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의무수입량에 빼앗긴 ‘쌀주권’

하루 한 끼가 간절하던 시절, 벼농사 풍년은 농민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간절한 소망이었다. 추수가 끝나 추석이 오면 햅쌀로 떡을 만들고 온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감사의 의례를 올렸다. 지금은 정반대다. 이제 농민에게 풍년은 골칫거리다. 농업기술 발달로 쌀 생산력은 늘었지만, 식습관 변화로 쌀 소비가 줄어 재고가 넘친다.

2017년 현재 쌀 재고량은 351만톤으로 보관료만 매년 2천억원이 소요된다. 쌀 개방을 미루기 위해 매년 떠맡아야 하는 의무수입물량은 40만8700톤이다. 남아도는 쌀에 내려가는 가격은 농민의 쌀 주권을 위협한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정치적 논란 속에 묻힌 백남기 농민의 목소리

지난 2015년 11월 1차 민중총궐기대회. 한 농민이 차벽을 넘어뜨리기 위해 줄을 당겼다. 경찰들은 차벽 접근을 막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 강화유리가 부서질 정도로 강력한 물대포를 쐈다. 그는 쓰러졌고 뇌출혈로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결국 숨졌다. 고 백남기 농민의 이야기다.

▲ 고 백남기 농민의 메시지는 정치적 논란 속에 파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 <뉴스타파> 갈무리

백남기 농민이 숨진 뒤에도 고인에 대한 애도보다는 정치적 논란이 컸다. 사인과 관련한 책임론 공방을 시작으로 검찰과 경찰의 부검 문제, 빨간 우의 가격 음모론, 유족의 행보 논란 등이 그것이다. 언론을 통해 이런 문제가 논란이 됐지만 정작 왜 백남기 농민이 상경해 집회에 참여했는지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밥쌀용 쌀 수입반대와 쌀 가격 정상화였다.

과거로 돌아간 박근혜 정부의 농업정책

“농업을 직접 챙기겠습니다.” 2012년 11월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대선후보 농정 대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는 농업인의 문제에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취임 후 농민의 삶은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의 농업정책이 실패했다고 입을 모은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쌀 시장을 개방하면서 관세화율을ᅠ513%로ᅠ정하고, 의무수입물량(TRQ)은 ᅠ2014년ᅠ수준인 40만8,700톤을 계속ᅠ유지하기로ᅠ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농정 대토론회에서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고 다짐했다. ⓒ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쌀값은 2014년을 기점으로 폭락했다. 2016년 80kg 기준 산지 쌀값은 12만원 대로 23년 전 가격으로 내려갔다. 재임 기간인 4년간 17만6,552원에서ᅠ12만8,356원으로ᅠ13만원대가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농가 손실은 불 보듯 뻔하다. 2015~2016년ᅠ사이ᅠ쌀ᅠ농가에는 약 4조원의 손실이ᅠ발생했다.

더불어민주당은ᅠ지난 2월 발표한 ‘박근혜정부ᅠ4년ᅠ평가ᅠ자료집’을 통해ᅠ△한중FTAᅠ신중추진ᅠ△농업인ᅠ산재보험ᅠ도입ᅠ△농가통신비ᅠ지원ᅠ등이ᅠ전혀ᅠ이행되지ᅠ않았다고ᅠ평가했다. 또한ᅠ△ FTAᅠ피해보전직불제의ᅠ'수입기여도'ᅠ꼼수 적용ᅠ△ 농업소득세ᅠ부활과ᅠ같은ᅠ반ᅠ농민정책을ᅠ추진해ᅠ농민을ᅠ실망시켰다고ᅠ지적했다.

넘쳐나는 쌀, 문제는 의무수입물량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정부 양곡 재고는 233만톤이다. 민간 재고도 118만톤이나 쌓였다. 총 351만톤이다. 식량농업기구(FAO)가 권고하는 적정 재고량 80만톤을 4배 이상 웃도는 양이다. 상황이 이런데 매년 의무수입물량 약 40만톤을 떠안고 있다.

의무수입물량 문제는 1993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쌀 시장 개방을 미루는 대신 10년간 의무수입물량을 들여오기로 했다. 이후 2004년 쌀 시장 개방을 두고 재협상을 했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농민들의 거센 반대로 10년간 다시 유예했다. 대가로 5%의 저관세로 의무수입물량 쌀을 또 짊어졌다. 정부는 의무수입물량을 종전 10년보다 약 두 배 많은 40만8,700톤을 들여오기로 했다. 쌀이 남아도는 이유다.

2005년부터 가공용 쌀에 이어 밥쌀용 쌀이 추가 수입돼 국내쌀 경쟁력이 더 약해졌다. 가공용 수입쌀만 수입할 때는, 쌀과자나 막걸리 등을 만드는 데 쓰여 국내쌀 시장가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의무수입물량 가운데 30%는 밥쌀용 쌀로 수입돼 쌀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는 19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5월 8일 의무수입물량 가운데 6만5천톤의 구매 입찰 공고를 냈다. 4만톤은 가공용 현미, 2만5천톤은 밥쌀용 쌀이었다. 유통공사는 5월 16일 구매 입찰을 진행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즉각 반발했다. 전농 광주전남연맹 소속 농민 200여 명은 전남 나주 유통공사 앞에서 밥쌀용 쌀 수입을 저지하고, 김재수 농식품부 장관 파면 결의대회를 열었다. 전농은 “새 정부가 농민들의 호소를 끝내 묵살하고 밥쌀 2만5천t을 수입하기 위해 입찰을 시행했다”고 주장한다.

농식품부는 ‘밥쌀 수입 바로 알기’ 자료를 통해 “수출국의 밥쌀 수입요구는 계속됐고, 이에 2004년 협상 이후 의무수입물량의 일정 비율(10년부터 30%)은 밥쌀로 수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원칙은 국산쌀과 수입쌀에 차별을 두거나 경쟁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WTO 회원국으로서 원칙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의무수입물량, 정부가 나서야

청와대와 여권에서는 밥쌀용 쌀 수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시절인 지난 2월 경기도 안성 농민간담회에서 “적어도 밥쌀 용도의 쌀 수입은 막아야 한다”며 밥쌀용 쌀 수입을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1월 ‘밥쌀용 쌀 수입 중단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의무수입물량 철폐까지 가는 길은 험난해 보인다. 식량정책과 류성훈 주무관은 “관세화한다고 해서 (의무수입물량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며 “마지막 물량을 TRQ(정부 허용을 초과하는 물량에 높은 관세를 매기는 제도)로 개방한다고 했기 때문에 수입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역시 “불가능하다, 국제법이라 없앨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농촌경제원구원 곡물실 김종진 박사는 “(의무수입물량을) 없애려면 협정 자체를 다시바꿔야 한다”며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밥쌀용 쌀을 수입하는 것에도 비관적 의견을 내놨다. 관세화를 하며 밥쌀용으로 쓸 건지 가공용으로 쓸지 용도 조항은 삭제된 상태다. 김 박사는 “수입하지 않는 것은 문제 없다”면서도 “하지만 수입 안 하면 미국 등 밥쌀용 쌀 수출국에서 문제제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는 밥쌀용 쌀을 사는 것은 '정치경제'라고 말했다. ⓒ 임형준

이견도 있다. 중앙대 명예교수인 윤석원 양양 로뎀농원 대표는 “현실적으로 엎자는 얘기는 못한다”며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워도 주장을 할 필요는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입장에서는 인디카 쌀을 사야지 뭐 하러 밥쌀용 쌀을 사겠냐”며 “그런데도 계속 밥쌀용을 산다, 이게 정치경제”라고 지적했다.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한민수 정책실장은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했다. 한 실장은 “의무수입물량을 20만톤으로 줄이는 공격적 협상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넘치는 쌀을 해결할 방안도 나왔다. 한 실장은 “밥쌀용 쌀 수입이 궁극적으로 중단되면 좋지만, 수입해와 묵혀서 주정용 등으로 쓰면 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대책 없이 갈수록 떨어지는 쌀값에 농민의 시름은 깊어간다. 전문가들은 의무수입물량 철폐에 회의적인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의무수입물량 그늘 아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밥쌀용 쌀의 수입을 막자고 했다. 의무수입물량 문제 해결의 열쇠는 문 대통령이 쥐고 있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 :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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