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역사

▲황두현 기자

혼돈의 정국이다. 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사태에 전국이 분노로 들끓는다.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주권을 향한 갈망은 성탄절 이브의 강추위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70만 명이 광장을 달군 9차 집회의 백미 ‘촛불마스’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들을 떠올린다. 라스푸틴, 신돈, 최태민... 이들은 종교의 탈을 쓰고 지도자의 신임을 빌미로 권력을 전횡하며 시대를 농락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신돈은 다소 상황이 다르다. 그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요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 개혁가에 가깝다. 그가 세운 ‘전민변정도감’은 권세가들에게 점탈된 토지나 농민을 되찾는 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뒤엎은 이성계 추종세력은 과거 체제를 몽땅 부정하면서 새 왕조의 정당성을 얻으려고 신돈의 실체를 왜곡한 측면이 크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과 정의는 때로 피 묻은 승자의 손으로 다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문화 현상에도 비슷한 경우를 본다.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등장도 이를 계승·발전시키지 못하면 그 의미가 퇴색되며 기록 속에만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최초의 금속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볼만 하다. 1999년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는 서기 1천 년대에 발생한 사건 중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을 금속인쇄술 발명으로 꼽았다. 그런데 그 대상은 우리 것이 아닌 구텐베르크의 금속인쇄였다. 고려 금속활자가 최초로 개발된 건 맞지만 기술이 전파되지 않아 세계문화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긴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한국인은 구텐베르크보다 200여 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그것을 발전시켜 한국문화를 향상 시키는 데는 실패했다”는 1997년 당시 미국 부통령 앨고어의 독일 G7 정상회담에서 지적은 뼈아프게 와 닿는다.

▲ 역사바로세우기에 소극적이었던 제2공화국은 불과 1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사진은 윤보선 대통령(좌)과 장면 총리(우)가 참가한 공화국 수립 경축식.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김수영은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에는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고 썼다. 이 무슨 소리인가. 1960년 4.19를 통해 최초의 시민혁명을 이뤄냈지만 불과 1년 만에 5.16 박정희 쿠테타를 허용하고, 군사 독재로 전락한 현실 앞에서 토해낸 시인의 고뇌다. 4.19 뒤 허정내각이 개헌을 이뤄냈지만 이후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으로 군사반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낸 6월 항쟁의 성과물도 민주화 동지이던 김대중-김영삼의 분열로 12.12 쿠데타 세력에게 돌아갔다, 역사는 들려준다. 시민 혁명이 성공한 듯 보이는 바로 그 뒤가 더 중요하다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에 이어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헌정 사상 두 번째로 국회를 통과한 뒤에도 시민들이 3차례나 촛불을 더 들었다. 앞으로도 촛불이 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촛불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란 말인가? 기득권 중심의 구체제를 청산하고 시민 중심 국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라도, 9번에 걸친 광장의 촛불 민심이 역사에 온전히 기록되기 위해서라도, 촛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걸 시민들은 안다. 개혁적인 시민혁명의 가치가 순식간에 반동의 물결에 가려지는 것을 겪어온 국민들은 이제 어리석지 않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 역사에 완결된 인쇄본은 없기 때문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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