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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감시견' 아닌 '애완견' 된 이유

기사승인 2017.02.16  21: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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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김영주 박상연 오소영 기자 kim314sy@gmail.com

- [인문교양특강]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② 언론의 역사와 흑역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 시절 받았던 한 정신병자의 편지를 소개하며 두 번째 주제 강연을 이어갔다. 국정원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미국은 편집증 환자의 증상이 UFO로 나타나요. 우리나라는 국정원이 나를 감시한다는 내용으로 나타나요. 그만큼 우리나라 국민은 감시의 공포를 느끼고 산다는 거죠. 카톡방조차 누군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감시사회에 살고 있어요.”

한 교수는 한국이 감시사회가 된 이유를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됐기 때문”이라 봤다. 정부는 명예훼손죄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2009년 국정원은 박원순 당시 변호사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박 변호사가 <위클리경향> 인터뷰에서 “국가가 국정원을 통해 민간사찰을 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법원은 표현의 자유 위축과 언로 봉쇄 위험을 이유로 국정원 소송을 기각했다.

2014년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부의 명예훼손죄 고소가 또 한 번 발생했다. 세월호 침몰사고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을 보도한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이 피소된 것이다. 한 교수는 “엉터리로 기소했으니까 무죄가 나왔죠, 하지만 무죄가 나오기까지 불려 다니는 게 개인에겐 보통 일이 아니다”라며 그 고소 사건을 평했다.

박정희의 언론 탄압 수법

언론 탄압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부일장학회 강탈을 대표적인 언론 탄압으로 꼽는다. <부산문화방송>과 <부산일보>는 3.15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마산시민들의 민주화 항쟁 소식을 전했다. 일본 NHK는 그 보도를 이어받아 전 세계로 생중계했다. 얼마 뒤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을 특종 보도했다. 사진은 서울의 주요 언론사를 거쳐 전 세계로 알려졌다. 격분한 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마침내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내려와 있던 박정희는 모든 상황을 지켜봤어요. 권력을 잡으려면 언론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거죠. 그때는 <부산일보>가 열독률 4위의 큰 신문사였어요. 박정희는 언론사를 빼앗고자 김지태 사장에게 자산 도피나 다이아몬드 밀수 등의 죄목을 씌었어요. 김지태는 결국 굴복했죠.”

박정희 정권은 김지태 사장이 소유한 <부산일보> 주식 100%와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를 빼앗았다. 부일장학회가 가지고 있던 토지 10만여 평을 강탈해 5.16장학회를 설립했다. 한 교수 설명에 따르면 5.16장학회는 박정희가 소유한 주식을 담아둘 ‘바구니’였던 셈이다. 한 교수는 “이승만이 신문사를 폐간시켰다면 박정희는 언론사를 장악했다”며 “언론을 탄압하는 수법이 고도화했다”고 말했다.

   
▲ 한홍구 교수가 부일장학회 강탈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 김소영

1966년 박정희 정권은 대표적 야당지였던 <경향신문>도 반강제로 빼앗았다. 정부 비판 기사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자 이준구 사장은 구독률을 올리기 위해 정권을 비난하는 기사를 적극적으로 보도한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박정희는 <경향> 사장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다. 그리고 사장 석방을 조건으로 <경향>의 공매를 강요한다. 사장이 굴복하지 않자 은행 부채로 언론사를 압박한다. 서울은행이 대출을 회수하겠다고 <경향>에 통보하고 부채를 갚지 못한 사장은 결국 항복한다. 그해 4월 기아산업계가 인수한 뒤 1974년 정수장학회로 경영권이 넘어간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와 중앙일보의 침묵

언론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정권뿐 아니라 재벌에서도 계속됐다. 한 교수는 “재벌이 뉴스를 장악한 사례로 <중앙일보> 탄생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1965년 9월 삼성그룹 창립자인 이병철이 창간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정치보다 강한 힘으로 사회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기 위함”이라고 창간 배경을 밝혔다. 그러나 1966년 9월 이병철의 사카린 밀수가 탄로 나자 <중앙일보>는 다른 여느 신문들과 달리 삼성을 옹호하는 기사를 쓴다.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삼성 재벌이 공모한 기가 막힌 사건입니다. 50년대 돈을 부정 축적한 경제인들을 감옥에 넣었더니 재벌들이 ‘우리 감옥에 가면 경제 발전을 어떻게 할 거냐’며 반발했어요. 결국, 재벌들을 풀어주고 기업을 하나씩 맡겼죠. 삼성그룹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짓기로 하고 기계를 수입하면서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받아요. 이 돈으로 밀수품을 들여와 박정희 정치자금을 대고, 이병철의 비자금과 투자금으로 쓴 거죠.”

돈을 부풀리기 위해 삼성은 밀수를 담당하고, 박정희 정권이 은밀히 도와줬다. 주요 밀수품은 사카린 원료와 양변기 등이었다. 삼성이 밀수한 양변기 100개를 남대문 암시장에 내놓자, 15만원에 팔리던 양변기 가격이 10만원으로 떨어졌다. 결국, 밀수 행위가 탄로 나자 박 대통령은 “재벌 밀수는 반국가 행위”라며 사건에서 발을 뺐다. 장준하는 “박정희는 밀수꾼 왕초”라고 외쳤다가 명예훼손으로 구속됐다.

삼성재벌이 창간한 <중앙일보>는 사카린 밀수사건을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실과 다르다’는 기사를 싣는다. 이 과정에서 ‘재벌과 언론을 분리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로도 <중앙>은 1999년 홍석현 사장의 탈세혐의 구속수사 당시 일부 기자들이 병풍처럼 줄을 서서 “사장님 힘내세요”를 외치는 등 자본과 밀착된 치욕스런 역사를 남겼다.

무색무취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

“매년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는 사람이 많이 나왔어요. 연탄가스가 무색무취예요. 처음에는 중독됐는지도 모르다가 마비되는 겁니다. 천관우 <동아일보> 주필이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이란 표현을 썼어요. 우리 언론계가 서서히 비판의식을 잃어가는 과정이 연탄가스 중독과 비슷했던 거죠.”

정부의 언론 탄압은 계속됐고, 언론도 맥을 못 추고 저항정신을 잃어갔다.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언론의 비판 기능을 잠식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신동아> ‘차관 기사 필화사건’을 들었다. <신동아>는 1968년 11월호를 통해 정부의 차관도입 과정에서 정치자금을 횡령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보부는 담당 기자를 포함해 <동아일보> 기자 5명을 연행해갔다. 더 큰 충격은 언론사들 반응이었다. 8개 중앙일간지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 이 사건에 대해 일제히 침묵한 것이다.

“’수도 서울의 공포의 밤’이라 불리던 때예요. 언론의 혹한기였죠. 그렇지만 모든 언론인이 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이 사건을 묵시했으니, 자신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을 거예요. 젊은 기자들이 들고일어나 <기자협회보>에 특집으로 다뤘어요. 당시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는 ‘언론 자유를 지키려면 기자와 편집인들이 단결해 경영주와 싸워야 한다’는 글을 투고했어요. 언론이란 성안에 경영주와 편집인, 기자들이 사는데 경영주가 권력의 편에 서서 성문을 열어버리니까요.”

한국 언론을 지키려 한 ‘언론자유수호행동강령’

한 교수는 “60년대부터 언론이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내에 언론담당 조정반을 설치하도록 했고, 정부 기관원이 신문사를 드나들며 검열을 했다. 신문사를 항시 드나들던 정보기관원들에게 “신문사 출입기자”라는 야유 어린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이에 대항한 움직임이 한국기자협회의 ‘언론자유수호행동강령’ 발표다. 1971년 5월 15일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정보기관원의 언론기관 상주와 출입 중지 촉구’ 등 5개항의 강령을 발표했다.

   
▲ 1971년 5월 17일 <동아일보> 7면에 실린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 기사.

이듬해 유신체제가 시작되고, 독재정권의 ‘언론인 길들이기’가 시작되면서 행동강령의 정신이 흐릿해졌다.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는 국회의원 73명(당시 국회의원 정수의 1/3)에 주요 일간지 부국장급 이상의 인사들을 포섭하는 일도 있었다. 한 교수는 “국회의원 되고 싶은 기자들은 내부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다”며 “정치적 출세의 길이 열린 데스크들이 비판적 기사를 쓰겠느냐”며 반문했다. 그나마 <한국일보>와 <동아일보>가 이에 대항해 언론노조를 결성했지만, 노조 임원을 해고하는 등 노조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신문사 밥줄 끊어 길들인 정권

유신정권은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광고주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당시 발행부수나 신뢰도, 광고효과가 가장 좋아 광고주들이 예약까지 하며 며칠씩 기다려야 했던 <동아일보>에 갑자기 광고가 끊기기 시작했다.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이다. 자유언론 실천에 앞장섰던 <동아>를 길들이고자 정권이 광고주들을 압박한 결과였다. <동아>는 광고란을 백지로 둔 채 신문을 발행했다. 백지 광고란은 금세 독자들이 채워 넣었다. 지게꾼, 택시기사, 학생들 등 각계각층 독자들의 눈물겨운 참여가 이어졌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주는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고, 114명의 기자를 해고했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80년대에도 언론의 암흑기는 계속되었다. 전두환 정부 때는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각 언론사에 기사보도와 관련한 깨알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 자유의 숨구멍을 틀어막은 것이다. 한 교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을 사례로 들었다. 1983년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단식에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어느 언론사도 보도하지 못했다. ‘정세 흐름’, ‘정치현안’과 같은 모호한 말로 단식투쟁의 의미를 덮거나, 심하게는 “어느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로 단식투쟁을 격하했다.

“이게 80년대 언론입니다. 참담한 거죠. ‘기레기’란 표현이 없었지만, ‘기레기’는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겁니다.”

해직 언론인과 독자, 민주주의 지평 열다

부끄러운 역사를 딛고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뜻을 모아 창간한 것이 <월간 말>이었다. <말> 지의 특종 기사 중 하나가 ‘보도지침’ 폭로 기사다. <한국일보> 기자였던 김주언이 회사에서 보관중이던 보도지침 자료를 모아 정리해 <말> 지에 넘겼고, 1986년 9월 특집호로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가 발간됐다.

1988년 5월 15일에는 <동아>와 <조선>에서 해직당한 기자들이 모여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 <한겨레신문>은 권력의 언론 탄압 역사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시도였다. 정권에 휘둘리지 않도록 국민이 신문사의 주인이 됐다. 국민의 성금을 모아 신문을 창간하면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편집권을 보장받았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 독자 광고와 <한겨레> 창간을 “한국 언론사에서 길이 남을 두 장면”이라고 말했다.

재벌에 포섭된 언론

“노무현 대통령이 삼계탕집에 언론사 사주들을 두 번 초대했어요. 그런데 두 번째 회동에서는 초대받은 누구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권력은 청와대에 있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5년짜리 비정규직 계약 공무원이에요. 진짜 권력은 죽을 때까지 내 손에 쥐고 있다가 자식한테 물려주는 거예요. 결국, 언론사 사주가 한국 사회의 진짜 권력자가 됐죠.”

2005년 ‘삼성X파일’ 사건은 언론사 사주의 권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97년 대선 전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검사들에게 뇌물 로비 등을 논의한 대화가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도청됐다. 이상호 MBC기자가 안기부의 녹취록을 폭로해 세상에 알려졌다. 삼성 계열사인 <중앙일보> 사주가 거대 비리에 연루된 사건이다. 주요 언론사들이 ‘삼성X파일’ 사건을 보도했으나 <중앙>만은 예외였다.

   
▲ 한홍구 교수가 세명대에서 한국의 언론 탄압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 김소영

한 교수는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이해를 반영하는 기자가 아닌, 올바른 언론인의 길을 고민하는 젊은 기자가 한국 언론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자 계급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한국사회는 급노조화한 반면, 언론인은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급보수화합니다. 언론인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처럼 권력의 핵심에 다가갔어요. 그런 사람이 언론을 주도하면서 언론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는데, 올바른 언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젊은 언론인 여러분들이 잘 살려주길 바랍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이창곤 심보선 홍세화 고찬수 이주헌 윤성호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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