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촛불집회

▲ 김범진 기자

'위키리크스'의 폭로 파문으로 한때 세계가 떠들썩했다. 가디언지는 이를 두고 ‘기성정치와 인터넷 풀뿌리 문화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립’이라 평했다. 당시 국무장관 힐러리는 사태의 주동자 어산지에 대한 강경 처벌을 엄포했다. 힐러리의 패배는 이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직책상 어쩔 수 없는 입장 표명이었다 하더라도, 대선후보가 된 힐러리에게 과거의 강경 발언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다수 미국인들은 미국 정부의 비밀주의와 금권정치,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껴왔다. 의회와 정당은 시민들의 요구와 의사를 반영하는 통로가 아니라 차단하는 벽이었다. 위키리크스는 물론이고 샌더스나 트럼프의 등장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다르나 맥락은 같다. 기성정치에 대한 반발이자 대의제의 위기였다.

민의가 반영되지 않는 대의제의 한계는 한국에서도 드러난다. 최근의 촛불 시위는 대통령이 버티기 시작하면서 장기화할 조짐이다. 학자들은 사상 최다인파를 광장에 부른 국정농단사태뿐 아니라 이전의 국정원 대선개입, 세월호 참사 등 개별 사건이 모두 정상적인 국가라면 대통령이 퇴진해야 할 사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나가야 하나? 국회 탄핵보다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소환할 수 있는 국민소환제가 있었다면 이미 불신임으로 대통령은 한참 전에 물러났을 것이다. 제도 하나는 촛불 백만보다도 힘이 있다. 제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야 했다.

▲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주최한 5차 주말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50만 명이 운집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사회의 중요 개혁과제는 모두가 하나같이 묵은 것들뿐이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반복해 문제를 제기해도 기성 정치 아래에서 제대로 된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의제가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권을 향한 불신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또한 양당이 양분하는 구조에서 소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대의제는 다수가 집행하는 전체주의나 다를 바 없다.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혹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는 위험하니 대의제가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앞에서는 김영란법을 제정하면서도 뒤로는 각종 부패, 횡령, 선거법 위반이 횡행하는 현실을 고치려면 직접통제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대표성이 취약한 의회는 ‘보이는 의회’와 ‘보이지 않는 의회’로 이중구조화 되어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면서 한편으로는 특수 집단에게 합법적인 면죄부를 제공함으로써 지배이익을 정당화한다.

전문화한 현대사회라는 전제는 오히려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대통령이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하더라도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나 관료 독점주의는 효용성을 잃고 있다. 의사결정과정에서 집단지성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우중정치는 제도권이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조장해온 바가 크다. 각성된 시민은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엔 꼬뮤’나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등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한 신생 정당의 등장, 핀란드의 적극적인 국민발의제 도입 등 세계 곳곳에서 정치가 바뀌고 있다. 폐쇄적인 정치문화를 시민이 참여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민들이 정치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국민발안제, 국민소환제 등 직접민주주의의 도입은 민의가 반영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해소할 수 있다. 불신과 함께 만연했던 무관심과 냉소주의도 민의가 반영되지 않았던 대의제의 제도적 장벽 때문이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핵심가치에도 부합한다. 이제 “국민으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독일 시인 브레히트의 물음은 대답을 찾아야 한다. 권력은 국민에게로 가야 하며, 집단지성은 더욱더 발휘되어야 한다.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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