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제시어] ‘몸’
[수상작]
장원: 박지원 (서강대 재학생)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우수: 고하늘 (저널리즘스쿨 입학예정자) 국정농단의 진정한 ‘몸통’
     박진영 (저널리즘스쿨 1학년) 공기 맑은 곳에 사는 서러움
       임형준 (저널리즘스쿨 입학예정자)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것

입상작 발표가 많이 늦었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응모작이 적어 저널리즘스쿨 재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느라 더 늦어졌습니다. 수상자에게는 격려의 뜻으로 내가 그사이에 쓴 책,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를 선물하겠습니다. 장원은 그 밖에도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더 선택해서 주소와 함께 내 메일로 알려주면 인터넷서점을 통해 두 권을 함께 보내겠습니다.

▲ 강의에 집중하는 14기 캠프 참가자들. ⓒ 손준수

지난번 제시어 ‘나’는 자기소개서를 많이 써본 덕분인지 응모작이 꽤 있었는데 이번 제시어 ‘몸’은 좀 어렵게 생각됐나 봅니다. 우선 응모작이 적었고 수준작도 많지 않아 네 편만 골랐습니다. 그중에서도 장원으로 뽑은 박지원의 글은 알파걸 등의 성공신화에 매료돼 미처 느끼지 못하던 여성 차별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잘 표현했습니다. 남성이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 당연한 일인 양 ‘알파보이’로 추켜세우지 않으면서 여성 중 극히 일부인 ‘알파걸’을 띄우는 것이야말로 여성차별의식의 발로임을 깨닫습니다. 좀 고치긴 했지만 마무리 문장이 아주 좋습니다. ‘나의 몸은 내 것이지만 사회의 암묵적 규율에 맞춰 움직이는 존재다, 마치 내 것인데도 타인만이 불러주는 내 이름처럼.’​

사실 ‘몸’은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 제시어이지만 얼마든지 생각을 확장해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우선 ‘내 몸의 주인은 누구일까’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젊은 당신들로부터 당장 ‘내 몸이 내 거지 누구 거야’라는 반격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사람 몸이 진정 자기 소유가 된 적이 있었던가요? 아직 소유관념이 발달하지 않은 원시공산주의 사회를 빼고 인간은 늘 가부장이나 지배세력의 소유물이었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는 자본의 노예가 되고 말았지요.

국가주의 또는 권위주의 시대를 산 중·노년층은 출생마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국민교육헌장). 국가주의 뿌리는 민주주의 황금기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플라톤이 ‘국가는 최고의 도덕’이라고 했을 정도로 깊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까? 몸의 주인이 그 자신이었다면 하나뿐인 목숨을 나라를 위해 바칠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요?

실은 ‘이 한 몸 조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야말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박정희도 비슷한 말을 했고 박근혜도 조국과 결혼해 오로지 조국을 생각하며 일만 해왔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억울해하는 듯합니다. 개인의 권력욕을 애국심으로 포장한 사람들은 거의 다 자기뿐 아니라 나라를 망쳤습니다.

‘내 몸은 내 거다’라는 자각이 있어야 누구와 어떤 조건으로 노동계약을 맺어 일하고 누구와 언제 섹스를 할지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것이 자유롭지 못한 여건 때문에 노동조건이 악화하고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몸이 내 것이라 하여 국가와 계약을 맺은 공직자까지 함부로 몸을 돌려서는 안 되겠지요. 박근혜는 관저에서 필러와 보톡스 시술을 했다는데, 의료법을 위반하고 그렇게도 내세우는 국가안보마저 잠시 도외시한 건가요?

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해서도 잠시 생각해봅시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던 시절 유행한 말이지만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과 ‘몸에 뱄다’는 말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나쁜 운전습관을 예로 들면 팔다리가 그런 식으로 운전하지만 실은 정신이 그렇게 운전하도록 명령하는 것이겠지요.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악의를 선의로 착각하고 그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사 현안과 결부한다면 박근혜·최순실은 물론이고 김기춘·우병우도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유신시대의 일사불란함을 국정의 효율로 착각해 국·과장까지 잘라내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계를 탄압해야 국론을 통일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선의가 있다 하여 권력남용 등 온갖 범법행위를 엄벌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법치는 힘없는 사람들만 법으로 다스리는 겁니까? 안희정의 ‘선한 의지론’도 보수층을 겨냥한 정치공학적 악의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몸’이라는 제시어는 외모지상주의를 화두로 글을 써도 좋겠습니다. 아래 붙인 글은 영국 유학 시절 <프레시안>에 ‘주름진 노현정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쓴 건데, 우리나라에 유별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주범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 영국 <가디언>은 뉴스와 함께 살아 온 안나 포드의 연륜을 주름살로 표현하려는 듯 1면에 대문짝만한 얼굴 사진을 실었다. ⓒ theguardian

눈가의 잔주름이 얼핏 인자해 보이지만, '아니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치받는 팔팔한 성깔도 있었다. 남성 위주 전문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호신책'이었을까? 1980년대 초 자신의 해고를 배후조종한 한 보수정객의 얼굴에 포도주를 끼얹는가 하면, 한때 동료였던 남성 앵커 마이클 뷰어크에게 "가엾은 늙은 박쥐"라는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뷰어크는, 근래에 여성이 방송계 요직을 많이 차지한 것과 관련해 "여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자는 단지 정자 제공자"라는 '과격발언'을 했다가 다음날 역공을 당한 거였다. 여성 앵커로서 나이에 주눅들기는커녕 "대중은 캐릭터를 가진, 얼굴에 주름을 가진, 인생경험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시청자들이) 화면에서 보는 사람들은 화면 바깥 사람들과 딴판이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한국으로 채널을 돌리면 누구나 목격하다시피 전혀 딴판이다. 여성 뉴스 진행자들은 젊은 미녀 일색이다. 방송사 여성 아나운서 소개 사이트에 들어가면, 미스코리아 뺨치는 미녀들을 많이도 뽑아놨다. 후배들에게 어느새 앵커 자리를 물려주고 잊혀진 베테랑들도 거기 있다. KBS 이규원 아나운서 등의 '방송사 성차별 관행 조사'에서도 밝혀졌듯이, 오죽하면 "계속해서 충원되는 더 젊고 더 예쁜 여자 후배들에게 밀려나지 않기 위해 주름과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아나운서의 고백이 나왔을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게 본인들 죄는 아니지만, 미모가 받쳐주지 못하는 지성인들이 입사시험에서 모조리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면 방송사의 죄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미모를 타고나지 못한 여성들은 아무리 지성적이고 목소리가 낭랑할지라도, 아예 입사를 포기하거나 거금을 들고 성형외과를 찾도록 만드는 게 한국의 아나운서∙탤런트 입사시험이다. 포털 사이트에 뜬 유명인의 어릴 적 사진을 비교해보면서 '나도 손대면 안 될 것 없다'는 외모지상주의에 감염된다. 한국의 성형 붐은 세계적으로도 유별나 얼마 전에는 BBC가 특집으로 보도했다. 바야흐로 '한국 여성의 규격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가?

여성의 외모를 상품화하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방송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MBC도 얼마 전에 뉴스데스크 여성 앵커를 박혜진으로 바꿨지만, 젊은 여성의 외모를 시청률 경쟁의 주요 수단으로 삼아 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시청률이 좀 올라간 것으로 집계되자, 다른 요인은 거의 무시한 채 '박혜진 효과'로 언론에 보도된다. YTN STAR는 지난 1일 '미녀 아나운서들의 방송국 안과 밖'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손문선 앵커는 자기 사진도 떠있는 것을 가리키며 "여러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맨 얼굴 때문에 안 되나"라며 화장거울을 꺼내 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회균등, 선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영국 방송에는 미녀 앵커가 오히려 드물다. 그것이 이상해 BBC의 중견 언론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미디어학과 박사과정에 파트타임으로 다니던 동료였다.

"BBC는 여자 뉴스캐스터 뽑을 때 인물은 좀 안 보냐?"

"인물 보고 뽑으면 미인대회지. BBC 사장의 목이 달아날 일이다."

나이∙성∙인종∙종교는 물론이고 미추의 차별까지 배제하려는 영국 방송의 전통은 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대처 총리 집권 무렵부터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치광이 좌파(Loony Lefts)' 소리를 들어가며 실질적 기회균등을 위한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기회균등의 추상적 실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구호 아래, 정부기관부터 소수인종과 여성의 채용을 늘리고, 그들이 승진경쟁을 할 때도 기회균등이 이루어지도록 철저히 모니터링할 것을 촉구했다.

1980년대 '미치광이 좌파' 출신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중에 현 런던시장 켄 리빙스턴과 전 BBC 사장 그렉 다이크가 있다. 다이크는 사장으로 취임한 뒤 BBC가 '백인 천하'라며 소수인종 등의 채용목표제를 도입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그들 자신이 가장 잘 대변한다는 취지에서였다. 방송이야말로 그런 차별을 없애나가는 데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했다. 이제 영국에서는 프리미어 리그 풋볼클럽과 같은 수많은 민간기업들까지 그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게 된 데는 그들의 상업적 목적 외에도 그런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던 것이다. '진보성향'이라는 정연주 씨가 KBS, 최문순 씨가 MBC의 사장이 됐을 때, 다이크를 본받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는데…, 헛된 꿈이었나?

상업방송이 판치는 미국에서도 미모의 젊은 여성을 뉴스방송 또는 토크쇼의 간판으로 상품화하는 일은 드물다. 73세에 ABC 방송을 떠난 바버라 월터스는 스스로 "미인이 아니어서 내가 카메라 앞에 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저녁뉴스 공동진행자인 해리 리스너에게 따돌림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배우 존 웨인으로부터 '그 자식에게 지지 마라'는 격려편지를 받기도 했다. 지난달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CBS 저녁뉴스 단독 앵커로 발탁된 케이티 커릭(49) 역시 아리따운 외모는 아니다.

건강해 보여 방송진행도 안정된 듯한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네티즌들이 언어폭력을 가한 것은 너무나 한국적인 현상이다. <더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너무 날씬한 마네킹까지 정부가 규제할 방침이라고 한다. 호리호리한 마네킹이 마른 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무리한 다이어트에 집착해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임신과 비만을 동일시하는 건지, 김주하 아나운서처럼 여성 앵커들은 임신만 했다 하면 일찌감치 방송에서 빼버린다. 그러고도 방송들이 '저출산 문제'를 떠드나?

얼굴 쪼글쪼글한 것은 한 인생의 '훈장'이다

BBC 아침 뉴스 쇼(BBC Breakfast) 진행자인 미섈 후세인은 지금 만삭인데도 방송을 계속한다. 시청자들은 그녀가 몇 년 전에도 출산휴가 때까지 방송을 진행했던 걸 기억한다. 같은 시간대 경쟁사 뉴스 쇼 여성 진행자들도, 한국적 인선 기준으로 보면 한쪽은 너무 못생겼고, 다른 한쪽은 너무 뚱뚱하다. 소수인종 출신 앵커도 많아, 앞서 말한 후세인은 파키스탄계이고, BBC 정오뉴스와 ITV 10시 메인 뉴스는 흑인이 진행한다. 유럽의 TV 드라마들도 배역 선정에서 개성과 함께 평범함을 고려하기에 주연들까지 대개 미남미녀가 아니라 그냥 선남선녀들이다.

한국에도 그런 앵커∙아나운서∙탤런트들이 TV 화면을 지배할 날을 상상해본다. 좀 넉넉하고 평범하게 생긴 아나운서들, 하나같이 쌍꺼풀에 콧날 선 개성 없는 얼굴보다는 눈가의 잔주름이 경력을 말해주는 앵커들…. 거기에 혼혈인도, 장애인도 몇 명 끼었으면 좋겠다. 노현정, 정세진, 최윤영, 박혜진, 김소원처럼 지금 인기 있는 앵커들도 현업에 오래 남아 때로는 임신한 모습 그대로, 종내에는 주름진 얼굴 그대로 방송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얼굴 쪼글쪼글한 것은 한 인생의 '훈장'이지 흉칙한 '낙인'이 아니다.

 이봉수 칼럼니스트, 언론인, 언론학 박사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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