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윤희철 교수의 군산 근대 건축 기행

‘70인과의 동행’은 70인의 명사가 이끄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경향신문>이 창간 70주년을 맞아 시작한 것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유적지 답사를 하는가 하면 문학기행을 하고 때로는 그냥 산수 유람을 하기도 한다.

▲ 윤희철 대진대 교수가 명사로 인솔을 맡았다. ⓒ 고하늘

지난 5월 20일 동행은 윤희철 대진대 교수(56•건축학)와 함께 떠나는 군산 근대건축기행이었다. 건축가이자 펜화가이며 음악가인 윤 교수는 군산으로 떠나기에 앞서 경복궁, 인사동 등 서울의 명소를 세밀하게 표현한 펜화를 선물로 주었다. 건축을 공부하고 명소를 그리는 그에게 건축물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역사를 들여다보는 창구이자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가교다.

그 나라의 민족성을 닮은 건축양식

군산에는 동국사가 있는데 국내에 하나뿐인 일본식 사찰이다. 1909년 조동종 승려 우찌다가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포교소로 개창한 뒤, 191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에도시대 양식으로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했다. 윤 교수는 “지붕만 봐도 그 나라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 동국사 대웅전 지붕은 에도막부 시대 쇼군(장군)의 투구를 연상시킨다. ⓒ 고하늘

“대웅전 지붕은 곡선의 멋이 두드러진 한국 전통 양식과는 반대로 직선이 주를 이뤄요. 우리 민족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반면 일본은 거칠고 강한 성격인 것처럼 말이죠. 추녀도 부챗살 모양이 특징인 한식과 달리 격자 형태를 하고 있죠. 단청도 없어요. 자세히 보면 의도했는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도막부 시대 쇼군(장군)의 투구를 연상케 하죠.”

위화감이 들었다. 머릿속에 우리나라를 침탈했던 일본 장군의 투구가 그려졌다. 동국사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품고 있다. 사찰 한쪽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어 더욱 처연한 생각이 들게 한다.

민족의 아픔이 서린 근대문화 유산

“옛 군산세관입니다. 건물에 뾰족뾰족한 탑들이 있잖아요. 소첨탑이라 하는데 고딕건축에서 볼 수 있어요. 경사진 지붕과 아치, 그리고 주출입구 양식을 보면 르네상스 요소가 있죠. 위에는 고딕 양식 아래에는 르네상스 양식이 절충된 절충주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옛 군산세관은 절충주의 양식이며 건물의 비례가 돋보인다. ⓒ 고하늘

옛 군산세관은 유럽을 모방한 일본인들의 건축사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윤 교수는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색 벽돌이 아담함을 돋보이게 한다”며 “벨기에산 벽돌이 군산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군산항 개항 후 주변이 조계지로 지정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제는 1899년 5월 군산항을 강제 개항해 조계지로 지정했다. 조계지는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상업과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지역이다. 당시 일본의 조계지는 침략과 식민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군산을 쌀 수탈의 전초기지로 이용했다. 군산에 세워진 일제 건축물도 대부분 쌀 수탈이 목적이었다. 170여 채 근대문화 유산에는 땅과 쌀을 빼앗긴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다.

건물과 함께 복원된 침탈의 역사

▲ 근대건축관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당시 다른 건물보다 우뚝 솟아 있었다. ⓒ 고하늘

군산항 인근에 있는 근대건축관은 일제 때 조선은행 군산지점을 복원한 건물이다. 1922년에 세워진 조선은행은 군산항을 통해 반출되는 쌀의 자금과 농지 수탈 대출자금 등을 관리하던 금융시설이다. 윤 교수는 “건물 외벽에 장식이 없는 것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분리파양식이지만 출입구의 모습은 르네상스 풍으로 여러 사조가 섞인 절충주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며 “당시 일본이 유럽에서 시작된 건축기술을 빨리 접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지붕을 보면 우진각지붕인데 필요 이상으로 높게 지은 것은 다른 건물보다 우뚝 솟아있게 만들어 당시 일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아요.”

근대건축관은 해방 후 한국은행에 이어, 한일은행이 들어섰다가 예식장, 나이트클럽, 노래방으로 사용됐지만, 지금은 조선은행과 군산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사진과 기록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역사의 횃불로 타오른 임피역

마지막 여정인 임피역은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군산항으로 향하던 군산선 역사(驛舍) 중 하나였다. 1936년 지어진 임피역은 지금도 기차가 지나가지만 역사는 관광지로만 사용되고 있다.

“여기 임피역 / 유년의 그림자 눈에 어려 온다 / 동쪽 철길가 언덕 / 소작농 땀 배어든 볏가마 / 수탈되어 철마에 실려갔던 자리 / 굶주린 배 성난 눈초리 / 임피, 서수에서 남산재를 넘어온 / 외마디소리 휘몰아쳤던 날 / 그 날의 임피역 / 이제 역사의 횃불로 타오른다.”

김중수의 시 ‘임피역’이다. 시인은 민족의 아픔을 횃불로 승화시켰다. 올해 건축학과에 진학한 나경준(20•서울) 씨는 군산 근대건축 기행을 마치고 난 뒤 “군산의 근대건축이 아픈 역사를 상징하지만, 아픈 역사라고 잊으면 안 된다”며 “후대 사람들도 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잘 남겨둬야 한다”고 했다.

▲ 군산선의 간이역이었던 임피역은 이제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철마의 소리만 요란할 뿐 적적하기까지 하다. ⓒ 고하늘

윤 교수 또한 “군산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일본식과 한국식 건축문화의 차이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교보재의 가치도 있지만 살아있는 역사이자, 역사의 산물이기에 잘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1919년 3월 군산에서 호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정미소 미선공 조합을 중심으로 일본인 자본가에 맞선 총파업 투쟁을 감행했다. 1927년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 농민운동인 옥구농민 항일항쟁도 일어났다. 군산은 일제의 수탈이라는 아픔도 겪었지만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난 민족 저항의 중심지였다. 군산에 남겨진 근대건축이 수탈의 역사를 품고 있으면 좀 어떤가? 아픈 상처에서 새살이 돋을 텐데.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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