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의 편지] 안형기 기자

▲ 안형기 기자

문재인 대통령님.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겠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다. 잘못된 일은 잘못했다고 얘기하겠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 신명 바쳐 일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요. 1968년 신동엽 시인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아름다운 석양의 나라를 작은 풍경화 한편으로 그려낸 산문시가 생각나더군요. 대한민국 국민도 ‘아름다운 석양의 나라’를 가질 수 있을까요?

"노동자들이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등을 주머니에 꽃은 채 퇴근하는 나라.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가 매표구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나라. 농민들이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잘 아는 나라. 어느 쪽에도 총을 겨누는 야만에 가담하지 않는 나라. 어린아이들이 행복하고 꽃동산에서 뛰어노는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사람에게 상처 내는 무기는 절대 들여올 수 없다고 배짱 지키는 나라." - 신동엽 <산문시1> 중

대통령님. 불행하게도 제가 지금껏 겪은 대한민국은 ‘아름다운 석양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들로 신동엽 시를 패러디해 봤습니다.

대한민국이라든가 뭐라구 하는 나라에서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지신 분이 선글라스 걸친 강남아줌마 손 붙잡고 압구정 성형외과 거리 미용 시술 받으러 나오신단다. 강남역 퇴근하는 계약직들 가방 안주머니마다엔 손때 묻은 토익 토플 회화 중국어 책. 지방순찰 떠나는 국무총리 오송역 VIP대합실 대통령 급 황제의전에 수십 명 수행비서 줄지어 서 있고 오송역장 황송하옵니다 90도 폴더인사 한 뒤 목포행 KTX 뒤꽁무니 지평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옴짝달싹 못하더란다. 팽목에서 광화문까지 출렁이는 노란 물결 구의역에서 상암동까지 팔랑대는 청춘목숨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123층짜리 바벨탑. 이름은 잊었지만 헬조선인가 불리우는 그 나라에선 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청년백수들 자격증을 몇 개씩이나 가지고도 신림동 단칸방에서 사는데 철학자 소설가 시인 이름은 잘 몰라도 재벌 대기업 소유주 가계도 훤하더란다. 패거리지어 빨갱이, 종북, 색깔론으로 몰아넣고 오월 광주 표현의 자유 예술창작 블랙리스트로 완전 소탕한 야만의 나라. 어린이들은 개천에서 용나랴 질문을 아니 하고 국정교과서로 역사교육하며 국영수 사교육이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다 자기네 참외밭 상처 내고 사드미사일도 레이더포대도 들어올 수 없소 발버둥 쳐도 끝끝내 보고누락 발사대 밀반입한 알자회, 한반도 단월(丹月) 무너진 백남기 농민의 피눈물 고이고 푸짐한 용산 용역깡패 매타작소리 그 자리에 남은 건 마천루뿐. 푸른 기와집으론 최 선생님, 보안손님 직함가진 강남아줌마가 리무진 트렁크에 태반주사 백옥주사 가득 싣고 놀러가더란다.

대통령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은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느냐’ 입니다. 힘들고 지쳤을 때 한국인들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졌을 때, 국가는 그들에게 몇 십 만원 자기계발 지원금조차 인색했습니다. OECD 회원국 중 노인자살률 1위인데 지난 정부는 공약으로 내세웠던 노인기초연금을 철회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복지는 박살났고, 국가는 끊임없이 국민들을 경쟁으로 내몰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의지할 벗이 없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님, 5·18 기념식에서 유족의 편지를 낭독한 김소형씨를 위로했던 그 마음 끝까지 변치마시고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으로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 SBS 뉴스화면 갈무리

대통령님.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내 친구 같은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이 아니라 진짜 나의 아픈 마음을 달래줄 ‘친구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국민들의 소소한 아픔을 함께 느껴줄 지도자가 절실합니다. 정치인이 아닌 내 친구가, 군림하는 자가 아닌 나의 아픔에 공감하는 벗이, 국민과 함께 웃고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대통령이 돼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대통령님. 당신께선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되실 수 있으신가요?

2017. 7. 9
안형기 기자 올림

추신, 그러고 보니 오늘이 딱 취임 두 달이 되는 날입니다.


오는 9일이면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두달이 된다. 촛불 염원은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이었다. 5.18행사장에서 흘린 눈물과 유가족을 포옹하던 일, 의전없이 버스를 타거나 기능직과 식사하고 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요구하던 초반의 감동은 연이은 인사 실패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도 개혁드라이브에 걸림돌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취임 두 달,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비뉴스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제언의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

편집 :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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