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심보선 시인
주제 ② 예술과 테크놀로지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우면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과제로 받았죠. 저는 30줄 정도로 짰어요. 옆에 있는 친구는 10줄인 거예요. 왜 다른지 봤더니 전 불필요한 명령어를 너무 많이 넣었어요. 가다가 빙빙 돌았던 거죠, 비효율적으로. 그래서 그 친구는 의사가 됐고, 저는 시인이 됐어요. 하하.”

A에서 B지점으로 갈 때, 컴퓨터는 가장 빠른 길을 찾는다. 컴퓨터는 불필요한 사고를 하지 않는다. 반면 예술에는 불필요해 보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예술과 테크놀로지 혹은, 인간과 컴퓨터의 차이는 뭘까?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암묵적인 지식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기사란 뭐예요?”
“잘 모르겠는데요.”(학생)
“기사 쓰기와 시 쓰기는 비슷한가 보네요. 좋은 시가 뭔지 저도 아직 몰라요.”

시인의 겸손일까, 강조어법일까? 좋은 시를 쓰는 건 어렵지만 어쨌든 예술의 목표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강의나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도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특히 시 쓰기가 그렇다. 몰라도 쓴다. 좋은 시가 나올 가능성을 믿고 그냥 쓴다. 쓰는 과정 속에 있는 학습(learning by doing)이다.

▲ 심보선 시인이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 황두현

“지네가 길을 가는데 개미가 물어봐요. 그 많은 다리를 가지고 그렇게 유연하게 움직이느냐고. 그러자 지네는 갑자기 뒤뚱뒤뚱 제대로 못 걸었어요. 왜냐면 생각을 시작했거든요. 사실은 알고 있는데 생각하는 순간 작동이 멈추는 ‘암묵적인 지식’이에요.”

학습은 ‘암묵적 지식’이 있기에 가능하다. 바이올린 장인 스트라디바리는 제자들에게 바이올린 만드는 법을 완전히 전수하지 못했다. 제자들이 물어봐도 자기도 말로는 못하겠다고 했다. 스트라디바리가 죽은 뒤 공방에서는 장인이 만들었던 품질의 바이올린이 더 이상 생산되지 못한다. ‘암묵적 지식’은 명료화하고 체계화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는 지식이다.

‘모른다’에서 시작되는 시 쓰기의 역설

“시인이 시를 모두 다 알고 쓸까요? 알아야 쓸 수 있을까요? 알면 얼마나 알아야 하나요? 시를 쓸 때마다 시창작 교과서를 옆에 두고 써야 하나요? 그렇게 쓸 때 좋은 시가 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모르고 쓰는 것. 몰라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행위. 그것이 ‘시’가 아닐까 생각해요.”

알고 있지만 표현을 못하는 것. 진짜 모르는 것. 모르는 뭔가가 있고 알면 안 되는 것. 내가 100% 장악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공백(blank)이다. 시 쓰는 법을 ‘알고 있다’고 하면 좋은 시는 나오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모른다’라는 대답 속에 좋은 시를 쓸 가능성이 있다. 시는 공백에서 나온다.

이유 없는 ‘그냥’은 없다

시인은 이어 인공지능 얘기를 꺼냈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짠 프로그램에 따라 명령을 수행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머신러닝, 딥러닝 같은 기술이 나오면서 인공지능은 스스로 학습한다고 하지만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 알고리즘의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알고리즘은 논리적 절차에 따라 주어진 문제에 해법을 반드시 내놓는다.

"컴퓨터가 NO라고 하는 경우 봤어요?"

심 시인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컴퓨터는 입력된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에러나 고장이 났거나, 아예 정의가 없을 때, 또는 연산에 조건이 입력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말이다. 심 시인은 "엄마가 아들보고 사과 사오라고 했는데 사과가 뭔지 모를 때, 갑자기 비가 오거나 지진이 났을 때 사과는 못 사오는 것“이라는 비유를 들기도 했다.

"사람은요? 사람은 그냥 NO라고 해요. 그런데 진짜 '그냥'이 있을까요?"

‘그냥’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다. 하지만 심 시인은 아무 의미 없는 ‘그냥’은 없다고 단언했다. 내키지 않아서, 피곤해서, 바빠서 등의 이유로 약속을 거절할 때도 '그냥' 싫다고 한다. ‘그냥’에는 어떤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 심보선 시인이 시와 인공지능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황두현

'하지 않는 걸 선호합니다'

그런데 문학에서는 진짜 '그냥'이 있다고 심 시인은 말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하먼 멜빌이 쓴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바틀비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그냥 거부한다. 바틀비에게는 선호(preference)가 없다. 사람들은 효용에 따라 선호를 결정하지만, 바틀비는 아예 하지 않는 걸 선호한다. 상사가 심부름을 시키면 “심부름하지 않는 걸 선호합니다"라고 하고, 복사해달라고 하면 “복사하지 않는 걸 선호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효용에 따라 선호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NO(하지 않음)를 선호한다.

일반적인 사회였다면 기계가 NO를 하면 고장을 의심하는 것처럼, 바틀비도 고장난 사람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은 상황이 다르다. 한 변호사는 그를 친절하게 대한다. 그런 존재도 중요하지만, 그를 사회가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바틀비의 마지막을 보고 외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이상해 보이는 바틀비도 인간이다.

인공지능이 'NO'하는 이유

심 시인은 인공지능과 바틀비를 비교했다. 컴퓨터의 공백(blank)에 해당되는 은닉층이 바틀비에도 있다. 다만 바틀비에게는 정의된 효용도 없어서 선택과 결정하는 과정도 없다고 한다. 이런 인간을 인공지능이 구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첨단 기술이 불러올 미래를 기대하면서도, 정작 인간 위에 기계가 자리 할까 봐 두려워한다. 심 시인은 ‘합리적인 인공지능’을 이유로 들었다. 영화 아이로봇,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로봇들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NO를 외친다. 인간이 추구하는 고도의 합리성을 갖춘 인공지능. 예술도 알고리즘을 통해 최적의 결과를 낼 수 있을까?

‘바틀비적’ 인공지능이 가능할까

“이 그림에 참이나 거짓을 부여할 수 있나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을 보여주며 심보선 시인이 던진 질문이다. 평범한 파이프 그림 밑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인 ‘참 거짓’ 판단으로는 이 그림을 설명할 수 없다. ‘파이프 그림’이 참이면 ‘파이프가 아니다’는 문구와 모순되며, ‘파이프가 아니다’가 참이면 ‘파이프 그림’이 파이프가 아닌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심 시인은 이 패러독스가 이 그림을 예술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서로 상충하는 동시에 공존하는 모순적 상태가 있어야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다.

▲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 Flickr

모든 예술은 도구와 결합돼 이뤄진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컴퓨터와 펜이 필요하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와 펜으로 글 쓰는 느낌이 다르듯, 인공지능이 개입된 예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참 거짓이 모순된 예술과 참 거짓만 구분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심 시인은 효과적인 알고리즘과 성능 좋은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해서 새로운 예술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바틀비적’ 인공지능이 필요하지 않을까 제언한다. 바틀비처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야 비로소 새로운 예술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알고리즘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동일한 과업을 수행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지만 예술의 알고리즘은 보편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프로그램과 같다고 말합니다. 한 작품의 알고리즘을 다른 작품에서 반복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 예술 작품에는 오롯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알고리즘만 존재합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이창곤 심보선 홍세화 고찬수 이주헌 윤성호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곽호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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