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직접민주주의 요소 도입하자

▲ 박찬이 기자

1987년 6·10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10월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내는 원동력이었다. 12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국민은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다.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는 이때 끝났다. 우리는 이를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87년 체제’라는 명명에는 이때 형성된 정치적·사회경제적 구조 또는 구도가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 주조된 체제는 어떤 모습인가? 87년 대선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진전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 구도에 기반을 둔 정당정치를 확립시키는 반작용을 낳기도 했다. 민주정의당이 대구·경북을, 통일민주당이 부산·경남을, 평화민주당이 호남을, 공화당이 충청을 지역 거점으로 삼는 구도다. 이 구도는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을 통해 김대중의 호남을 고립시키는 구도로 고착되어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 87년 6월 항쟁 모습. ⓒ 광주 MBC 뉴스 화면 갈무리

정당정치의 지역 고도화는 ‘87년 체제’를 추동시킨 시민들의 희망과 에너지를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왜곡시킨 결과다. 87년 항쟁을 주도했던 시민·학생·노동자들은 반독재와 더불어 경제적 불평등 해소, 노동자의 권리 보장, 교육 개혁 등 진보적이고 계급적인 이념 지향을 광장에서 표출했다. 광장의 요구를 제도화로 연결시키는 논의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들의 요구는 배제되었다. 그 결과가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개헌이었다. 이후 여야 할 것 없이 정당과 시민들이 괴리되는 현상이 뚜렷했다. 이런 괴리로 인한 사회 전반의 불안함이 ‘87년 체제’의 근본적 한계다.

문제는 87년의 기대가 어긋났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뽑은 대통령들이 권력을 남용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갔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집회는 2008년에도 2012년에도 이어졌다. 정치인들의 예상과 다르게 한국에서 집회는 이제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예외가 더는 예외가 아니라면 일상적인 것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고안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국민의 뜻을 일상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장치는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다. 헌법에 국민투표의 범위를 확대하고, 국민발안과 국민소환의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광장집회는 직접민주주의 도입에 필요한 시민의식의 성숙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인구 규모가 크다는 난점도 발전한 정보기술의 도입으로 가능하다. 87년 체제는 직접민주주의 도입을 상정하지 않았다. 230만 촛불 시민이 그 장치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시민혁명의 에너지를 헌법 차원의 제도화로 연결짓지 않으면 에너지는 휘발돼서 사라져 버린다.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도입이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내각제보다 더 절실하다. 대통령에게 집중됐던 권력을 나눈다고 해서 국민 뜻이 더 잘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 뜻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놔두고 굳이 정치인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우회하는 장치를 먼저 추진하는 것은 정치인들을 위한 개헌이므로 차선책이다. 정치인도 국가 질서에 복무해야 하는 의무를 진 국민이다. 국가 질서란 헌법이다. 헌법의 어원인 ‘constitution’은 구성한다는 의미의 ‘constitute’의 파생어다.

이름 없는 국민은 언제나 역사에서 주인공으로 나섰다.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민중들은 자치기구인 ‘집강소’ 설치를 주장하며 민주주의적 요구를 분출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의회를 개설하려고 시도했다. 국민은 이미 한국의 역사를 자생적으로 만들어왔다. 이것을 제도화하자.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자의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요긴한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제도든 잘 운용되려면 그 제도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 필요하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 230만명이 모인 촛불집회는 평화로웠고,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성공했다. 여당은 해체 직전의 상황이다. 이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면 87년 체제를 극복할 답을 찾을 수 있다. 진원지는 국민이다. 국민의 힘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제도가 정착된다면 차가운 광장에서 국민이 떨고 있을 필요도 없다. 이런 제도를 운용할 수 있는 의식 있는 국민 덕에 한국 민주주의가 도약할 기회를 2016년 지금 맞이했다.


편집 : 황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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