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을 보고

   
▲ 김효진 PD

자화상이 좋다. 자기 자신을 그린 그림엔 가장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림을 바라볼 타인을 신경 써야 할 초상화와는 다르다. 움직이는 자신을 멈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그림이 단지 실물을 똑같이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라면 말이다. 반 고흐는 유달리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중 하나가 1887년 작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이다. 모델료가 없어 자기 얼굴을 그려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고흐의 피폐한 심신과 그럼에도 예술적 열정으로 이글대는 눈빛이 어우러져 인상적이다. 점점이 흩어지다 굴곡지며 연결되는 특유의 짧은 터치 덕에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다. 살아 움직였던 그가 남긴 것은 한 장의 정지된 얼굴이지만, 그 정지 속에 그의 삶 전부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멈춤 속에 끝없는 움직임이 있다.

▲ 고흐,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파리, 면에 유화, 44.5 X 37.2cm. 반고흐미술관 소장. ⓒ Flickr

이 ‘멈춤의 움직임’을 깊이 느꼈던 적이 있다. 시골 본가에서 지내며 서울로 스터디를 하러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의 나는 1분 1초를 아끼며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렸다. 스터디 장소까지는 고속버스로 1시간, 지하철로 20분, 도보 10분 거리. 최적 이동 경로를 알려주는 앱에 따라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확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버스가 얼마 못 가 휑한 시골 국도에 서고 말았다. 약속 시간이 바쁜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불렀다. 나 역시 초조했지만 우연히 주어진, 혹은 늘어난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아 그대로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좁은 아스팔트 길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벼로 빼곡한 논이, 한쪽에는 짓다 만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과 건축자재가 쌓여 있었다. 그 뒤로는 상가 몇 채가 있었는데, 어쩐지 익숙한 상호였다. ‘보배네 만두’. 장사는 하지 않는 듯했다. 한참을 바라보니 문득 닫힌 문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뒤이어 젊은 아빠,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10년 넘게 타고 다닌 낡은 승합차도 비쳤다. 그곳은 어릴 때 가족과 즐겨가던 음식점이었다. 정지된 풍경, 그것도 우연히 멈춰선 낯선 곳에서 추억이 되살아나 움직였다. 그때 먹었던 만두의 따끈함,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너털 웃음, 봉고차 뒷자석의 케케묵은 시트 냄새가 느껴졌다.

그리운 기억을 너머에 두고 차창에 순간 내 얼굴이 반사됐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고로 아빠를 잃은 후 반년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감당하기 힘들어 눌러뒀던 슬픔이 밀려나왔다. 비통한 엄마를 의젓하게 위로하기 위해 참았던 ‘진짜 나’였다. 우는 것도 사치라 여기며 바쁘게 살았던 내게, 버스는 그후부터 홀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공간이 되었다. 그날 나는 그곳에서 내 자화상을 만났다. 곧 다른 버스로 옮겨 타 그곳을 빠져나왔지만 그 순간 마음에 담긴 창 밖 풍경이 정지된 풍경화가 되어 서울 가는 도로를 내내 쫓아왔다. 차창 밖 풍경화는 옛 시간을 되감아 틀어놓을 추억을 건져 주었다. 억눌렀던 속을 게워내 주었다. 그날의 연착은 전혀 불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멈춰진 차창 밖 풍경은 내게 깊은 위로였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재현되어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른바 ‘스트리밍’의 시대다. 현대의 우리들은 근대보다 더, 기술의 발달로 시간에 매여 산다.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고 심지어는 영상을 보면서 문서작업을 하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밥을 먹고, 화장실에서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쪼개고 겹치고 쌓아간다. 가끔 이렇게 애지중지 모아온 1분 1초를 쏟아버리고 하루종일 빈둥대고, 멍 때리는 일이 많은 걸 보면, 시간에 쫓겨 달아나다 금방 잡혀버리는 스스로가 우스워 허탈해진다.

고흐의 <회색 펙트 모자를 쓴 자화상>을 보면 멈추어 있으나 살아 있는 그의 영혼이 느껴진다. 동시에 이소라 7집의 <Track 8>이 재생된다. ‘죽은 그가 부르는 노래, 지난 이별이 슬프게 생각나. 간절히 원해. Wanna stay with you. Oh. Tonight.’ 쉬지 않고 빨리 뛰어야 하는 일상의 트랙에서 내가 쌓아온, 나를 만들어온 정지된 시간의 역사를 돌아본다. 이 시간만큼은 ‘시간’에서 자유롭다. 정지된 것은 응시하게 하고, 응시는 사유하게 한다. 그 잠잠한 침잠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진실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의외로 멈춰진 시간은 존재를 더 단단히 조인다. 고흐의 그림과 이소라의 노래가, 그리고 시골 국도의 풍경이 내게 생생히 다가왔듯이.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시구는 가끔은 멈춰서서 삶의 움직임을 성찰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편집 : 고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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