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기호학적 시선으로 본 美 파병군인 가족 재회 영상

군인이 긴장된 표정으로 기내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한 승무원이 “누가 너를 가장 그리워할 것 같니?”라고 묻자 군인은 망설임 없이 “엄마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내 환한 미소를 짓는다. 기내 뒤편에 그토록 보고 싶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깜짝 등장에 아들은 함박웃음을 지었고, 엄마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눈물을 쏟는다.

미국 폭스TV로 방송된 이 영상은 6개월 동안 떨어져 있던 군인 아들과 엄마의 재회를 담고 있다. 미국 TV는 귀환 장병과 가족이 재회하는 영상을 심심찮게 방송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개인이 올린 영상이 온라인을 통해 많은 사람과 공유되기도 한다. ‘soldiers coming home'이라는 키워드로 유튜브에 검색하면 미국 파병군인 컴백 이벤트를 질릴 때까지 볼 수 있다.

▲ 파병에서 돌아온 군인 아들과 그의 엄마가 재회하고 있다. ⓒ FOX News 갈무리

롤랑 바르트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에서 파병군인 영상이 유포되는 현상은 ‘신화’ 만들기 과정이다. 바르트는 특정 시기의 지배 집단이 신화를 만들고 유포시킨다고 본다. 현대 사회에서 물질적 성장주의는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와 같이 대중에게 익숙해져서 당연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는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신문 기사, 사진 등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현상이 포함된다. 그 이면에 지배 계급이 확산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고 바르트는 본 것이다. 신화는 그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은폐하고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상식으로 통용시킨다.

그렇다면 감동을 자아내는 이 영상에 어떤 신화가 숨어있다는 것일까. 신화는 외연과 내연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외연이 카메라에 포착된 대상을 필름에 기계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라면, 내연은 이 과정에서 의도적인 선택이 개입된 부분을 의미한다. 초점, 노출, 카메라 앵글 등은 의도적으로 선택되고, 그 선택에 따라 다른 함축 의미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 그는 일상생활에서 신화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해 문화의 사회학적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 annalisa ceolin NO new Flickr

내연 과정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이차적 의미가 생성되는지 살펴보자. 파병군인과 엄마와의 재회 장면 속 분위기는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하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런 분위기는 군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듬직하고 자랑스러운 감정을 갖게 만든다.

군복이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전쟁이다. 전쟁은 잔혹한 살인이 자행되는 죽음의 장이다. 그곳에서는 살육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 참여하는 당사자에게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으며 그런 전장에 자식을 보내는 가족은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힘이 마땅하다. 하지만 영상에서 군복이 상징하는 일차적 의미는 사라진다. 그 자리를 무사 귀환, 다행, 기쁨, 자랑스러움, 영광 따위의 새로운 함축 의미가 대신한다.

영상은 군복에 기쁨, 자랑스러움, 영광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심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생성된 새로운 이차적 의미는 반복적인 재생산을 통해 신화로 자리 잡는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군복 영상에 지속해서 노출됨에 따라 미국 시민은 미군이 자유와 평화, 세계의 정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위대한 ‘미군 신화’의 탄생이다.

미군 신화는 그 의미를 자연의 일부로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기원을 위장하고 스스로를 보편화시킨다. 또한, 신화의 의미를 불변하고 공정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미국 군사 행위의 정당성’이라는 지배 담론을 교묘히 유포시킨다.

▲ 미국의 이라크 폭격 장면. 미국은 석유와 중동지역의 패권장악을 위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해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였다. ⓒ Noticias Virtuales

영상을 통해 재생산된 미군 신화의 효과는 또 있다. 지배 계급의 고착화다.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목숨을 바쳐 국가에 헌신해야 할 청년들이 군대에 자원입대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군대가 강제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라 ‘가고 싶은 군대’여야 한다.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디 있으며, 전장에 가 목숨을 바치고 싶은 자 누가 있을까. 하지만 영상은 군대가 청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일자리임을 암시한다.

미국의 대다수 가난한 시민은 선택권이 없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고, 갈수록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없다. 소수 특권계층만이 군대에 가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의 특권층 젊은이들은 군 복무를 꺼렸다. 용병들만 가득했을 뿐이다. 이라크 전쟁 이후에도 지원자들을 살펴보면, 저소득층과 중간 소득층 출신, 흑인과 히스패닉의 비율이 현저히 높았으며 네 명 중 한 명이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일류 대학 졸업생의 입대자는 1%도 안 되고 의회 의원의 자녀 중 지원자는 겨우 2%였다. 군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로 진출하는 소수 특권계층의 자녀가 기득권 계급을 더욱 고착화하고 재생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외교·안보정책 결정권자들이 파병, 전쟁 결정을 내릴 때 이런 상황 때문에 부담을 덜 느낀다는 점이다. 징병제에서는 고위관료, 국회의원, 대법관, 재벌 등의 자녀도 모두 군대에 가야 한다. 전쟁이 나면 그들의 자식도 똑같이 위험해진다. 하지만 모병제로 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2006년 찰스 랭걸 미국 민주당 의원은 “징병제로 미국 관료와 정치인 자식이 군대에 있었다면 정부가 빈약한 정보로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은 부자들이 벌이고, 피를 흘리는 건 가난한 자들인 것이다.

파병군인과 가족의 재회를 담은 영상은 바르트적 의미의 신화다. 전쟁의 어두운 이면을 감춘 채 미국의 군사 행위를 정당화하는 지배 담론을 담고 있다. 피지배층 청년이 국방의 의무를 지게 함으로써 지배계층은 그들의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들은 전쟁의 위험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전쟁 결정을 스스럼없이 내려 힘없고 가난한 청년들을 목숨이 오가는 전장으로 내몬다. 신화가 무서운 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가치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데 있다. 바르트는 이처럼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되는 신화를 폭로해 거짓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편집 :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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