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주제 ① 헌법의 역사, 반헌법의 역사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이창곤 심보선 홍세화 고찬수 이주헌 윤성호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법은 누가 지켜야 할까요? 시민이 아니라 권력자가 지키는 것이 법입니다. 시민은 권력자가 법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것이죠. ‘준법’, ‘법치’ 같은 단어는 권력자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시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세상이지만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준법’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다. 한 교수는 시민의 준법정신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치’란 권력자가 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현대 자본주의 헌법은 사회권적 시민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는 근대 자본주의 헌법의 자유권적 시민권도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그는 비판했다.

▲ 한홍구 교수가 '헌법의 역사, 반헌법의 역사'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박진우

법의 지배는 언제나 정당한가?

“히틀러의 만행이 당시 적법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법하다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죠.”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지도자였다. 바이마르공화국 붕괴에서부터 유대인 절멸에 이르기까지 그가 한 모든 행위는 적법한 법 집행이었다. 한 교수는 민주주의란 권력을 잡은 자에게 법의 이름으로 아무 짓이나 해도 좋다는 면허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요체는 자신이 선출한 권력을 의심하고 견제하는 데에 있다. 현대 시민이 법치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노예제나 신분제가 합법이었던 봉건주의 시대를 혁명으로 마감하고 민주주의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공공정신

“임시정부를 잘 모를 거예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중국 도시 이름 몇 개 써놓고 임시정부가 도망간 순서를 맞추는 것에 불과합니다. 임시정부가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는지는 가르치지 않아요. 여러분은 임시정부가 꿈꾼 국가는 어떤 나라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한 교수는 유교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공개념이 한국의 역사와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데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공성과 관련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다. 건국강령은 충칭 시기의 임시정부가 발표했다. 건국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골격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 실현'을 주창했다.

“건국 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보위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연환(連環) 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에 열거한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경제정책을 추진∙실행함.”

한 교수는 건국강령 제5의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이라는 내용이 표현만 약간 바뀌었을 뿐 제헌헌법으로 이어져 지금 헌법에도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 헌법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제헌헌법보다 공공성이 약해졌지만, 이 정신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나누어 줌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자작농·소지주농·중지주농 등 그 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줌.”

건국강령 제5의 8항이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에 절대농지 개념으로 서 있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은 위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건국강령을 기초한 조소앙은 건국강령의 내용을 해설하면서 “전통적으로 토지는 공적인 소유였으며 우리나라 토지제도는 국유제에 모범을 두었고 문란한 사유(私有)를 국유(國有)로 전환하는 태도를 가졌다”고 규정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주∙소작 관계를 꼽았고 그 관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에 1920년대, 1930년대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협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건국강령 제5의 4항에서 전조차(轉租借), 즉 소작을 금지한다는 내용 역시 경자유전의 원칙을 따르는 것으로 1949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땅을 제일 많이 소유했던 한민당의 최고 실력자 김성수 선생도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농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반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했지만 지금 재벌들과 비교한다면 김성수 선생은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유상몰수라고 해도 사적 소유권의 심각한 침해라고 볼 수 있는데 말이죠.”

8항 외에도 건국강령 곳곳에 공공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1항은 “대산업기관의 공구(工具)와 시설, 공영적 주요 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및 중소기업만 사영으로 한다”며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내세운다. 7항에서는 ‘농공인의 면비의료(免費醫療)를 보급〮실시하여 질병의 소멸과 건강을 보장한다’며 무상의료를 주장한다. 한 교수는 임시정부뿐 아니라 국내 민족주의자 대다수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제헌헌법

“제헌헌법 읽어보신 적 있어요? 제헌헌법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헌법 가르칩니까? 왜 안 가르칠까요? 너무 급진적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해산된 통합진보당 강령보다 훨씬 급진적입니다.”

한 교수는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948년의 제헌헌법을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건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제헌헌법을 들 정도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면서 그 주역들이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국민과 맺은 숭고한 협약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시민들은 제헌헌법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게 없다고 한 교수는 전했다. 한 교수는 제헌헌법의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기 때문에 수능시험에도 제헌헌법이 등장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제헌헌법. 제헌헌법 전문은 임시정부를 계승해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점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 퍼블릭 도메인

제헌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으며, 1948년의 정부수립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고 1948년의 정부수립은 대한민국을 ‘재건’한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한 교수는 제헌헌법의 전문을 통해 최근 뉴라이트가 불러일으킨 ‘건국절’ 논란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4권을 담은 제헌헌법 제18조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제헌헌법 제18조의 내용이다. 일반적인 자본∙임노동 관계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상품으로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익은 자본가의 몫인 셈이다. 제헌헌법이 노동자의 이익분배 균점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통상적인 자본∙임노동자 관계에서 노동자가 임금만 받고 마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이익이 나면 그 이익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 교수는 제헌헌법에서는 노동자가 이익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조항이다.

“노동3권은 지금 헌법에 있는데도 잘 안 지켜지죠. 노동자들 100명 모아놓으면 조합원은 10명밖에 안 됩니다. 단체행동권은 또 어떤가요? 그런데 제헌헌법에는 노동4권을 말합니다. 이승만도 이걸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에요. 노동3권만 가지고는 노동자가 자본가에 맞서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익은 통상적으로 자본가의 것입니다. 이거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 맞나요? 제헌헌법이 그렇게 주장했어요.”

한 교수는 제헌헌법이 정부 수립의 ‘계약서 원본’에 해당한다고 비유했다. 전쟁과 독재, 학살을 거치면서 제헌헌법의 내용이 유명무실해졌지만, 적어도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국가 이전에 사람, 주권자가 있다는 사실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헌헌법 제1조는 임시정부부터 제헌헌법, 그리고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돌아봐야 할 이유다.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경제조항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제헌헌법 제84조의 내용이다. 한 교수는 ‘우리 제헌헌법이 시장경제 질서의 개념을 넘어 강한 통제경제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가 강력하게 경제에 개입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 정신에 더 가깝다.

“제헌헌법 기초의 책임자이고 대한민국의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유진오 선생은 헌법의 경제 조항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 여기서 사회주의는 형용사입니다. 우리가 채택한 건 균등의 원리인데 그게 사회주의와 가깝다는 얘기지 대한민국이 체제로서 사회주의를 채택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폐기했다.”

또한 제87조에서 공공성을 띤 중요 기업은 원칙적으로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할 것을 규정한 것은 1948년 헌법을 제정할 때를 기준으로 보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국 두 나라를 제외한 각국 헌법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예다. 그만큼 우리 헌법이 진보적인 색깔을 띠었다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제헌헌법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좌파가 만들었나요? 좌파는 5∙10선거를 보이콧해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중도파만 극소수 참여했고 나머지는 다 우파입니다. 그 우파가 만든 제헌헌법에 중요 산업 국유화, 천연자원 국유화, 사회주의에 가까운 통제경제, 균등생활 같은 이념이 깔린 거예요.”

1950년대 집권 여당이던 자유당도 1952년 창당할 때 강령을 만들면서 ‘우리는 독점경제 패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물리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기업가 및 기술 있는 자의 권익을 도모하여 빈부차 등의 원인과 그 습성을 해부하고, 호조호제(互助互濟, 서로 도움)의 주의로써 국민생활의 안정과 향상을 기함’이라고 강조했다.

우파가 왼쪽으로 간 까닭?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주요 산업 국유화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급진적인 조항이 아니었다. 국내 공업자본 중 94%가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이다. 토지도 마찬가지였다. 김성수 같은 일부 친일 땅 부자를 제외하면 조선총독부 명의 토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방 후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민당 같은 보수파도 주요 산업의 국유화에 반대하지 않았다. 농지개혁도 반대할 수 없었다. 다만 땅을 뺏어가되 돈 주고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했지만, 남한은 보상하고 가져가라고 주장했을 뿐 기본적인 정책 방향에는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이게 그 당시 일반적인 정서였을 거예요. 우파도 대중의 일반적인 정서를 거스를 수 없었던 거죠.”

▲ 한 교수가 해공 신익희의 급서 기사를 보여주며 진보당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 박진우

당시 농림부 장관인 조봉암 선생이 1949년 서둘러 법안을 만들어 제한적이지만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다. 만약 남쪽이 농지개혁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치렀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이야 우리 농민들이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 나라에 일체감을 느끼겠지만, 그 당시 농민들은 상당수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몰랐을 겁니다. 정부 수립하고 2년도 안 되어 전쟁이 터졌잖아요. 국민이 일체감을 느낄 만한 시간이 없었는데 전쟁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농지개혁을 안 한 상태에서 북에서 내려와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면 큰일 날 뻔한 거죠.”

1948년 8월 15일, 그들만의 건국절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제헌헌법 제101조의 내용이다. 이 조항이 들어간 까닭은 친일파 처벌을 소급적용하기 위해서다. 친일행위는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1945년 이전에 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에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친일파 처벌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사실 소급입법은 죄형법정주의하고 맞지 않습니다. 죄형법정주의란, 법이 있기 이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것이 근대법의 원칙인데 친일파 문제만큼은 국민적 합의로 단서 조항을 두었습니다. 친일파 청산을 안 할 수 없고, 이에 대해 시비가 걸릴 여지가 있으니 소급입법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거예요. 대한민국 헌법 제정의 주역들이 친일파를 꼭 처벌하겠다는 약속을 국민에게 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지속해서 제기된 친일파 청산 요구는 미 군정의 회의적 태도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 1948년 4월 8일 국회가 해방 이전 악질적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구성을 가결했다. 하지만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친일 경찰 간부들이 청사를 습격해 반민특위를 해체한다. 또한, 국민 정서를 반영해 제헌헌법에 포함되었던 주요 산업 국유화, 천연자원 국유화, 사회주의에 가까운 통제경제, 균등생활 같은 진보적인 내용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지게 된다.

▲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광경. © 퍼블릭 도메인

“1954년 개헌에서 제헌헌법의 경제 조항 중 상당 부분이 우파의 요구 때문에 삭제됩니다. 미국도 삭제하라고 압력을 가했고요. 미국 입장에서는 아주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바꿔나가는 거였죠.”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역사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자는 없고, 고문당한 사람은 있는데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은 없는 그런 이상하기 짝이 없는 과거사. 가해자가 특정되어야 사법적 정의를 세우기 위한 처벌이 진행되든지, 회복적 정의를 세우기 위한 사죄와 용서, 화해가 진전되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홍구, ‘한국의 과거청산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사업’ 서문 중)

▲ 한홍구 교수가 주도하는 <반(反)헌법행위자열전> 사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에서 국가폭력의 가해자를 특정하고 그들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이다. ©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페이스북 갈무리

한홍구 교수는 <반(反)헌법행위자열전>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에서 국가폭력의 가해자를 특정하고 그들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작업이다. 한 교수는 “1945년 해방, 60년 4월 혁명, 79년 박정희 피살, 87년 6월 항쟁 등 구세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이행기마다 한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민주정권이 들어선 뒤 과거사 정리 작업을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20여 개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000명이 넘는 조사관이 정부의 급여를 받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국가범죄에 대한 과거청산은 힘 있게 추진되지 못했고, 핵심적인 가해자의 고백을 끌어내지도, 단 한 명의 가해자를 감옥에 보내지도 못했다”고 한 교수는 말한다.

한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과거사 관련 법률은 20개가 넘게 제정되었지만, 12·12 사건과 5·18 학살 관련자들의 공소시효 정지를 규정한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빼면 가해자 처벌을 전제로 한 법률은 없다. '의문사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등 모두 진실규명과 피해자 지원에 대한 내용만 담고 있을 뿐 책임자 처벌은 담고 있지 않다. 한 교수는 “군부-중앙정보부-안기부 등 군사독재의 핵심세력이 물러간 자리에, 재벌∙검찰∙관료∙민간 정치인이 되어 ‘가해자’들이 여전히 권력집단의 일원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있을지 모르나 역사의 법정에 시효는 없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조작∙인권유린 등으로 헌법을 파괴하고 유린한 자들의 책임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길 것이다.” (한홍구, ‘한국의 과거청산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사업’ 중)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힘도, 그들로부터 사과나 고백을 받아내 화해로 향한 길을 열 힘도 없다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 교수는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 못했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그리고 2015년 10월 12일, 국가범죄의 가해자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워 그 책임을 묻기 위해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날은 제헌국회가 1948년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과 재판관, 검찰관을 임명한 날이기도 하다.

편찬위는 반헌법 행위자의 범위를 ‘대한민국의 공직자 또는 공권력의 위임을 받아 일정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국한하고, 그 행위를 내란∙학살∙고문조작∙부정선거 등 4개 분야로 한정해 그 행위 당시의 법률을 기준으로 대상을 집계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의 출생과 성장에서부터 반헌법 행위 이력, 그 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까지 생애사를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지난 7월 13일 전두환∙노태우 등 12∙12사건의 주역과 이기붕∙최인규 등 3∙15 부정선거 핵심 등을 포함한 99명의 명단이 1차로 발표되었다.

한 교수는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조작∙인권유린 등으로 헌법 파괴를 일삼았던 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오히려 법치를 내세우고 헌법을 거론한다, 사과는커녕 여전히 고문과 조작으로 받은 훈장을 달고 국가유공자가 되어 국립묘지에 묻힌다”며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시대상황 때문이라는 가해자의 상투적인 변명에 대하여 대한민국에서 헌법적 가치를 세우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 해석이 민주주의 변혁운동 향배 갈라

“헌법이란 계급투쟁의 지형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헌법 해석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은 민주주의 변혁운동의 향배를 가르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한 교수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가시적인 성과로 헌법에 구현된 것이 직선제와 헌법재판소”라고 말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법 위에서 폭력과 폭압으로 권력이 행사되었지만, 지금은 권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헌법 체계 안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헌법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헌법재판소가 주요한 권력기관으로 부상했다. 민주화 이후 선출되는 권력이 진보세력으로 다수 넘어가면서, 선출되지 않는 권력 즉, 사법부를 장악하는 것이 권력의 향배를 가르는 데 결정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 한 교수는 "헌법이 되살아나 제 역할을 해야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 박진우

한 교수는 “(헌)법은 기본적으로 지배자들의 것이고, 한 번도 약자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우리가 기댈 곳은 헌법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헌법은 그 조항을 어떻게 해석하고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철해 나가느냐의 싸움”이라며 헌법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치열한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 이전 특별법’ 위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기각 등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헌법의 해석과 적용에 따라 지배권력을 옹호하기도, 진보의 최후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한 교수는 “헌법을 보수 세력의 전유물로 놔둘 수 없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는 과거사 문제를 헌법적 관점에서 조망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불러와야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한홍구 <역사와 책임> 중)

“드라마 <시그널>에서처럼, 자꾸 과거에서 무전이 오는 것 같아요. 제게 ‘지금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가 됐죠’라고 묻죠. 저는 대답할 수가 없어요.” 

한 교수는 강의 끝부분에 E.H 카의 말을 빌려 ‘역사와 대화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오늘의 관점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불러오는 작업을 포기한다면 역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오늘을 사는 것이 역사가 되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에 우리는 ‘삶’으로서 이미 발을 담그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오늘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미룰 때 그것이 또다시 과거사 문제가 된다. 한 교수의 말처럼, 2016년을 사는 우리는 오늘의 삶으로서 과거를 돌아보고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내일의 역사를 위해,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복원력밖에 없다.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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