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원반 던지는 남자'와 '걸어가는 사람', 네 개의 단상 ②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술문명이 발달한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종종 부딪히는 근원적 질문이다. <단비뉴스>의 PD들이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과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인간’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각기 다른 PD들의 재기 발랄한 글을 4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 미론 <원반 던지는 사람>(왼),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오). ⓒ flickr

① 우리는 살아있다 (이연주 PD)
② 왕년이란 향수 (안윤석 PD)
③ 못난이의 아름다움 (박경난 PD)
④ 걷지만 멈춰있고 (고하늘 PD)

 

▲ 안윤석 PD

아들은 소똥 냄새가 싫다고 했다. 시골로 내려온 첫날 밤, 마당에 주저앉아 "우리 집 가자!"며 생떼를 부린 아들은 스무 살 되던 해 멀리 떠나버렸다. 그런 그놈이 돌아온단다. 이 아비를 보려고 말이다. 당장 시장에 갈 채비를 한다. 주름진 손으로 방바닥을 딛고 몸을 일으켜 본다. 손을 내딛자니 어깨가 뻐근했고 일어나려 하니 무릎이 시렸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쓴웃음이 나왔다. 늙음이 다가오지 못하게 젊음이란 원반을 훨씬 더 멀리 던졌어야 했나 보다.

한땐 참 멀리도 던졌다. 허리와 온몸을 이용해 원반을 던지는 그 찰나의 순간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과 아름다움, 관중들은 그런 내 모습에 환호했다. 머리숱도 지금과는 달랐다. 풍성했고 단정했다. 근육은 또 어떤가. 사내인 내가 봐도 역동감이 넘쳤다. 그러니 인기는 당연했다. 부는 덤이었다. 그 시절 공원에 가면 원반을 던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인기 종목인 원반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오로지 내 덕택이다. 원반이란 종목은 내가 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이란 원반에 자부심까지 실려 무거워서일까. 종이컵에 반쯤 남은 믹스 커피가 더 빨리 식어버리는 것처럼 중년 나이를 먹은 내 인생의 원반은 생각보다 훨씬 가파르게 떨어졌다. 부와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올림픽에선 원반던지기 종목을 폐지해버렸다. 원반의 인기도 잠시뿐이었다. 이제 원반을 배우려는 사람도, 던지려고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기구한 인생이다. 그렇게 내 원반은 처참히 땅에 떨어졌다. 시골로 내려온 건 그때였다.

이제 내 손엔 "나이 듦"이란 원반만이 들어있다. 마음 같아선 있는 힘껏 날려버리고 싶다. 하지만 혼자 들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벅차다. 손목엔 힘이 들어가지 않은지 오래고, 허리를 돌리면 척추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머리카락도 셀 수 있을 만큼 벗겨졌다. 자랑처럼 생각했던 두툼한 근육마저도 다 빠져버렸다. 앙상하고 큰 두 발만이 남았을 뿐이다.

찬란했던 그 시절을 지난 지 오래다. 인기, 돈, 외모 등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몇 년 만에 아들놈이 와서다. 원반처럼 이들이 떠나버렸기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내 왕년 시절 이야기를 오늘 아들에게 들려줄 생각이다. 아버지가 이런 향수를 안고 살았다고 나름대로는 괜찮은 인생 아니었냐고 말이다. 몸은 쇠진했어도 그때의 추억이 있기에, 그 추억을 말할 수 있기에 기쁘다. 항상 나만의 영웅담을 자랑처럼 속으로만 되풀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들과 함께다. 아들과 함께라면 추억의 원반에 '나이 듦'까지 같이 얹어 날려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 나이가 들면서 쌓여가는 건 과거에 대한 아름다운 '향수'일지도 모른다. ⓒ Flickr

좀 있으면 아들이 온다. 오랜만에 만나 부끄러우니 연습 좀 해야겠다. "아들아~ 아버지가 왕년에 말이지..."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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