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무역기획] ① 한국의 공정무역 2.0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탁자에 앉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만든 커피를 마시거나 중국 사람들이 재배한 차를 마시거나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재배한 코코아를 마신다. 우리는 일터로 나가기 전에 벌써 세계의 절반이 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흑인운동 지도자이자 목사인 마틴 루터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unior)의 말이다.

전 세계는 이미 유기적인 공동체다. 우리의 삶은 무역상품으로 채워진다. OECD 국가 중 무역의존도가 상위권인 우리는 더욱 그렇다. 평화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세계적인 록 그룹 U2 리더 보노는 쇼핑은 정치라는 말을 남겼다. 돈을 내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표를 행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제대로 된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은 매일 불공정한 투표를 하는 것과 같다. ‘공정무역’은 왜곡된 자본주의 논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무시할 수 없는 대안이다.

세계화가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승자독식 원리에 따르면서 환경오염, 유전자 조작(GMO) 등 식품 안전, 빈부격차, 기아 등의 문제가 도를 더해간다. 지난해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겪으며 윤리적 소비행동에 대한 경각심이 급속히 높아지는 추세다. 단순히 가격이나 품질만을 고려한 선택이 아니라 환경, 건강, 인권 등의 윤리적 측면을 고려하는 책임 소비의 중요성이 커진다. 공정한 생산·공급 구조를 만들고,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공정무역’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시장도 공정할 수 있을까?

“지구 위에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절대 빈곤자가 12억 명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남반구에 있는 저개발국가 농민들이에요. 1년에 4개월은 먹을 게 없어요. 농민들이 생산하는데 왜 굶는지 의아하죠? 굶을 수밖에 없는 구조와 시스템이 있는 겁니다. 일례로 커피 생산 농민이 3천 500만 명입니다. 커피 매출은 연간 7천 500조 정도이고요. 그렇다면 커피 농민에게는 몇 %가 돌아갈까요? 불과 3%에 그칩니다. 절반 이상이 커피 5대 메이저 기업의 수익이에요. 생산자에게 가격을 제대로 주면, 대부분의 빈곤이 해소돼요. 지금 지구촌 자본주의는 남반구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갖고 북반구의 기업이 부가가치를 올려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는 구조지요.”

▲ 지난 2월 24일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서울혁신파크에서 이강백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상임이사가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박희영

이강백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상임이사의 말이다. 그는 공정무역이 빈곤의 완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공정무역을 통해 착취구조 속에서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생산자를 위한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기존 무역관행 때문에 경제적으로 소외당하는 생산자의 삶을 다시 시장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시민사회가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시장거래 방식에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다.

“우리는 매일 커피, 설탕, 초콜릿 등을 먹잖아요. 이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내 삶과 밀접한 생활의 문제이니까요. 생산에서 소비로 이어지는 과정은 점점 나빠지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어요. 농업은 점점 더 강력한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꽃도 마찬가지예요. 미국과 유럽의 화훼자본이 아프리카에 백만 평의 땅을 사서 장미와 백합을 키워요. 한 평에 20원 주고 삽니다. 화훼산업은 물 산업이에요. 아프리카 대륙 밑에는 거대한 지하수가 흐르죠. 관을 박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씁니다. 근처 농토에는 물이 나오지 않죠. 그렇게 생산된 장미와 백합이 한국에 와서 사랑의 선물이 돼요. 애초에 땅을 20원에 판매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땅문서가 없어요. 땅은 개인이 소유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화훼산업에 팔린 그 백만 평이 소유권 없는 빈 땅인 건 아니에요. 그곳에서 오래 산 사람이 있는데, 부패한 정부가 돈을 받고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공정무역운동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운동

세계 무역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매일 전 세계의 생산자가 재배하고 가공한 재화와 서비스를 편리하게 누린다. 하지만, 무역시스템은 공평하지 않다. 기업은 이익을 원하고, 소비자는 값싼 제품을 찾는다. 그 결과 생산자는 들인 노력에 비해 매우 적은 정당하지 못한 대가를 받는다. 한국공정무연단체협의회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약 20%가 하루 1달러 미만, 세계 노동자의 40%가 넘는 사람이 하루 2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간다.

공정무역은 불공정무역에 착취당해온 생산자와 노동자인 농민에게 ‘공정한 가격’을 지급하고 그들이 자립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운동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열린 제1차 공정무역 정책토론회에서 윤종오 의원(무소속)은 공정무역이 한국과 상관없는 제 3세계 문제가 아님을 지적하며 ‘노동권’ 중시와도 맥이 닿는다고 역설해 호응을 얻었다. 상품 가격표에 드러나지 않는 노동 가치를 인정하자는 취지다.

“2013년 4월 방글라데시에서 의류노동자들이 밀집한 한 건물이 붕괴돼 3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습니다. 이곳에서 일한 노동자가 최저임금으로 받은 돈은 월 4만 원에 불과했고, 무너진 건물의 노동 환경은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우리가 즐겨 입는 유명 브랜드 SPA 옷을 만드는 곳입니다. 우리는 불공정하게 착취해서 만든 제품을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 지난해 12월 27일 열린 제1차 공정무역 정책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윤종오 의원. ⓒ 서혜미

일반적으로 소비자가격 결정 과정에는 제품원가뿐 아니라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소비자가 느끼는 주관적 가치가 개입된다. 이에 비해 공정무역은 사회적으로도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건전한지를 포함한다.

세계화 시대 승자독식 구조에 대항하는 공정무역마을운동

공정무역은 1950년대 후반 서구 국제구호단체와 종교단체의 제 3세계 빈민에 대한 원조활동을 배경으로 닻을 올렸다. 1970년대 이후 대안적 사회운동의 하나로 전 유럽으로 확산했다. 1990년대는 세계공정무역연합(WFTO), 유럽공정무역연합(EFTA), 유럽세계상점네트워크(NEWS), 국제공정무역인증기구(FLO) 등 초국적 공정무역 조직이 결실을 보았다. 공정무역기업 및 공정무역조직의 전문화도 동시에 이뤄졌다. 지난 2009년 WFTO와 FI(구 FLO)가 발표한 공정무역 핵심원칙은 5가지다. ▲취약한 생산자를 위한 시장 접근성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무역관계 ▲생산자조직의 역량구축 및 강화 ▲소비자 인식 증진과 옹호 ▲사회적 계약(Social contract)으로서 공정무역 등이다.

▲ 지난해 12월 27일 열린 제1차 공정무역 정책토론회를 주최한 의원들과 사회와 발제를 맡은 참가자들. (왼쪽부터) 김선화 쿠피협동조합 연구원, 허남혁 지역재단 먹거리정책·교육센터 센터장, 송경용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이사장, 윤종오 의원, 우원식 의원. ⓒ 서혜미

최근에는 공정무역마을운동도 주목받는다. 공정무역은 개인이 제품을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형성했다면, 공정무역마을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지방정부와 공정무역단체, 학교, 지역상점, 비영리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공정무역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 소비를 확산하는 운동이다. 영국 랭커셔주 가스탕(Garstang)이 첫 도시다. 김선화 쿠피 협동조합 연구원은 “2003년 당시 리빙스턴 영국 런던시장이 런던을 공정무역도시로 선언하며 32개 자치구가 5개 핵심목표를 달성하도록 만들겠다고 했다”며 “실제로 자치구 중 3분의 2가 공정무역도시가 됐다”고 들려준다.

영국 런던 공정무역마을은 벨기에, 이탈리아까지 퍼져 2012년 이후 국제공정무역마을운영위원회까지 생겼다. 김선화 연구원은 “유럽뿐 아니라 브라질, 코스타리카, 일본 등도 합류해 29개국에서 1,855개의 공정무역마을이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윤리적 소비를 촉진하는 방법은 개인뿐 아니라 공정무역마을 형성과 같이 집단 차원에서 이뤄질 때 더욱 효과가 크다.

벨기에 브뤼헤는 2008년 공정무역마을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학교, 급식사업장, 상점, 기업, 지역사회 조직과 공정무역을 지지하는 일반시민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시청과 의회는 이런 사업을 조율하고 지원한다. 허남혁 지역재단 먹거리정책·교육센터 센터장은 “시의회는 공정무역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사무실에서 공정무역 홍차와 커피를 제공하기로 했다”며 “브뤼헤 시에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학교 24곳을 포함해 50군데 이상 있다”고 소개한다. 허 센터장은 “전국 캠페인(‘Week of the Fair Trade’)과 같은 다양한 대중 행사를 통해 공정무역에 관심을 집중시킨다”고 덧붙인다.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역할 덕분에 공정무역 제품의 수요와 공급이 늘어난 사례다.

▲ 서울시는 지난 2013년 1월 시청 지하 시민청에 ‘공정무역가게 지구마을’을 열었다. 지구마을은 서울시청 직원과 시민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으로 자리 잡으며 공정무역 홍보관 역할을 하고 있다. ⓒ 윤연정
▲ 한 시민이 '공정무역가게 지구마을'에서 판매하는 공정무역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 윤연정

당면과제 1 - 공정무역시장 규모화

한국에서 공정무역은 2003년 아름다운가게에서 출범시켰다. 이후 일부 사회경제단체와 생활협동조합, 개인사업자들이 공정무역 상품 수입 판매에 나섰다. 아름다운커피, 두레생협, 에이피넷(APNet), 아이쿱생협,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어스맨 등 국내 14개 공정무역단체가 지난 2012년 설립된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들은 총 33개 국가와 15개 공정무역 품목을 거래 중이다. 13년간 꾸준히 성장해 오던 우리 공정무역이 안정화 단계를 맞아 직면한 과제는 무엇일까?

▲ 2004년~2015년 한국 공정무역 총 매출 추이 ⓒ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이강백 한국공정무역단체협의회 상임이사는 “시장에 영향을 주고 사회에 의미 있는 공정무역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커져야 한다”고 ‘규모화’를 꼽는다. 김선화 연구원은 “국내에는 2기 공정무역마을위원회가 구성돼야 하는 상황이고, 공정무역마을로 인정받기 위해서 정부나 지자체, 다양한 시민단체와 공정무역단체가 참여해 연대 기반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렇게 해야 공정무역이 주류화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참여주체의 확산을 통한 ‘규모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는 외국 사례에서도 입증된다. 1990년대 이후 유럽 공정무역조직의 전문화와 거대화는 독자적인 인증체계를 만드는 작업과 함께 기존 식품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강백 상임이사는 “영국 공정무역기업인 카페 다이렉트가 영국 커피 시장 점유율 6위를 기록 중”이라며 “유럽공정무역단체의 지속적인 요구로 다국적 커피음료 회사 아인 스타벅스가 2010년 유럽 내 전 지점에서 공정무역인증 커피 원두를 사용하기로 했다”는 사례를 들려준다.

공정무역 발전을 위해 분야별 대표선수 육성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상임이사는 “영국에서 커피는 카페다이렉트(Cafe Direct), 수공예는 트레이드크래프트(Traid Craft), 초콜릿은 디바인(Divine Chocolate), 공정무역 원재료를 조달하는 단체는 트윈트레이딩(Twin Trading), 공정무역 캠페인은 영국공정무역재단 등이 각각의 역할을 분담해 상호투자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각 단체가 자회사를 만들어 커피, 초콜릿, 설탕 등 비슷한 품목을 모두 다뤄 내부경쟁을 벌인다. 조직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은 물론 규모화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당면과제 2 - 공정무역 지원 확대

"공정무역은 굉장히 힘든 사업이에요. 생산자가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더 주고 사와야 하거든요. 커피가 1달러로 폭락을 한다고 해도, 공정가격으로 정한 4~5달러를 주라거나 공동체에 10~15%로 줘라, 선급금으로 줘라 등의 규정이 있습니다. 관행 무역에서는 배가 떠 있을 때 돈을 줘요. 공정무역은 꽃이 필 때 60%를 선급금으로 줍니다. 저개발국일수록 은행이자만 20%거든요. 사채는 얼마나 되겠어요. 농민들이 당장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 5월에 수확할 것을 담보로 1월에 돈을 빌려요. 당장 배가 고프니 헐값에 파는 겁니다.“

공정무역은 일반무역보다 4배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 생산자의 빈곤 개선과 자립을 위해서 생긴 무역이기 때문이다. 이강백 상임이사는 “자금의 무리한 압박이 오기 때문에 프랑스는 정부가 100억을 공정무역 선급금으로 지원한다”며 “공정무역 단체가 성장해 자본도 쌓이고 막대한 무역자금을 감내할 정도가 되면 정부 지원 없이도 운영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캐나다 퀘벡 주에는 사회적 경제를 부흥시킨 사회투자신탁기금 ‘샹티에’가 있습니다. 정부가 5천만 달러, 조직이 2천만 달러를 내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에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합니다. ‘샹티에’ 기금은 참고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이라고도 해요. 퀘벡은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GDP의 8%가량을 창출하고 있어요.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회투자기금을 조성하겠다며 500억 원을 넣었지만, 법적인 문제 해결이 안 돼서 필요한 사람이 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공정무역이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회적경제기본법안’ 등의 기반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 제1차 공정무역 정책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서혜미

공정무역은 흔히 ‘착한 소비’에 기대 제 3세계의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자며 품질이 낮은 제품까지 선의에 호소해서 판매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상임이사는 “공정무역은 자선이 아닌 ‘사업’”이라고 강조하며 “제품의 질과 가격으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지 못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동안 재벌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왔다면, 사회적 경제는 사람과 공공의 이익을 중심에 둔다. 그 속에서 오히려 재화와 가치 창출은 물론 고용증대의 길이 열린다.

“일부에서는 왜 공정무역 같은 사회적 경제에 돈을 내주느냐고 하는데요.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부실기업인 대우조선에 몇조를 넣었어요. 무슨 결과가 있었죠? 만약 사회적 경제에 1조만이라도 주면 고용 효과와 매출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겁니다.” (계속)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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