원왕후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지극정성으로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그녀의 총애를 아무런 노력도 없이 받는 것을 보면서 영조는 무의식적으로 아들에 대한 시기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인원왕후의 ‘어머니같은 사랑’이 자신이 아닌 사도세자에게 쏟아지는 걸 보면서 영조는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아들에게 갖게 된다. 이러한 시기심은 영조가 사도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영조의 질문에 대한 사도세자의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결과는 늘 꾸중이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부인인 정성왕후 능에 가는 행차에서 비가 오자 그 탓마저도 사도세자에게 돌린다. 영조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공격성이 사도세자에게로 표출된 것이다. 

실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고착된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자신의 뒤를 잇는 계승자가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권력과 업적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도전자였다. 마치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고 왕이 된다는 신탁에 처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처럼 영조는 자신을 위협하는 아들을 경쟁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영조의 무의식 속에 담긴 여러 억압들은 그가 말한 대사 한마디로 정리된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야!”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하고 거세된 사도세자
 
   
▲ 5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사도세자는 부모님과의 유대관계도 제대로 맺지 못한 채 엄격한 왕세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 영화 <사도> 갈무리
사도세자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그는 생후 백일 되던 날 어머니의 품을 떠나 별도의 큰 전각에서 내인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사도세자의 나이가 3~5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와 영조보다는 보모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그는 부모님과 건강한 초기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더불어 그는 성장하는 기간 내내 과도한 왕세자 교육을 받았다. 부모와 정서적인 유대도 없이 어린 나이에 왕세자 교육만 과도하게 받는 경험은 한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도세자에게 이 시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엄격하고 처벌적인 아버지에 의해 거세될 것이란 불안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버선 끈 하나까지 세밀하게 지적하는 아버지였기에 사도세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는 사도세자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영조처럼 사도세자도 비판적인 초자아가 그의 내부에 형성된 셈이다. 
 
‘왕’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사도세자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없게 만드는 한 요소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열다섯 살이 되던 무렵 대리청정을 시켰다. 아버지가 죽어야지만 왕이 될 수 있는 운명, 하나뿐인 왕의 자리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경쟁해야 하는 대리청정이라는 형식은 오이디푸스 적으로, 사도세자가 아버지와 적대적인 투쟁 관계 속에 처하게 만든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번번이 질 수밖에 없었으며 많은 사람 앞에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대리청정하면서 사도가 변변치 못한 결정을 내리면 당연한 듯 아들을 질책하고, 사도세자가 훌륭한 결정을 내리면 영조의 무의식 속에는 시기심이 작용해 나라의 중대한 일을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결정했다고 사도세자를 나무랐다. 즉, 영조는 사도세자가 가지고 있던 능력마저 시기하고 거세하는 아버지였던 셈이다.

   
▲ 무덤이란 공간은 사도에게 아버지 영조를 죽이고 싶은 마음의 표출이자 자기파괴의 상징이다. Ⓒ 영화<사도> 갈무리
 
영화 <사도>에서 마지막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화를 통해 사도세자가 간절히 원한 것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끝내 아들의 요구를 외면했지만 말이다. 사도세자는 사랑을 주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직접 표출할 수 없으므로 무덤 같은 집을 만들어 아버지에 대한 살인 충동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다. 오이디푸스기의 부친 살해라는 무의식적 환상이 무덤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사도세자, 그가 만들었던 무덤은 끔찍하게도 자신을 증오하는 아버지 영조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살하고 싶은,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자신 스스로를 처벌하는 그만의 무덤이기도 하였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 파국적 결말로 끝맺은 것처럼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도 파국으로 끝맺는다. 유럽에서 히틀러의 정신적 광기는 역사를 파시즘으로 치닫게 했다. 그러나 비극적 정서는 카타르시스라는 정신적 과정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로 환원될 수도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광기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라는 걸출한 왕에 의해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에너지로 활용된 것처럼 말이다.
편집 : 고륜형 기자

안윤석 PD eunomiadike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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