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장시간 노동자 ②

서울시에서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운영하는 심야버스, 일명 ‘올빼미버스’는 오늘도 만원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 사이를 달리며 피곤에 지친 이들을 실어 나른다. 야근이나 회식을 마친 직장인, 야간 업무를 시작하는 직장인과 장사꾼,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 올빼미 버스를 이용한다.

서울역환승센터와 숭례문 오거리를 지나는 올빼미 버스들은 새벽 3시가 넘는 시간까지 만석이었다. 피곤에 지쳐 입을 굳게 다문 승객들에게 기자는 ‘야근’과 ‘저녁 없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다 가족 먹여 살리려고 하는 거야.”

중년의 한 남자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말에서 부정적 뉘앙스를 발견했는지, 장시간 노동에 스민 ‘가장의 노고와 가족애’를 강조했다. 다른 승객들도 “야근이나 회식은 어쩔 수 없다”, “남들도 다 하는 것”이란 말로 체념하거나 합리화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한 노동’으로 인해 가정에서 이들의 자리는 점차 희미해져 간다.

▲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운영하는 심야버스는 오늘도 피곤에 지친 이들을 실어 나른다. ©flickr

일상이 된 야근, ‘아빠’와 ‘남편’ 자리는 없어

새벽 1시, 섬유업계 종사자 송모(29)씨가 을지로 롯데백화점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심야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주5일 근무 중 이틀은 야근하는데, 밤 9시쯤 끝난다. 이날은 회식까지 있어 버스가 다 끊긴 새벽에야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을지로입구 정류장에는 택시도 한 대 서지 않아 그는 30분 넘게 정류장에서 발이 묶였다. 심야버스의 배차 간격은 약 40~50분이다. 늦어지는 귀가 시간이 걱정되는 건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아내 때문이다.

“늦게 들어가면 아내가 화내요. 아내랑 안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송씨는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신혼부부다. 맞벌이 부부라 평일에 아내와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시간은 10분 정도에 불과하다. 아내는 먼저 퇴근해 송씨를 기다린다. 송씨는 야근이나 회식으로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내와 말다툼을 한다. 부부싸움의 패턴은 비슷하다. “집에 아예 오지 말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송씨는 “회식이나 야근은 이해해줘야 한다”고 항변한다. 송씨는 회식을 직장생활의 연장선으로 인정하지 않는 아내에게 못내 섭섭하다.

“남자랑 여자랑 생각이 달라요. 최소한 일에 있어서는 이해받고 싶어요. 그런데 여자들은 일을 할 때 회식도 필수라고 여기지 않아요.”

송씨는 한국에 온 지 7년째인 중국 교포이기도 하다. 그에게 한국은 “너무 바쁜 나라”다. 한국에 온 뒤 일에 치이다 보니 새로운 친구나 이웃을 사귈 겨를은 없었다. 직장 동료와도 마음속 얘기는 터놓지는 못했다. 요즘은 휴일이면 한국에 온 동창들을 만나곤 하지만,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송씨는 장시간 노동과 바쁜 삶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한국은 40년 만에 빠르게 발달한 나라죠. 그래서 앞으로도 사람들은 계속 힘들 거에요. 어쩔 수 없어요. 작고, 가진 게 없는 나라지만 그렇게 (노동집약적으로) 발전한 거니까요.”

송씨는 도리어 너무 바쁘게 사는 사람들을 취재한다는 기자에게 반문했다.

“그런데 그게 정상 아닙니까?”

▲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서울 강남 업무지구. ©flickr

새벽 2시가 다 되어 종로2가역 정류장에 멈춰선 N62번 버스에 심리상담업체에서 일하는 심모(37)씨가 올라탔다. 원래 업무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지만, 분기별 보고를 마무리 짓느라 새벽녘에야 집에 가는 길이다. 업무량이 많아 한 달에 절반 정도는 야근한다. 결혼 5년차,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집에서 기다리지만, 심씨가 평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1~2시간 남짓. 주말이 돼야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놀거나 집안일을 도울 수 있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아이들과 10분을 함께 하더라도 잘 놀아줘야 하는데, 피곤하니까 그게 잘 안 되죠.”

심씨는 야근이 없어진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육아 분담”을 꼽는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어린 두 아이의 육아를 전담하느라 고생하는 게 안타깝기 때문이다. 심씨는 자신의 여가 시간을 가지는 건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그는 야근이 잦아지면서 취미로 하던 운동도 그만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있던 친구들과의 만남도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그 탓에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풀어낼 분출구가 없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못 풀고 있어요. 친구들과 수다 떨고, 무언가를 털어놓고, 공감하는 시간이 없어졌죠. 혼자라도 뭔가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되니까 좀 쌓여 있는 상황인 거 같아요.”

밤 12시 10분경, 을지로입구 정류장에서 만난 최모(46)씨도 야근이 없어진다면 하고 싶은 일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꼽았다. 은행에서 일하는 최씨는 업무량이 많은 탓에 주5일 근무 중 3~4일은 야근을 한다. 일찍 끝나면 밤 11시, 늦으면 밤 12시가 넘는다. 이런 탓에 최씨는 평일이면 집에서 존재감이 없다. 집에 도착하면 일을 먼저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내와 10살짜리 아들은 먼저 잠들어 있다. 아침 8시에 다시 출근하려면 평일에는 가족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다. 아이들도 평일에는 최씨를 찾지 않는다.

마음 나눌 친구나 이웃이 없다

밤 12시 30분 을지로입구역에서는 영업직으로 일하는 김모(31)씨가 신림역으로 가는 N15번 버스에 올랐다. 아침 7시 출근해서 일찍 끝나면 저녁 8시, 늦으면 밤 12시를 넘긴다. 일을 시작한 지는 1년이 채 안 됐다. 일이 바쁠 때가 많아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은 자연스레 줄었다.

“몸이 지쳐있으니 쉬는 날에도 친구 만날 힘이 없어요. 밤늦게 일이 끝날 땐 택시도 많이 타서 돈도 많이 나가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친구들과 카톡이나 전화로 연락은 하지만, 힘든 얘기는 쉽게 꺼내지 못한다고 한다. 친구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 얘기보다는 쓸데없는 얘기를 많이 해요. 각자 힘들게 일하는 거 아는데 안부 통화하면서까지 부담 주긴 싫거든요. 힘드냐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도 감정노동이잖아요.”

여가를 즐기는 시간도 줄었다. 취업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곤 했지만, 일을 시작하면서 책 한 권을 완독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주말에는 주로 잠을 자고, 게임을 하거나 TV를 본다. 극장을 찾은 지도 오래됐다. 영화는 한 달에 한두 편 인터넷으로 내려받아 본다. 지역사회와 관련된 일이나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진 건 당연한 결과다.

“예전에는 뉴스보고 같이 열 받아하거나 공감했는데, 일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다 보니 관심을 끊게 돼요. 내 일도 벅차고, 내 감정을 추스르기도 힘든데 뉴스 보면서 남의 일에까지 감정노동할 힘이 없어요. 예전에는 누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면 후원금이라도 보내려고 했을 텐데, 요즘은 그냥 ‘그렇구나’하며 넘기죠.”

기자가 평일에 야근을 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묻자 김씨는 결국 ‘해야 할 일’을 골랐다.

“물론 친구들 만나서 웃고 떠들고 싶죠. 그런데 친구를 만나고 취미 생활을 하는 건 주말에 하고, 평일엔 자기개발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죠. 서른 넘어서 공부하기 당연히 싫지만, 더 똑똑한 사람들한테 밀리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직장에서 잘려도 어떤 자격증이 있어야 먹고 사니까요.”

"예능 <아빠 어디가>의 성공은 아빠가 소외된 현실에서 비롯"

최근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5년 기준 2,113시간으로,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인 1,770시간보다 연간 343시간, 주당 평균 6.6시간을 더 일한다. 노동시간이 가장 적은 독일(1,371시간)보다는 연간 742시간, 주당 평균 14.3시간 더 일한다. OECD ‘2016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 2015)’에 따르면 주당 평균 근무시간이 50시간 이상인 노동자 비율도 23.1%로 OECD 평균 13%를 훌쩍 뛰어넘었다.

야근과 연장 근무가 일상화된 ‘장시간 노동 체제’ 속에 많은 직장인이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OECD ‘2015 삶의 질(How’s life? 2015)’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48분으로, OECD 평균인 151분보다 훨씬 짧았다. 특히 아빠와 교감하는 시간은 하루 6분밖에 되지 않아 OECD 평균(47분)과 큰 차이를 보였다. OECD의 ‘2016 더 나은 삶 지수’도 비슷한 결과를 보인다. 11개 세부항목 중 ‘일과 삶의 균형’ 항목에서 우리나라는 38개국 중 36위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예능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의 성공은 가정에서 아빠가 소외된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빠들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당연한 건데, 한국에서는 워낙 특이한 일이라 <아빠 어디가>가 국민적 볼거리가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상품 소비에 의존하게 되는 가족 관계도 우려했다.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평소 아이들과 교감하지 못한 부모들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단위 시간당 만족도가 높은 상품 집약적 여가 활동을 선택하고, 늘어난 소비 항목은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에 속박시킨다”고 말했다.

가족 밖의 다양한 관계를 추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김영선 연구위원은 “장시간 노동으로 심신이 지친 노동자들이 친구나 이웃, 지역사회와 교감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지역공동체가 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웃을 만나고, 지역사회를 관찰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련의 노력이 ‘성가신 일’, ‘피곤한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노동자의 적극적인 요구가 문제 푸는 열쇠

심야버스에서 만난 직장인들은 야근과 회식을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며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 가족 먹여 살리려고 하는 거야”라며 장시간 노동을 합리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처럼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노동자들의 소극적인 자세가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한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는 <자본주의와 노사관계>라는 책에서 노동자들의 소극적 자세가 “장시간 노동 체제에서 생존하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한 결과”라고 분석하면서도 “노동자 역시 장시간 노동 체제를 유지, 확대,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배규식 연구위원도 “노동자들의 적극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지 않으면 정부와 기업도 나서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하면서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줄이면 임금이 부분적으로 줄 수 있다는 게 부담스러워 하는데, 임금이 감소하는 정도는 노사 합의를 통해 조율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2004년 법정 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면서 단계적으로 주5일제 근무가 도입됐으나 법 적용이 느슨하거나 예외 규정이 많기 때문이다. 주당 12시간의 연장근무 외에 16시간의 휴일근무를 허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26개 근로시간특례업종과 5인 미만의 사업장에는 근로시간을 규제하지 않는다. 연장근무 시간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 사업장도 많다. 배 연구위원은 “정부가 더 과감하게 장기간 노동을 규제하고 엄격하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임금 노동자, 임금 인상과 노동 단축 함께 논의해야

저임금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장시간 노동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용노동부의 ‘2015년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6월을 기준으로 중위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는 저임금근로자의 비중은 23.5%에 이른다. 또한,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전체 임금노동자 중 월급이 200만원 미만인 노동자는 45.2%, 100만원 미만인 노동자는 11.4%였다.

저임금 노동자의 장시간 문제는 임금인상 논의와 함께 진행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이혜은 노동시간센터소장 겸 가톨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장시간 노동 문제를 해결하려면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2014년 발간한 <한국 노동시간 미스매치의 규모와 특징: 비자발적 장시간 노동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도 “저임금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 중요한 과제는 ‘임금이 보전되거나 임금감소가 최소화’되는 노동시간 단축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임금이 높은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면서 임금을 줄이는 것과 반대되는 접근이다.


단비뉴스팀은 (사)다른백년과 함께 ‘사랑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6편에 걸쳐 우리 주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장시간 노동자, 청년 실업자, 경쟁에 시달리는 직장인, 노인, 청소년들이 그들이다.

노인은 말동무를 찾아 매일같이 탑골공원에 간다. 취업 못한 청년은 안전한 직장을 가질 때까지 스스로 고립된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은 연인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사치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기사는 총 7부로 1부(프롤로그)를 제외한 각 부는 사람책과 기획기사로 구성된다. [사람책]에선 한 사람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전한다면 [기획기사]는 현실을 진단하고 원인과 대안을 보여준다.

당신은 사랑하고 계십니까. (편집자) 

이 기사는 (사)다른백년(http://thetomorrow.kr)에도 실립니다. 

편집 : 박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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