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② 로마 제과점 피스트리움
[문화일보 공동연재]

풍속문화사의 첫발을 폼페이의 선거 벽보로 뗐으니 폼페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유물 하나 더 살펴본다. 폼페이의 정치 1번지, 아본단자 길에서 선거 벽보를 봤다면 로마 시대 신비의식(神秘儀式)을 간직한 비의 장원(秘儀 莊園·Mystery Villa)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폼페이보다 북쪽에 있는 도시 에르콜라노로 가는 길목. ‘에르콜라노 문’으로 불리는 성문에 이르기 전 폐허 집터 사이로 낯선 유물과 만난다. 마당에 세워진 몇 개의 돌 유물. 장구처럼 생겼는데, 무엇일까?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비롯해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주변은 비교적 건조하고, 겨울에도 따뜻해 벼 대신 밀이 어울렸다. 1만여 년 전 이곳에서 밀과 보리농사가 시작된 이유다. 인도 북동부와 미얀마에서 시작된 벼는 비가 많이 오는 동아시아에 제격이다. 쌀은 낟알로 밥을 지어 먹지만, 밀은 가루로 빻아서 빵을 만든다. ‘빵’은 포르투갈어다. 1543년 태풍으로 표류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전했고, 덴푸라(포르투갈어 Tempora)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용어다.

▲ 폼페이의 제과점 피스트리움에서 사용한 화덕과 방아(사진 왼쪽). 아래 원추형 돌이 숫방아, 장구처럼 생긴 웃돌이 암방아다. ⓒ 김문환

BC 26세기 고대 이집트 파라오 쿠푸의 딸 네페르티아베트 공주의 무덤 프레스코에 등장하는 빵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지중해 주변 서양인의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빵을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BC 6세기 초 솔론의 개혁 시기까지만 해도 그리스에서 빵은 일종의 특식이었다. 이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그리스인의 아침 식사가 된다. 로마인들은 주식이던 빵을 집에서 방아 찧어 만들어 먹었을까? 아니면 요즘처럼 제과점에서 구운 빵을 사 먹었을까? 바로 이 장구처럼 생긴 돌 유물이 답을 들려준다.

▲ 프랑스 생제르맹앙레 박물관의 모자이크. 피스트리움 화덕에서 빵을 굽고 있는 모습이다. ⓒ 김문환

피스트리움, 방앗간과 빵집을 합친 로마의 제과점

현장에서 보는 돌 유물은 두 종류다. 먼저 원추형 돌은 숫방아다. 두 번째는 여기에 속이 빈 장구 형태의 암방아를 덮어씌운 거다. 암방아와 숫방아 사이로 밀을 넣고, 암방아를 돌리면 밀이 두 방아 사이에서 으깨지며 밀가루로 곱게 갈린다. 우리네 맷돌은 위아래로 돌을 놓고 손잡이로 돌렸다. 집마다 놓고 썼던 맷돌과 달리 폼페이의 이 방아는 한 장소에 여러 개다. 개인 집은 아니라는 얘기다. 밀 방앗간이다. 그럼 이 큰 돌방아를 누가 돌릴까?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무겁다. 당나귀. 로마의 방앗간에서는 암수로 이뤄진 여러 개의 방아가 있고, 이를 당나귀들이 종일 돌렸다. 사람은 옆에서 밀을 넣고, 가루를 빼내는 역할을 맡았다. 당나귀가 방아를 돌리는 장면을 보려면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또 다른 나라, 바티칸 시티로 가야 한다. 바티칸 교황청 박물관의 로마 시대 조각에 열심히 방아 돌리는 당나귀의 고달픈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 로마 바티칸 박물관의 조각.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나귀가 방아 돌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 김문환

로마의 방앗간은 밀가루만 빻았는가? 폼페이 유적으로 다시 발길을 돌려 보자. 방아 옆으로 붉은색 벽돌 구조물이 보인다. 아래는 불을 때는 아궁이, 반원형의 윗부분은 밀가루 반죽을 넣어 굽는 선반, 그러니까 화덕이다. 이 붉은 구조물이 화덕이고 여기서 빵을 구웠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로마인들은 후대의 호기심 많은 한국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여러 종류의 유물을 남겨 놓았다. 이번에는 조각이 아닌 모자이크를 보자. 장소를 프랑스로 옮긴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교외선 전철을 타고 서쪽으로 가면 아담한 전원도시 생제르맹앙레에 닿는다. 전철역 앞의 고풍스러운 건물 박물관에 3세기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주옥같은 농촌 풍속 모자이크가 기다린다. 화덕에 기다란 장대를 부지런히 넣었다 빼며 빵을 굽고 있는 인부의 모습이 살아 움직인다. 이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의 화덕 피자집에서 익히 보는 모습이다. 폼페이 근처 대도시 나폴리의 뒷골목으로 가면 역시 이런 풍경으로 지금도 부지런히 피자를 구워 판다.

로마시대 방앗간과 빵집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이런 제과점을 피스트리움(Pistrium)이라고 불렀다. 밀가루 반죽을 의미하는 ‘Pist(Pasta)’에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 ‘-um’의 합성어다. 로마 시민들은 집이 아닌 전문 제과점 피스트리움에서 만든 빵을 먹었다. 폼페이에는 이곳 말고도 세 군데 더 피스트리움이 남아 있다. 4세기 말 로마 제국의 최대 도시 로마에는 무려 274개의 피스트리움에서 나귀가 방아를 돌렸고, 제빵사가 화덕에서 빵을 구워댔다. 요즘 한국 도심지에 많은 체인 제과점과 비슷하다. 피스트리움에서 나귀가 고역(苦役)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395년 이후다. 수력을 활용한 물레방아를 발명한 덕분이다.

▲ 런던 대영 박물관이 소장한 프레스코. 폼페이에서 출토된 로마 시대 빵을 그렸다. ⓒ 김문환

밀과 빵을 배급했던 로마 제국  

로마인들은 이렇게 만든 빵을 돈 주고 사 먹었을까? 로마 시대에도 정치인들이 제일 관심 가져야 할 대목은 민생이었다. 국민이 먹을거리 걱정 안 하고 편안히 일상을 영위하는 삶은 동서고금 정치의 요체다. 5·9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공약도 마찬가지다. 고대 신석기 농사 문명이 싹튼 이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치자(治者)들은 치수(治水) 즉, 홍수나 가뭄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는 관개(灌漑)농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기하학이나 수학도 여기서 발달했다. 중국 고대 하나라 우임금은 아버지가 실패한 치수 문제를 13년 만에 해결하고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지 않았는가. 치수의 목표는 풍년 농사요, 이를 기반으로 저잣거리 필부(匹夫)도 먹을 것을 입에 문 채 배와 땅을 두드리며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네. 샘을 파서 물 마시고, 농사지어 내 먹는데, 왕이 무슨 소용이요’라는 고복격양(鼓腹擊壤)가를 부를 수 있었다.

BC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함무라비 왕은 농민에게 황소를 압류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BC 6세기 참주정(僭主政)을 수립한 아테네의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농민들이 밀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제도를 갖춰 인기를 얻었다. 공화정 초기 나라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던 로마는 BC 241년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밀의 곡창 시칠리아 섬을 인수하면서 밀을 빈민들에게 무상 배급했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부부를 물리치고 이집트를 속주로 삼은 뒤에는 상황이 더 좋아진다. 비옥한 나일강 곡창의 밀을 수탈한 제국 황제들은 아예 빵을 만들어 빈민들에게 나눠줬다. 민중에게 배급한 빵은 공화정을 빼앗긴 채 황제의 독재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소요를 막아줄 유력한 장치였다.

제주도 현무암 덩어리처럼 생긴 로마 시대 빵  

태평성대의 요건, 로마의 빵은 어떻게 생겼을까? BC 753년부터 476년까지 무려 1200여 년 지중해 일대를 호령한 로마인들이 먹던 빵은 식빵처럼 생겼을까, 아니면 바게트처럼 생겼을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이 유물을 보자.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 덩어리 같다. 가만히 보면 부풀어 오른 사이사이로 줄이 나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무늬다. 지금도 제과점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빵이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진흙더미에 묻힌 에르콜라노에서 출토돼, 현재 폼페이 팔레스트라에 전시 중인 탄화(炭化) 빵. 시커멓게 타버린 빵 말고 좀 더 먹음직스러운 빵은 없을까? 천연색 프레스코 그림을 통해 궁금증을 풀어 보자. 로마인들은 실내 장식할 때 벽을 프레스코 그림으로 꾸몄다. 침실이나 거실은 정원 분위기를 내고, 식당은 음식 재료나 완성된 음식을 그려 넣었다. 화산재로 고스란히 덮인 폼페이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벽면의 프레스코 역시 그대로 남았다. 그 벽에 그려졌던 빵 그림이 2013년 런던 대영박물관 폼페이 특별 전시회 때 내걸렸다.

옥타비아누스가 장수를 위해 하루 한 조각씩 먹던 빵 

당시 소개된 로마의 빵 그림으로 시선을 옮긴다. 무화과 과일이 2개 걸려 있고, 그 아래 노란 빵이 먹음직스럽다. 효모균을 잘 썼나. 적당히 부풀어 올라 입맛을 당기게 하는 빵을 보면 군침이 절로 돈다. 요즘 동네 제과점에서 보는 빵과, 크기와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둘레는 흰색이고 노릇노릇 구워진 빵은 가운데로 갈수록 짙은 갈색을 띤다. 7개의 줄이 있으니 7조각을 내 먹을 수 있는 셈이다. 폼페이에서 출토된 이 프레스코 속 빵의 생김새를 에르콜라노에서 발굴된 숯덩이 빵과 비교해 보자. 그대로 겹쳐진다. 로마인들의 주식 빵과 식습관의 풍습을 가감 없이 전해주는 유물이다. 로마에 독재정을 추구했던 카이사르에 이어 로마를 황제정으로 바꾼 옥타비아누스(BC 63년~AD 14년)는 말년에 식사 한 끼로 이런 빵 한 조각만 먹고 버텼다고 한다. 다이어트라기보다 위장병 탓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식(小食) 덕분인지 당시로는 장수인 78세까지 살았다.


문화일보에 3주 단위로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는 '동서문명사'와 'TV저널리즘'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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