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의 편지] 이연주 기자

문재인 대통령께.

▲  이연주 기자

안녕하세요. 저는 한때 영화 제작을 꿈꾸던 영화과 졸업생입니다. 저의 꿈이었던 영화 제작자의 길을 포기한 건 대학에서 겪은 현장 경험 때문입니다. 여학생들은 보통 영화를 제작할 때 연출, 미술, 제작, 편집 분야에서 일합니다. 촬영, 조명부에서는 여성 스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명 ‘남초’라고 불리는 촬영부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촬영부 일을 하려면 남자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하고, 음담패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kg이 넘는 조명 장비도 척척 들어야 합니다. 저도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10kg이 넘는 조명 장비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아프다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여자애들이라 체력이”, “그냥 연출부나 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학생들이 연출, 미술 같은 분야를 한다고 해도 편하진 않습니다. 2016년 초, 여자 후배가 연출하는 촬영장에 갔습니다. 촬영 도중, 갑자기 현장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조명을 맡은 한 남자 선배가 연출인 여자 후배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 후배가 조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선배는 ‘남자’ 선배가 조명 지적을 할 때는 웃으면서 지적을 받아들였습니다. ‘실제 상업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여성 감독을 남자 스태프가 무시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배우 공효진은 이 때문에, 영화 <미씽>을 찍을 때 변영주 감독에게 힘을 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 영화 <우리들>은 여성감독 윤가은의 첫 장편 영화로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의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으며 청룡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 네이버 영화 스틸컷

여성 영화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펴고 싶어도 견고한 남성 중심의 수직적 구조에 막혀 좌절합니다. 작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327편 중 여성 감독이 만든 상업영화는 9편에 불과하고, 다양성 영화까지 합쳐도 30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성 영화인들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을 만든 윤가은 감독은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작년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다른 여러 영화제에서도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상을 탔습니다. 올해 열린 제70회 칸 국제 영화제 감독상은 <매혹당한 사람들>을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라는 여자 감독이 받았습니다. 여자 감독도 남성 감독 이상으로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영화 네트워크 안에서 여성은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대통령님이 후보 시절 성 평등이야말로 모든 평등의 출발이고 인권의 핵심 가치라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영화계는 성 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는 대부분 남성 중심적 내용입니다. 투자사들이 흥행이 보장되는 남성 주인공의 액션 누아르 영화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거의 없습니다. 남성은 우월하게 그려지고 여성은 그런 남성을 도와주는 조력자로 나옵니다. 영화 같은 미디어는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데, 남성의 시각이 담긴 영화만 나온다면 성 평등 사회로 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여성 감독의 영화, 여성의 시선이 담긴 상업 영화가 많이 나와서 성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여자 스태프는‘여자 때문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자도 들기 벅찬 무게의 조명 장비나 촬영 도구를 혼자 옮긴다. © 이연주

최근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없애고 진상 조사를 하는 등 상처받은 문화 예술계 사람들을 보듬으려는 대통령님의 의지를 봅니다. 블랙리스트를 계기로 예술계에 있던 적폐를 청산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법정 근로 시간은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입니다. 하지만 영화 현장에서는 법정 근로 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표준근로계약서가 만들어졌다고 하나 여전히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이 강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 감독, 여성 촬영 감독 양성에 걸림돌이 됩니다. 여성은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예 기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행도 큰 걸림돌입니다. 영화 <걷기왕> 제작진들은 남성 중심적인 현장을 탈피하고, 성희롱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촬영하기 전 스태프들에게 성희롱 예방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성희롱 예방 교육은 법정 의무 교육이지만, 제작사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는 실정입니다.

영화과 학생의 70%는 여자입니다. 후배 학번 중엔 정원 20명 중 19명이 여자인 학번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저처럼 남성 중심적인 촬영 현장을 경험하면서 영화인의 꿈을 접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꿈을 지켜주세요. 여성 영화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주세요. 여성 영화인의 영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고 여성 감독의 영화가 천만 영화가 되는 날을 기대합니다.

2017. 07. 20.
이연주 기자 드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어느덧 두 달이 되었다. 촛불 염원은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이었다. 5.18행사장에서 흘린 눈물과 유가족을 포옹하던 일, 의전없이 버스를 타거나 기능직과 식사하고 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요구하던 초반의 감동은 연이은 인사 실패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도 개혁드라이브에 걸림돌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취임 두 달,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비뉴스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제언의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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