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월드] 기부약속 점검한 워싱턴포스트의 파렌트홀드 기자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짜 뉴스(fake news)’로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는 근거 없는 주장을 서슴없이 퍼뜨려왔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 방 맞았다. 퓰리처상 선정위원회는 지난달 10일 트럼프 대통령의 기부활동 관련 거짓말을 검증한 <워싱턴포스트(WP)>의 데이비드 파렌트홀드(40) 기자에게 국내보도부문 퓰리처상을 안겼다. 지난해 3월 이후 연속 10차례의 보도를 통해 ‘박애주의자(philanthropist)'를 자처한 트럼프의 민낯을 까발린 데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이다.

▲ <워싱턴포스트>의 데이비드 파렌트홀드 기자. ⓒ 퓰리처 홈페이지

돈만 아는 억만장자냐, 박애주의자냐
 
지난 1월 취임한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게는 ‘억만장자’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미국의 대표적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는 2015년 11월 대선 행보를 본격화하며 내놓은 자서전 <불구가 된 미국(Crippled America)>에서 약 87억 달러(약 9조 7천억 원)의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 자랑했다. ‘절세’와 ‘탈세’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자산운용 기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억만장자는 동시에 ‘박애주의자’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지난 2000년에 쓴 다른 자서전에서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수혜자이고, 공동체에 환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기생충과 같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이런 박애주의자 이미지는 트럼프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파렌트홀트 기자는 ‘과연 그런지’ 검증에 나섰다.

작년 1월, 트럼프는 아이오와주에서 참전용사를 위한 자선모금 행사를 열었다. 공화당 예비대선후보 신분이었다. 행사에는 트럼프의 부자 친구들이 참여했고, 1시간 만에 6백만 달러(약 67억 원)를 모았다는 시끌벅적한 홍보가 뒤따랐다. 트럼프는 24개 수혜 단체 목록을 공개했다. 그는 아이오와 유권자들에게 ‘참전 용사에게 6백만 달러를 기부한 박애주의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 트럼프 재단이 참전용사들을 위해 연 온라인 기부 사이트. 참전용사 기부 행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 진행했다. ⓒ donaldtrumpforvets

기부 행사 두 달이 지난 2016년 3월, WP는 “트럼프가 참전 용사를 위해 모금한 돈, 절반만 자선단체로 갔다”란 제목의 기사를 내놓았다. 모금 행사를 주최한 트럼프 재단에 기부내역을 요청하자 6백만 달러 중 절반인 3백만 달러에 대해서만 구체적인 내역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기부금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고, 트럼프의 기부 목록에 있던 단체들은 “약속된 만큼의 돈을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트위터 활용한 검증 취재로 꼬리 잡아 

기부 행사가 끝난 후 4개월이 지난 시점까지도 WP는 구체적인 기부 목록을 달라고 트럼프 재단을 압박했다. 돌아온 답은 남은 3백만 달러 중 1백만 달러를 최근 기부했다는 얘기였다. 지난해 5월 “4개월 후, 트럼프가 참전 용사들에게 기부금을 줬다고 밝히다”란 제목의 WP 기사는 이 해명조차 거짓말이었음을 폭로했다. 퇴역군인 자선단체 중 트럼프로부터 기부를 받은 곳이 있는지 트위터에 공개 질문한 결과 단 한 곳으로부터도 답이 오지 않았다. 트위터에 질문을 올린 지 1주일 후 트럼프 재단은 전사한 해군과 경찰관의 유족들을 돕는 ‘해병대와 경찰 재단'에 1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재단 측은 수혜 단체를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해명했지만, 사실 ‘해군과 경찰 재단’은 과거에도 트럼프 재단으로부터 기부를 받은 일이 있었고 트럼프에게 상을 준 적도 있는 곳이다. WP가 트럼프에게 기부가 늦어진 이유를 묻자 ‘형편없는 놈(nasty guy)’라는 욕설이 돌아왔다. “나는 의무도 아닌 돈 백만 달러를 기부했어.” 트럼프는 항변했다. WP가 끊임없이 트럼프에게 나머지 기부금의 행방을 묻자 “나는 6백만 달러를 모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며 말을 바꾸기까지 했다.

‘공짜 골프 게임’도 기부 실적으로 계산 

트럼프는 기부를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선거 운동이 시작된 날, 트럼프는 “지난 5년간 1억 2백만 달러(약 1,140억 원)를 기부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캠프는 증거자료로 93페이지에 달하는 4,844개의 기부 목록을 내놓았다. 기부 목록을 따져보니 상식을 뛰어넘는 사례들이 넘쳐났다. 자선 행사에서 트럼프 골프장을 공짜로 이용하게 해 준 대가를 기부실적으로 환산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짜로 트럼프 소유 비행기를 태워주거나, 소송 합의금으로 낸 것도 기부 실적에 잡혀 있었다. 한 예로 트럼프 재단은 한 남성이 운영하는 자선단체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는데, 이 남자는 트럼프의 골프 코스에서 홀인원 상금을 거절당한 일로 소송을 했던 인물이었다. 합의금을 재단 기부금으로 메우고, 그 금액을 기부 목록에 올린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땅에 대한 개발권을 포기하는 ‘토지보존 협약’을 맺은 것도 돈으로 환산해 기부실적에 올렸다.

트럼프 재단의 기부가 트럼프 개인의 기부로 거론되는 것도 문제라고 WP는 지적했다. 지난 2008년 이후 트럼프는 자신의 이름을 건 재단에 한 푼도 기부하지 않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기부를 받아 재단 활동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는 기부받은 돈을 어디 쓸지 결정하는 역할만 했다고 한다. 1987년에 책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국구 스타’가 된 트럼프는 책 인세 중 550만 달러를 내 트럼프 재단을 설립했지만 10여 년 전부터는 전혀 돈을 내지 않고 있다고 WP는 보도했다.

남의 돈으로 기부하고 상 받는 트럼프

2010년 트럼프는 플로리다주 팜비치 시의 ‘팜비치 경찰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꾸준한 기부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실제로 경찰재단에 돈을 낸 건 뉴저지에 있는 찰스 에번스 재단이었다. 에번스 재단은 “야자수 경찰재단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트럼프의 말에 2년간 15만 달러를 트럼프 재단에 냈고, 트럼프 재단은 이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역할만 한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 재단의 역대 기부 내역 중 수상한 것은 한 둘이 아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트럼프 재단이 쓴  190만 달러 중 노숙자, 에이즈 단체 등에 순수 기부목적으로 간 것은 전체의 8%뿐이었다. 나머지는 부동산업자를 위한 재단, 그의 딸 이방카가 공부했던 미국 발레 학교, 아들 에릭이 공부한 사립학교 등 트럼프 가족 혹은 사업이 관련된 곳으로 흘러갔다. 트럼프 재단의 단일지출 건 중 가장 큰 액수는 ‘트럼프 플라자 호텔’ 창문 밖의 분수를 개조하는 데 사용한 약 26만 달러였다.

‘어프렌티스’에서도 재단이나 방송국 돈으로 생색

“내가 1만 달러를 줄게. 됐나?” 도널드 트럼프를 전국적인 스타로 만드는데 기여한 <엔비씨(NBC)> 방송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어프렌티스(견습생)’에서 트럼프가 곧잘 했던 말이다. 경선에서 탈락한 참가자에게 상금 대신 개인 기부를 약속하는 것이다. 어떤 회에는 1만 달러짜리 기부 약속을 여섯 번이나 했다. 그는 더없이 유능하고 너그러운 사업가로 그려졌다.

▲ NBC에서 방송된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는 트럼프를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 zerohedge

WP의 검증결과 이 돈은 트럼프의 것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방송에서 늘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라고 떠벌였지만 실제로 돈을 낸 것은 트럼프 재단이나 NBC 방송이었다.

‘남의 돈을 내 돈처럼 쓰는’ 트럼프의 행태는 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트럼프는 자선행사에서 화가가 즉석에서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와 유명 스포츠 스타의 친필 사인이 적힌 풋볼 헬멧 등을 재단 돈으로 샀다. 이 물품들을 트럼프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면, ‘사적유용(self-dealing)’에 해당한다고 WP는 지적했다. 사적유용은 비영리재단 대표가 재단 돈을 자신이나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는 걸 말한다.

트럼프는 사적유용을 자주 저질렀다. 2007년부터 트럼프가 소유한 호화리조트 ‘마라라고 클럽’은 팜비치 시에 12만 달러의 세금이 밀려 있었다. 시와 클럽은 10만 달러를 참전 용사들에게 기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 합의금을 트럼프 재단이 냈다. 트럼프 재단은 2013년 플로리다 법무장관 파멜라 본다이의 선거운동그룹에 2만 5천 달러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본다이는 트럼프가 설립한 ‘트럼프 대학’의 사기 혐의에 대한 조사를 고민 중이었는데, 해당 기부 이후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뻔뻔한 경우는 처음 본다”

WP의 보도 이후, 트럼프는 사적유용에 대한 대가로 국세청에 2천 5백 달러를 벌금으로 내야 했다. 또 트럼프 재단은 뉴욕 법무장관으로부터 자선모금 금지 통보를 받았다. 워싱턴의 베나블 로펌 소속 제프리 테넌바움 변호사는 “나는 1년에 700개 비영리재단을 변호하지만, 이렇게 뻔뻔한 경우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옥스퍼드 대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 truth)’을 꼽았다. 탈진실의 대표 용례는 ‘탈진실 정치’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 트럼프는 이 용례에 큰 몫을 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기자들을 ‘가짜 언론(fake news media)’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반면 <브레이트바트>, <내셔널 인콰이어러> 등 자기 말을 받아 적는 극우 매체들은 최측근에 배치하고 떠받든다. 퓰리처상 위원회가 트럼프를 저격한 WP에게 올해 국내보도 상을 안긴 것은 ‘탈진실 정치’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을 격려하는 의미로 읽힌다.

▲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제호 밑에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는 죽는다(Democracy Dies in Darkness)’는 모토가 눈에 띈다. ⓒ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WP의 트럼프 검증보도는 188개 자선단체를 일일이 접촉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 나왔다고 한다. 트럼프 재단이 기부했었거나, 트럼프가 자선 행사에 갔거나, 공개적으로 트럼프에게 상을 준 적이 있는 단체들이었다. 취재는 쉽지 않았다. “우리는 이걸 사적인 영역으로 두고 싶다.” 구체적인 기부내역을 묻는 말에 트럼프 대변인 측은 입을 닫아버렸다. 트럼프의 기부 목록을 잔뜩 홍보해 놓고는, 기부를 입증하는 근거는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이메일로 70여 개 질문을 보냈지만 트럼프 대선 캠프는 답장도 하지 않았고, 현장에서 질문을 던지면 트럼프는 욕을 퍼부었다. 그런 와중에도 WP는 기사를 완성해 보도했다. ‘위선자’ 트럼프의 당선을 막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트럼프 재단이 더 이상 모금 행사를 열 수는 없도록 만들었다.   
 
지난 2월 WP는 제호 아래 새 모토(표어)를 달았다.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는 죽는다(Democracy Dies in Darkness)." 트럼트 시대를 맞이한 언론의 각오라고 볼 수 있다.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는 WP를 인수한 2013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 모토를 거론하면서 “WP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라는 취지로 말한 일이 있다. 거짓을 밝혀내는 언론의 역할이 어둠 속 빛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은 미국만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매해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고 실험적인 보도를 한 기자들에게 주어지는 퓰리처상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인들의 주목 대상이다. 공공서비스, 탐사보도, 지역보도 등 14개 부문에서 선정되는 수상작은 내용과 형식 등 여러 면에서 저널리즘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비뉴스>는 역대 퓰리처상 수상작 중 우리나라 독자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가질 만한 보도를 골라 격주로 소개한다. (편집자)

편집 : 조은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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