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의 편지] 신혜연 기자

▲ 신혜연 기자

약속을 지키실 줄은 몰랐어요. 저를 집에 들이시기로 한 결정 말이에요. 한 동물단체가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될 날만 기다리던 저를 발견했죠. 대통령이 되면 저를 입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시던 날이 기억나요. 저에게 쏟아진 관심은 놀라웠습니다. ‘퍼스트 도그’라나요. 천만 애견인 시대 ‘동물권 신장’이란 상징성을 등에 업고, 저는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성했습니다. 넓은 앞마당을 뛰어다니는 일도, 맛있는 사료를 매끼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것도 믿기지 않아요. 비좁은 철망 안에서 지내던 과거 일은 빛 바란 흑백사진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 동물권 단체 ‘케어’가 보호해온 유기견 ‘토리’.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약속대로 토리를 청와대로 입양했다. Ⓒ 케어

대통령님. 혹시 눈치채셨나요? 요즘 저는 부쩍 힘이 없어졌습니다. 청와대에서의 날들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어제는 육포 간식마저 한 줌 남겼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마루와 찡찡이도 제게 잘해줍니다. 문제는 세상일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는 겁니다. 사육장에서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을, 푸른 기와집 아래서는 쉽게 접할 수 있거든요.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19살 청년이 1주기를 맞았다거나 3년 만에 자식의 주검을 찾은 세월호 유족들 소식,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뱃속 태아를 둘이나 잃었다는 산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발바닥 한가운데가 아릿합니다. 너무 가슴 아파 왈왈, 짖기도 해요. 그저 끼니나 궁리하던 과거가 차라리 그리울 정도입니다.

그저께는 성 소수자인 현역 대위가 군사법원에서 ‘추행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그 날, 그는 법정에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20대 젊은 대위 이야기를 듣고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이전 주인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고, 동물단체에 구출된 후로는 한동안 새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시커먼 털 뭉치 같은 제가 ‘재수가 없다’고들 했습니다. 개들끼리야 흰 개, 까만 개가 구분이 없지만, 사람들은 차별하기를 좋아합니다. 까만 털을 가지고 태어난 건 제 잘못이 아니지만, 누구도 제 항변을 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세상에서 버려졌습니다.

대통령님,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버리지 않고 청와대로 들여줘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님도 대통령님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끼실 겁니다. 사람들이 왜 대통령님께 저를 청와대에 들이라고 추천했는지 한 번 더 생각해주세요. 저처럼 사회에서 부당하게 차별받던 이들에게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어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살기 이전, 청와대에 살던 개는 진도에서 공수해온 혈통 좋은 진돗개였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청와대에는 ‘재수 없다’고 버림받고 학대받던 저 토리가 살고 있습니다. 까만 털을 가진 유기견도 생명이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문재인 정부의 상징으로 만들어주세요. 세상에 ‘합리적인 차별’은 없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님께서 눈 감는 순간, 저 같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은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됩니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 2016년 7월 헌법재판소가 군형법상 '추행'죄 합헌 결정을 내리자 시민단체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군 관련 성 소수자 인권침해, 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2007년 UN 인권이사회는 한국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습니다. 헌법의 평등이념에 따라 성별, 장애, 나이, 피부색, 출신 지역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민주사회에서 ‘평등권’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인 이 법안은 한국에서 지금까지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명시한 구절 때문입니다.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이를 발의했다가 보수 기독교계의 항의에 자진 철회했습니다. 20대 국회가 열리고, 대통령님이 취임했습니다.  세계는 다시 우리가 UN이 권고한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저를 버리지 마세요.

2017. 7. 16.
토리 올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어느덧 두 달이 되었다. 촛불 염원은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이었다. 5.18행사장에서 흘린 눈물과 유가족을 포옹하던 일, 의전없이 버스를 타거나 기능직과 식사하고 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요구하던 초반의 감동은 연이은 인사 실패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도 개혁드라이브에 걸림돌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취임 두 달,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비뉴스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제언의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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