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자유’

   
▲ 신혜연 기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식민지 미국의 젊은 변호사 패트릭 헨리가 조국 독립을 위해 칼을 뽑으며 내뱉은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인류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본능이다. 루이 16세의 목을 베고 공화정을 세운 프랑스 혁명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였고, 20세기 전 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 물결은 인종차별과 성차별, 무의미한 전쟁으로부터 자유를 외쳤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며 ‘나를 파괴할 자유’를 주장하기도 했다. 마약 복용을 일삼다 생을 마감한 그의 말년은 쓸쓸했지만, 사회 금기에 도전한 용기는 칭찬할 만하다. 사회 구조와 관습, 구태에 맞서 싸우는 개인이 없었다면 인류 발전도 없었을 거다.

▲ 18세기 미국 독립운동가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 wikipedia

인류의 본성을 속일 수 없었던 탓일까? 21세기 한국 사회 역시 자유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앉으나 서나,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자유를 생각하는 집단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간다. 1990년 '자유시장경제 수호'를 내걸고 출범한 자유경제원의 화장실 입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얼굴이 걸려있다. 화장실 문 앞에는 ‘경쟁’ ‘격차’ ‘사익’이란 단어가 박혔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각 단어들의 친절한 용례를 볼 수 있다. ‘격차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익이 세상을 발전시킨다’, 한국에서 ‘자유’가 갖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구들이다.

한국의 ‘자유’는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는 경제권력이 선점했다.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를 주장하면서 ‘자유’를 전면 구호로 삼았다. 열렬한 신봉자들 덕분에 한국에는 그들만의 자유가 넘쳐나는 ‘자유공화국’이 됐다. 한국의 국민의료비중 공공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2012년 기준 54.5%)다. 의료서비스가 형편없기로 소문난 미국, 칠레, 멕시코만이 한국 아래 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사회는 국민에게 ‘가난해질 자유’를 보장해야 하므로 복지지출에 인색하다. 한국의 국민총생산 중 정부 복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대로, OECD 평균인 22%보다 한참 낮다. 2010년 기준 정부정책에 의한 소득재분배 개선 비율은 9.17%로 OECD 32개국 중 31위다. 역시 OECD 평균(34.23%)과 큰 차이가 난다. 정부가 불평등 완화와 복지정책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는 뜻이다. 무정부 상태와 다를 게 없다.

한국에 떠도는 ‘자유주의’의 망령은 패트릭 헨리가 주장하던 ‘자유’와 거리가 멀다. 변기 물에 쓸어내려야 할 만큼 오염됐다. 자유에 대한 성찰이 빠져서다.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다. 자연 상태의 자유는 강자의 자유가 되기 십상이다. 트라시마코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서는 건물주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자유를 존중한다며 세입자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일이 횡행한다. 치솟는 보증금에 2년마다 이삿짐을 꾸리는 전세 난민들은 물론이고 재개발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는 철거민의 현실도 ‘자유’에 대한 삐뚤어진 시각에서 나왔다. 사용자의 이익을 추구할 자유를 존중한다며 노동자들의 노동3권과 건강권을 쉽게 무시하는 행태도 ‘자유’의 대표적인 오용이다.

▲ 자유경제원 화장실 문 앞에 '경쟁, 사익, 격차'등의 단어가 적혀 있다. ⓒ 한겨레 카드뉴스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한 북유럽 국가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다수를 위한 자유’를 주장한다. 다수의 자유를 위해 강자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둘 수 있는 것도 자유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다.

반면 ‘개인이 하는 행동에 대한 제약이 없는 상태’라는 ‘한국식 자유’는 1차원적인 사고에 머문다. 이대로라면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개인을 존중해야 한다. 이런 식의 자유는 타인의 생명권과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더 큰 자유를 누릴 기회를 뺏는다. 교통질서에 맞게 신호를 지킨다면 사고 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인간이 정부를 만들고 법을 지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 더 큰 자유를 도모하기 위해 정부가 존재한다. 자유에 관한 한 공리주의적 접근은 설득력 있는 관점이다.

자유주의의 선구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자유지상주의의 대표적인 학자인 로버트 노직은 2002년에 세상을 뜨기 전에 자신의 사상을 수정했다. “세금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강제 노동”이라며 사유재산권을 신성시한 노직이었지만, 말년에는 부의 상속이 지속적인 불평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학에서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하이에크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을 나온 그는 독일이 전쟁보상금을 치르느라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나치즘에 빠져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극단적인 집단주의로 비화했다는 확신을 갖고 자유주의로 돌아선 셈이다. 하이에크는 죽을 때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 융성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위협하는 현실을 본다면 또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당신의 종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라.’ 속담이 뜻하는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은 돈이다. 가계부채가 1200조를 넘고, 빚을 진 채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 채무자가 2만 명에 이르는 나라에서 국민은 빚을 갚기 위해 산다.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대학 등록금을 갚기 위해 질 낮은 일자리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미국 청년들의 현실을 풍자했는데, 남의 일이 아니다. 교육, 주거, 의료 등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이 부정당한 나라에서 ‘빚에 삶을 저당 잡힐 자유’와 ‘굶어 죽을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자본주의는 최고의 하인이지만 최악의 주인’이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자유지상주의자는 강자의 자유가 아닌 다수의 자유, 사회 전체의 자유 증진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최악의 주인’ 밑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경제논리에 앞서 최소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복지제도를 말하는 게 오늘날 자유주의자의 미덕이다. 하루 평균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자본의 자유’를 주장하는 가짜 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다. 이제 자유를 빼앗겨온 다수가 목소리를 낼 때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민주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