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이주헌 미술평론가
주제 ② 위작 이야기

천경자 작가의 <미인도>는 정말 위조 작품일까? 위작 감정을 의뢰받은 프랑스 리니오드 테크놀로지 전문팀은 <미인도>가 진짜일 확률은 0.0001%에 불과하다고 감정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결과 위조 작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강의중인 이주헌 미술평론가. © 고륜형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에서 “진작이라면 판단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검찰이 <미인도> 감정을 맡긴 전문가들 다수가 <미인도>는 위조 작품이 아니고 진작이라고 서명했다. 기술이나 안목 감정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위작’도 일종의 ‘합의’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서양의 작품들을 위조해 판매한다.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위조 작품들은 그 작가도 네오나르도 다빈치부터 앤디 워홀까지 고금을 망라한다. 위작이 거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현대에, 위작은 더 이상 부도덕한 사기가 아니라 수요가 있는, 시장 가치가 있는 작품인 셈이다.

위작의 초기 형태는 베껴 그리기

서양 중세에는 방작, 즉 베껴 그리면서 그림 연습을 하는 전통이 있어 위작이 흔했다. 종종 무명 화가들은 의도적으로 대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린 그림을 진작이라고 속여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이것이 ‘위작’의 초기 형태다. 심지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미켈란젤로도 젊은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위작을 만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작품들이 더 비싸게 팔렸다. 무명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만든 작품을 더 비싸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잠자는 큐피드>라는 고대 작품을 위작으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한 추기경에게 비싼 값을 받고 팔았다.

▲ 두 병사가 괴링의 컬렉션에서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을 들고 서 있다. © 이주헌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을 곁에 두고 관찰하던 추기경이 고대 작품이라 하기에는 이상한 부분을 몇 군데 발견했다. 깨끗이 씻어보니 돌이 쪼개진 형태가 고대 것이 아니었다. 추기경이 화를 내면서 화상이었던 발다사레에게 돌을 넘겼다. 화상이 미켈란젤로를 찾아가 가짜를 나한테 보내서 손해를 봤다고 따지니까, 미켈란젤로는 사과하며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화상이 돈은 안 받겠다며 조각상 부숴버리겠다고 했다. 다행히 파괴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미켈란젤로가 유명해지면서 오히려 비싼 값에 팔렸다. 나중에는 영국까지 팔려가 17세기에 파이톤 궁전에서 보관했다. 그런데 대화재가 나서 미술품들이 망실됐다. 그때 미켈란젤로의 잠자는 큐피트도 같이 파괴되었다. 이주헌 평론가의 언급이 흥미롭다. “(어차피) 파괴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죠.”

<미인도가>가 만약 위작이라는 판결이 나면 그 작품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평론가는 그럼에도 “파기하면 안 된다”며 “오히려 보존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세기의 스캔들로 보석이 된 위작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연합군이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의 컬렉션에서 네덜란드의 국보급 그림 한 점을 찾아냈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걸작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이었다. 네덜란드의 국보를 나치 쪽에 팔아넘긴 사람은 나치 부역자가 될 터였다.

▲ 사법당국의 감독 아래 베르메르의 위작을 제작해 보이는 판 메이헤른. © 이주헌

조사 결과, 당국은 ‘판 메이헤른’을 최초의 판매자로 지목했다. 재판이 열렸다. 중형 위기에 처한 판 메이헤른은 그림을 자신이 그렸다고 실토한다. 그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리 없는 당국은 진작이 틀림없다고 했다. 베르메르의 솜씨가 분명히 드러나고 재료상태나 캔버스 상태가 17세기라는 것이다. 판 메이헤른은 보이만스 판 보닌헨 미술관에 있는 그림도 자신이 그렸다며,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진위 여부를 알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전문가들이 두 그림을 비교해보니 흡사했다. 메이헤른은 ‘내가 즉석에서 이 작품을 하나 그려 보이겠다’고 제안한다. 전문가들이 판단해볼 수 있도록 직접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판사가 입회인을 하나 붙였다. 감시 아래 메이헤른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메이헤른이 완성한 그림은 물감 성분도 17세기의 것이었고 그림 스타일도 같았다. 전문가들이 이 과정을 보면서 경악했다고 한다. 보이메스 판 보닌헨 미술관에 있는 작품도 메이헤른의 것이라고 전문가와 재판관은 결론지었다. 메이헤른은 재판정에서 부역 혐의로 중범죄를 받는 대신 1년형으로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다.

현재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은 보이만스 판 보닌헨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세기적 스캔들을 일으킨 작품이기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14점만 위조했겠느냐? 수백 점을 위조했다”

볼프강 벨트라키(1952년~)는 2011년 5백억 원 상당의 작품을 위조한 죄로 6년형을 받았다. 미술작품 위조범치고는 중형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도 벨트라키는 당당했다. “내가 14점만 위조했겠느냐? 수백여 점을 위조했다. 남의 작품을 위조하는 건 매우 쉽다.” 그의 뻔뻔함을 용인할 수 있는 건 ‘위작도 위작 나름대로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가 위작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라고 이주헌 평론가는 주장했다.

벨트라키는 14살 때 처음으로 피카소 그림을 위조했다. 사람들이 그의 위작을 호평하자, 그는 위조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마약에 취해 살았다. 돈이 부족해지자, 본격적으로 위작 제작에 몰두한다. 위작을 그릴 때도 나름대로 철학이 있었다. ‘그림만 잘 그려선 안 된다. 출처도 확실하게, 교묘하게 위조해야 한다.’

벨트라키는 미술 컬렉션을 만들고 ‘크놉스’, ‘예거스’라 이름 붙인다. 오토슐테-켈링하우스와 동업하고, 켈링하우스의 아내와 조부모가 대단한 컬렉터였다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켈링하우스의 아내를 할머니로 분장시켜 수많은 그림이 있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벨트라키는 이 사진이 1920년대에 찍은 사진이라며, 이 사진 속 그림은 모두 1920년대에 그려졌다고 사람들을 속인다. 이주헌 평론가는 “그의 위작이 예술적으로 너무 뛰어났기에, 사람들은 그의 출처를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 벨트라키의 <숲>. 이주헌 평론가는 “그의 위작이 예술적으로 너무 뛰어났기에, 사람들은 그의 출처를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 Flickr

벨트라키의 위작이 진작보다 더 뛰어났던 사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벨트라키가 그린 초현실주의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 작품의 위작에 20세기 최고의 미술사학자 베르너 슈피스까지 속아 넘어갔다. 벨트라키는 에른스트 위작을 팔기 위해 슈피스에게 감정을 요청한다. 슈피스는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 관장을 역임하고, 에른스트 전작도록까지 만든 인물이다. 자신이 만든 전작도록에 벨트라키의 위작이 없었지만, 슈피스가 보기에 작품이 너무 뛰어났고, 진작 같았기에 그는 진품임을 보증했다. 최고의 에른스트 전문가까지 속여버린 셈이다. 슈피스의 보증을 받은 벨트라키의 에른스트 위작은 2006년 한 컬렉터에게 7백만 달러에 팔린다.

벨트라키는 세계 주류 미술관에 자기 그림이 가장 많이 전시된 화가로 남게 됐다고 이주헌 미술 평론가는 전한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로잔의 에리미타주 하우스 등에 작품이 걸렸고, 소더비, 크리스티 등 세계 최고 경매회사들을 통해 작품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벨트라키는 복역 후, 엄청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다. 너무 뛰어난 위조 작가다 보니 매스컴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벨트라키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2014년 독일 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고,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발간된다. 근대 화가의 작품에 자기 이름으로 사인을 하고, 그림 한 점당 수천만 달러를 받고 판다. 일 년에 수십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이 평론가는 “위작도 진작 못지않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무시하고서 미술사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위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합법적인 위작은 대가의 혼을 반영한다”

존 마이어트(1945년~) 역시 위작으로 예술적 권위를 인정받은 작가 중 하나다. 그가 위작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본의는 아니었다고 한다. 존 마이어트는 원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가정불화로 부인과 이혼하게 되는데, 자식 양육권을 자신이 가져 외벌이로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돈이 궁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돈을 벌 궁리는 하던 끝에, 그는 합법적인 ‘위조작’을 만들 생각을 한다. 위작을 위작이라고 알리면서 팔기로 한 것이다. 교사로서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잡지에 광고를 내고 모방작을 만들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다 그를 ‘진짜 위작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한 인물을 만난다.

▲ 존 마이어트는 감옥에 다녀온 뒤 뛰어난 위작 작가로 인기를 얻으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 Flickr

마이어트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주의 깊게 보던 ‘존 드류’는 마이어트의 위작을 ‘크리스트’ 경매에 진작으로 속여 판다. 크리스트 경매장 감정사도 뛰어난 마이어트의 위작에 속아 넘어간다. 이 사실을 안 마이어트가 드류에게 항의하자, 드류는 역으로 달콤한 유혹을 한다. 마이어트의 위작을 진작으로 팔아넘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이어트는 드류와 공범이 되기로 한다. 샤갈, 뒤뷔페 등 2백여 점을 위조한다.

마이어트와 드류의 밀월관계는 1995년 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고 끝난다. 마이어트는 4개월 복역 후, 뛰어난 위작 작가로 인기를 얻으며 작품 한 점당 수천만 원을 받는 화가가 된다. 워낙 언변이 좋아 TV쇼에도 자주 출연한다. 유명한 그림을 베껴 당대의 스타들 얼굴을 그려 넣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기를 끄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롤링 스톤즈의 기타리스트 론 우드를 초대해서 그의 초상을 유명작품에 그려 넣고, 가수 마일린 클라스를 모델로 세워놓고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에 얼굴을 옮겨서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마이어트는 자신의 합법적인 위작이 대가의 혼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복사본이나 모작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배우가 캐릭터에 젖어 드는 것처럼 그들의 기법을 사용하고 그들의 세계관 너머로부터 영감을 찾습니다. 그럴 때만 나는 합법적인 위작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위작 '해바라기‘

이주헌 평론가는 가장 비싸게 거래된 위작으로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꼽았다. 그의 후기 작품 중 역작으로 꼽히는 <해바라기>의 위작은 일본의 야스다화재보험에 4천만 달러에 팔렸다. 집에 걸어놓고 싶게끔 하는 그림으로 예쁘다는 인상을 준다. 위작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과거에 있다.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위작을 다량 거래한 한 화상에 이르기 때문이다.

▲ 3400년 전에 만들어진 <네페르티티 흉상>은 눈에 박힌 보석과 돌이 잘린 방향으로 위작 의혹을 받고 있다. © Flickr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페르티티 흉상>도 위작 의혹을 받고 있다. 3,4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이 흉상이 위작 의혹을 받는 이유는 흉상의 ‘눈’에 있다. 원래 이집트 사람들은 흉상을 만들 때 ‘눈’을 중요시한다. 눈이 한 사람의 모든 영혼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흉상에 눈이 없다는 것은 이집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네페르티티 흉상>에는 한쪽 눈이 없다. 위작으로 의심받는 이유는 또 있다. 흉상의 절단 방향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흉상을 만들 때 돌을 수평으로 자른다. 하지만 이 흉상의 돌은 수직으로 잘려 있다.

흉상의 위작이 만들어진 배경은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강력한 것은 1912년에 한 위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1912년에 만들어져 미술관에 기증된 이 작품은 고대 이집트관에 이집트 보석을 전시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아름다운 보석을 걸친 이 흉상을 보고 프러시아의 왕자가 반했다고 한다. 프러시아 왕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박물관장은 1912년에 만든 이 작품을 보석이 만들어진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속였다. 이렇게 1912년작 <네페르티티 흉상>은 3,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됐다. 하지만 흉상에 입힌 도료는 방사선 측정 결과 3,400여 년 전 것이 맞아 위작이냐, 진품이냐는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유럽의 워크숍 전통과 진작 판정의 애로

서양에서 위작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미술품 제작 과정에 있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미술품을 제작할 때 조수를 많이 사용했다. 길드를 이뤄 미술품을 제작하던 서양 작가들은 도제와 조수를 거쳐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장인이 되려면 조수는 필수 코스였다. 인기가 많은 작가일수록 조수를 많이 뒀는데, 이때 위작도 많이 발생했다.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 천재성이 중요시 되자 이런 현상은 많이 사라졌는데, 20세기 들어 앤디 워홀 등 팝아트들이 부상하면서 길드 체제가 부활했다.

▲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렘브란트와 조수의 작품이 뒤바뀌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Flickr

감옥에 가야 하는 위조 작가의 역설

렘브란트의 경우 조수의 작품과 진위 여부가 뒤바뀐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1997년까지 조수 마우리츠하이스의 작품이 진품으로 여겨졌다. 1998년에야 렘브란트 자신이 그린 초상화가 진품으로 인정됐는데, 1651년경에 그린 렘브란트의 <사울과 다비드> 역시 제자의 그림과 진위 여부가 뒤바뀌어 2015년에야 진품을 찾게 됐다. 조수를 많이 둔 렘브란트가 겪는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루벤스 역시 자신은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조수들이 그린 1671년 작 <솔로몬의 심판>도 위작으로 판명 났다. 길드 체제에서 위작은 흔한 일이었다.

물론 위작을 만들고도 기소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바로 ‘기증’이다. 박물관에 기증하면 대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위작으로 판명 나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위조작가는 위작임이 판명 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서 위조작가들은 일부러 작품에 ‘폭탄’을 설치한다. 스스로 터지는 폭탄인데, 티타늄 화이트가 대표적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작품에 설치된 티타늄 화이트가 터지면서 사람들은 그 작품이 위작임을 알게 된다. 폭탄이 터지고 난 뒤 감옥에 들어가면 위조작가는 돈과 명성을 얻는다. 위조작가의 역설이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감옥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심리는 개인의 ‘소심한 복수’라고 볼 수 있다. 심리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재능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위작을 만들면서 명화의 오류 가능성을 찾아내는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도 부자를 골탕 먹이는 ‘로빈후드 범죄’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행위는 더욱 대담해진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이창곤 심보선 홍세화 고찬수 이주헌 윤성호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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