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직장인 ②

‘취업 경쟁’만큼 치열한 ‘승진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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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뒤에 붙는 ‘总(zǒng)’은 ‘总裁(zǒngcái)’, ‘总经理(zǒngjīnglǐ)’의 줄임말이죠. 사장님, 대표님이란 뜻인데, 임원급 외에도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사람이라면 예우 차원에서 붙입니다.”

지난 18일 아침 7시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어학원. 이른 시간에도 비즈니스 중국어반에는 열댓명의 직장인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중견 무역회사에 다니는 임모(31)씨도 2015년 입사 직후부터 2년째 중국어학원을 다니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 유창하고 무역영어 1급과 국제무역사 자격증을 땄지만, 중국 시장이 커지면서 중국어 공부는 필수가 됐다. 임씨는 “요즘 직장생활에서 제2~3외국어는 기본”이라 말했다.

▲ 직장인들이 어학 공부 등에 매달리며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 SBS뉴스 화면 갈무리

“퇴근은 별 의미가 없어요.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거죠. 밤이나 주말에도 바이어들이 오면 접대하고, 상담하고, 계약을 따야 해요. 계약하는 회사 이미지와 상품을 미리 파악하고, 경제신문을 챙겨 보면 퇴근 후에도 정신없어요.”

임씨의 일과는 저녁 7시 퇴근 이후에도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주말도 없이 일에 매진하지만, 지난 승급심사 때는 다른 동기보다 계약 성과가 약간 부족해 승진에 실패했다. 회사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임씨는 자는 시간을 더 줄이고, 주말 어학반도 추가로 등록했다. 임씨는 “취직하기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다”면서 “친구들 본 지도 오래됐고, 입사 초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엄두도 나지 않는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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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금금’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게 IT업계에서 나온 말이에요. 야근은 밥 먹듯 하고 아예 회사에서 3~4일간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하기도 합니다.”

그래픽디자이너 2년 차 지모(31)씨는 아침 8시에 출근해 지하철 막차 시간인 밤12시쯤 하루 일과를 마친다. 그때까지도 일이 끝나지 않아 아예 회사에 남아 일을 하는 날도 많다. 그러나 지난달 승진 명단에는 그녀의 이름이 없었다.

“성과가 나쁘진 않았어요. 승급심사 한 달 전쯤 상사가 결혼을 언제 할 건지 묻길래 ‘좋은 남자 생기면 한다’고 답한 게 마음에 걸리죠.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으니 아무래도 남자 동료들보다 승진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지씨는 “한동안 결혼은 포기한다는 마음으로 경력을 쌓아가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밤낮없이 일했지만 포괄임금제로 한 달 나오는 추가 수당은 20만 원 가량에 불과해 결혼자금도 모으지 못했다. 더 높은 연봉을 받고 결혼‧노후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지씨는 앞으로 성과 경쟁의 전쟁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계획이다.

▲ 늦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종로 업무지구. © flickr

더 좋은 일자리, 높은 보수를 위한 직장인들의 승진‧이직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달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94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직장인들은 핵심인재로 인정받기 위해 ‘성과달성에 집중(56.9%, 복수응답)’, ‘직무 관련 교육 이수(27.1%)’, ‘어학 등 성적, 자격증 취득(23.7%)’, ‘구체적인 경력설계(22.9%)’, ‘선배들 조언 듣기(21.2%)’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69.8%는 ‘노력한 만큼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답해 치열한 노력에 비해 승진 등의 결실을 내기는 한층 더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이직을 통해 직급과 보수를 높이려는 직장인들도 늘고 있다. 작년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1,333명에게 승진에 관해 설문 조사한 결과, ‘직급을 높이기 위해 가장 유력한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9.7%가 승진(40.3%) 대신 이직을 택했다. 잡코리아가 올해 직장인 7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3.3%는 ‘올해 이직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 내 경쟁이 치열해지고, 승진 가능성도 낮아지면서 이직 준비에도 매달리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기댈 곳 없고 외로운 직장 생활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39)씨는 직장동료에게 “아내가 아프다”는 얘기를 꺼냈다가 한 달 뒤 승급 심사에서 떨어졌다. 아내 병간호 때문에 회사 생활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란 소문이 회사에 퍼진 탓이다. 김씨는 “직장 동료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순간 경쟁자가 되기 때문에 동료끼리 믿고 의지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치열한 성과 경쟁의 결과는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직장 내 대인관계로 귀결된다. 많은 직장인들은 직장 내에서 ‘외로운 섬’이 돼 각자도생하기 바쁘다. 지난해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78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5명 중 4명은 ‘회사 안에는 기댈 데 없고 외롭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직장 상사(29%)와 원만하지 않은 직장 내 인간관계(20%)가 가장 많이 지목됐고, 과도한 업무량(19%)이 뒤를 이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직장 내 대인관계를 성과의 한 단면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직장 내 성과주의 문화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중앙대 이병훈 교수(사회학)는 “직장 내 경쟁적인 조직 관리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직장인들이 여러 스트레스를 호소한다”며 “성과를 내기 위해 직장에 얽매일수록 직장 문화는 메마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직장 내 경쟁적인 조직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었다. © MBC뉴스 화면 갈무리

‘상사 눈칫밥’은 곧 승진 경쟁력

“진짜 일 잘하는 사람은 승승장구하겠죠.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해요. 대부분은 인맥 없으면 아웃입니다.”

영업직에 종사하는 이모(32)씨는 작년 이른 나이에도 과장으로 승진한 비결에 대해 "‘능력’과 ‘인맥관리’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잘 잡는 데 달렸다”고 말했다. 이씨는 26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작은 광고회사에 자리 잡고 기업으로부터 광고 따내는 일을 맡고 있다. 취업을 위한 경쟁도 치열했지만, 취업하고 보니 회사 안에서 인정받기 위한 경쟁은 더욱 심했다. 승급 심사에서 계속 밀린 상사는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도 퇴사 압박을 받았다. 이씨가 택한 건 ‘튼튼한 라인’을 잡는 것이었다. 상사의 취향에 맞는 점심 메뉴와 커피를 고심했고, 특히 동문인 선배와 학교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졌다. 그는 “대한민국에 일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며 “실력만으로 올라가려 하면 한계가 있고, 처세술에 능한 사람일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단절’ 대신 ‘눈칫밥’을 대책으로 찾는 이들도 있다. 속마음을 터놓는 진정한 관계를 만드는 대신 적극적으로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의 이익에 추구하는 것이다. 관계는 곧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곤 한다. 지난 2월 잡코리아와 아르바이트포털 알바몬의 공동 설문 조사에서 직장인‧아르바이트생 등 노동자의 83.5%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소통능력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답한 데서도 드러난다.

지난 2월 인크루트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에서 가장 중시하는 인간관계를 묻는 질문에 ‘직장상사(43%)’가 압도적으로 높은 응답률을 보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많은 직장인들은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그 반응에 따라 심리적 압박 정도도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로 해석했다.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회사에서 과도한 업무를 요구받는 게 문제라고 인식하더라도 사내 문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하다”면서 “아예 적극적으로 충성심과 애사심을 보이면서 만족을 찾고 성공하려는 노동자들의 뒤틀린 욕망 구조가 더해져 성과주의 문화가 공고해진다”고 설명했다.

치열한 성과 경쟁의 열외자, ‘직장맘’

식료품업체 2년차인 나모(29)씨는 최근 인사부장에게 “아기 낳은 후에는 마음을 내려놔라”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씨는 직장을 잡으면서 곧바로 결혼을 했고 최근 아이를 임신했다. 올해 12월 분만 예정이라 11월부터 출산휴가 겸 육아휴직을 신청할 계획이다. 회사는 1년 3개월 간 나씨의 업무를 대체할 인력으로 계약직이 아닌 같은 업종 경력이 있는 정규직을 뽑았다. 나씨는 “임신한 뒤에도 야근에 빠진 적 없고, 조금이라도 더 성과를 내기 위해 맡고 있던 프로젝트를 공들여 준비했지만 임신한 것만으로 이미 낙오자가 돼 있었다”고 털어놨다.

여직원, 특히 아이가 있는 ‘직장맘’들은 치열한 직장 내 성과 경쟁에 뛰어들어도 인정받기 더욱 어렵다. 작년 세계경제포럼(WEF)이 공개한 '경제적 성격차 좁히기:양성평등 태스크포스에서 배우기'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한국 여성이 얻는 경제적 참여와 기회 정도는 남성의 56% 수준에 불과했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의 55%, 노동소득은 56% 정도였다. 또 잡코리아가 지난달 직장인 2,201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조사에서도 여성 응답자의 56.2%가 “성별에 따른 편견을 겪었다”고 한 반면 남성은 6.1%만이 이같이 답했다.

▲ 직장 내 치열한 성과 경쟁에서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다. © SBS뉴스 화면 갈무리

이에 대해 김영선 연구위원은 “출산과 육아처럼 개인적인 부분까지도 회사의 프로세스에 맞춰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노동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관철되지 못한 반면 자본의 힘은 전횡적으로 휘둘러지는 상태에서 제도와 캠페인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일침했다.

한편, 성과를 중시하는 직장 문화는 자녀 양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책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저자이기도 한 아동가족상담센터 이보연 소장은 “부모들이 직장 경험을 통해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믿게 돼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결과, 즉 시험점수나 상장 등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배우는 과정인 아이들에게는 결과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배우고, 실패하더라도 도전하고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고 강조했다.


단비뉴스팀은 (사)다른백년과 함께 ‘사랑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6편에 걸쳐 우리 주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장시간 노동자, 청년 실업자, 경쟁에 시달리는 직장인, 노인, 청소년들이 그들이다.

노인은 말동무를 찾아 매일같이 탑골공원에 간다. 취업 못한 청년은 안전한 직장을 가질 때까지 스스로 고립된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은 연인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사치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기사는 총 7부로 1부(프롤로그)를 제외한 각 부는 사람책과 기획기사로 구성된다. [사람책]에선 한 사람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전한다면 [기획기사]는 현실을 진단하고 원인과 대안을 보여준다.

당신은 사랑하고 계십니까. (편집자) 

이 기사는 (사)다른백년(http://thetomorrow.kr)에도 실립니다. 

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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