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태극기

▲ 박진홍 기자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는 어딘가 어색하다. 태극은 소용돌이치고, 건곤감리 위치도 다르다. 잘못 그린 게 아니다. 이 문양은 1897년 대한제국이 썼던 공식 국기다. 독립협회와 광무제(고종)는 한반도를 향한 열강의 야욕 한복판에서 우뚝 선 문에 태극기를 아로새겼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거부하고 홀로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태극기는 이때부터 자발적 저항과 독립의 상징이었다. 3‧1운동 때는 경성 사람들이 태극기를 그리기 위해 독립문 앞에 모여들었고, 이렇게 퍼져 나간 태극기는 해방의 순간에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등장했지만 의미는 모두 같았다.

독립문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시청 서울광장에 등장한 태극기는 더 어색하다. 자발성이 없다. 대다수 집회 참가자들은 “종북 세력이 대통령 탄핵으로 나라를 망치려 한다”는 소리에 무조건반사로 태극기를 들었다. 반공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한 지도자들이 태극기에 덧씌운 애국 강요의 효과는 이렇게 지독하다. 통치세력은 시민들이 ‘빨갱이’에 맞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태극기 앞에서 다짐시켰다. 이 세뇌를 착실하게 따라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는 반공을 위한 자유와 애국 그 자체다.

▲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 Flickr

강요의 태극기는 위험하다. 맹목적인 애국 강요는 국가와 국가 원수에 대한 합리적 비판과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다. 삐뚤어진 애국심은 인류 보편의 가치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해롭다. 독일인들이 “강대한 적이 우리를 위협한다, 애국심으로 뭉쳐 이겨내자”는 말을 그대로 수용하고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흔든 결과 전 세계 무고한 이들이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6‧25 전쟁 중 일어난 거창, 보도연맹 학살 역시 애국의 베일을 쓰고 민간인을 죽인 범죄행위였다. 장막이 얼마나 탄탄했던지 이들 사건의 진상은 애국의 힘에 가려져 수십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애국자들은 항상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을 떠벌리지만 조국을 위해 죽이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정문일침(頂門一鍼)에 고개를 끄덕인다.

애국하는 것과 애국을 내세우는 것은 전혀 다르다. 3월 1일과 8월 15일에 흔들었던 태극기에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과 옳음을 되찾았다는 환희가 짙게 뱄다. 애국심 표현의 기저에 정의로움이 묻어났다. 반공 태극기와 시청 광장 태극기에는 정의가 빠졌다. 치부를 숨긴 채 우리 편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천 쪼가리들만 흩날릴 뿐이다. 위장 애국심에 태극기가 악용될 때, 폐해는 항상 죄 없는 사람들 몫이다. 무너진 정의를 외면하고,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만을 내세워 세뇌당한 시민들로 가리려는 시청 광장의 일부 정치인들은 그래서 ‘애국팔이’다. 국정 농단 사태로 드러난 적폐뿐 아니라, 영혼 없이 타의에 의해 흔들리는 태극기 물결 역시 이제는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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