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창작국악극 페스티벌

“청년 실업, ‘헬조선’, 경기 침체….” 깜깜한 무대 위로 뉴스 보도 음성이 배경처럼 깔린다. 우울한 단어가 한참 귓전을 때리고 나서 무대가 밝아진다. 이어 젊은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판소리 가락.

“일제 강점기의 경성, 대한민국의 서울. 부르는 이름도, 시대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었으니. 자신들의 나라를 여전히 ‘조선’이라 부르는 것이며, 아늑한 가정에서 떨어져 나와 좁은 방에 기대어 살아가는 고된 청춘들이 많다는 점이다.”

▲ 29일 서울 남산골한옥마을 국악당에서 국악 뮤지컬 <자취생들>이 상연됐다. ⓒ 신혜연

‘헬조선’ 청년, 역사에 비춰볼까

지난 29일 저녁 5시, 서울 남산골한옥마을 국악당에서는 ‘창작국악극 페스티벌’ 두 번째 작품인 <자취생들>이 무대에 올랐다. 장르는 판소리와 현대무용을 결합한 ‘국악 뮤지컬’.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종종 듣곤 하는 ‘춘향전’ 속 그 구수한 가락이 피아노 반주, 연기, 무용과 어우러져 현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판소리 가락이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일반 뮤지컬이나 연극들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흥이다.

▲ 남산골한옥마을 국악당 입구에 세워진 창작국악극 페스티벌 입간판. ⓒ 신혜연

전통 가락이 젊은 관객들에게 생소하리란 우려는 기우다. 익숙한 주제 덕분이다. 오늘날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빠져보았을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연극의 뼈대를 이룬다.

서울 자취생인 ‘이경’은 작가를 지망하지만, 공모전에서 매번 미끄러진다. 희망을 잃고 우울해 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일제강점기 경성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자신의 시나리오 주인공인 여성 명창 ‘다올’을 만난다. ‘헬조선’ 청년 이경은 일제강점기 청년 다올의 꿈을 다독이면서 자신의 꿈을 다시 곱씹어 본다.

20대 청춘이 주인공인 데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실제로 배우들뿐 아니라 이날 객석을 차지한 관객 중에도 젊은 청년층이 많았다. 젊은 관객들은 이날 공연 덕분에 전통 판소리의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기분 좋은 고백을 토해낸다.

▲ 국악뮤지컬 <자취생들>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국악당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 신혜연

김주환(23) 씨는 “국악 사운드에 최근 시대상이 덧입혀진 게 좋았다”고 높은 점수를 매긴다. 김지희(20) 씨는 “창과 전통 악기로 현대적인 음악극을 만들었던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면서도 “단지 메시지가 좀 더 강했으면 완성도가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현장에서 전해지는 전통 악기의 매력 

무대 중심에는 가야금, 해금, 피리, 장구 등 전통 악기와 연주자들이 자리 잡아 생생한 현장 연주를 선보인다. 배우의 몸짓과 전통 악기로 만든 효과음이 딱 맞아 떨어지는 점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예컨대 주인공 이경이 과거로 돌아간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를 향해 내미는 손길을 슬쩍 피할 때 “띠잉~”하고 해금이 당겨진다. 주인공이 놀라는 장면에서는 “따닥”하는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 창작국악극 페스티벌이 진행되는 국악당 내부. 관객들이 표를 받기 위해 매표소 앞에 서 있다. ⓒ 신혜연

‘창작국악극 페스티벌’은 창작국악극을 발굴하고 창작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시가 후원하는 사업이다. 2013년부터 작년까지 8개 작품을 골라 57회 공연을 펼쳤다. 올해는 지난 4월 서류심사부터 시작해 면접심사를 거친 4개 팀을 뽑았다. 선발된 팀에는 최소 3,000만 원 ~ 4,000만 원의 창작지원금을 준다.

▲ 창작국악극 페스티벌이 열리는 서울남산국악당. 10월 2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개의 연극이 각기 2차례씩 상연된다. ⓒ 신혜연

페스티벌 취지에 맞게, 작품들은 전통적 가락과 현대적 색채의 조화를 잘 보여준다. <자취생들>의 양호석 연출가는 홍보 영상을 통해 “그동안 국악이 젊은 층의 보편적인 정서에 무관심했던 것 같다”고 창작 동기를 밝혔다.

<자취생들>은 동시대 청년들을 향한 ‘존경’의 메시지도 담겼다. “지금 청년들은 다 같이 힘들지 않나. 옆에 있는 친구 보면서 너도 나처럼 힘들구나, 존경스럽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해가는 게 청년들의 존경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양 연출가의 설명이다.

힘든 시대 살아가는 동시대 청춘 “존경합니다”

이경이 돌아간 시대는 일제가 1932년 만주 강점에 이어 1937년 중일 전쟁을 시작하며 식민통치가 혹독함을 더해가던 1938년. 아침이 오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독립을 7년 앞둔 이때는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펴 한민족의 정체성을 없애려던 시대였다. 조선 명창 다올은 자기 소리를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 홍보에 사용하려는 일본에 맞선다. 하지만, 당장 방값 낼 돈도 없는 처지. 작가를 꿈꾸지만, 빈털터리 이경의 신세와 판박이다.

▲ 국악뮤지컬 <자취생들> 상연이 끝나고 커튼콜이 진행되고 있다. 무대 중앙에 장구, 해금, 가야금, 피리 등 전통악기 연주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 신혜연

이경은 자신처럼 불안한 처지의 다올에게 위로를 건넨다. “너 나중에 대단한 명창이 된다. 네가 문화제가 되는 거야.” 이경의 말에 다올은 코웃음 친다. “농담도 말이 돼야지.” 독립이 7년 남았다는 말도, 꿈을 이루게 될 거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힘든 불확실한 상황. 알 수 없는 미래가 불안하지만, 오늘 하루에 충실할 뿐이다. 다올은 이경을 따라 미래로 가자는 친구의 말에 이렇게 입을 연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힘들 거야. 그런 거면 지금 소리 한번 질러봐야 하지 않겠어? 우리가 여기 있다고.”

“함께 해보자. 힘들고 지쳐도.” 국악극의 주제곡인 ‘사랑과 존경’은 연극 도중 여러 차례 반복된다. ‘세상 탓하지 말자’는 훈계보다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다독임이 <자취생들>의 감성에 더 와 닿는다.

이번 창작국악극 페스티벌은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사전예매를 받았으며, 서울시 후원으로 전석 무료다. 10월 26일부터 11월 6일까지 남산골한옥마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총 4개의 연극이 각기 2차례씩 상연된다. 11월 2, 3일에는 ‘희비쌍곡선’의 <어이하리 이내 마음은 오뉴월 버들마냥 스윙, 스윙>이, 5, 6일에는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경성 스케이터> 가 관객들을 기다린다. <어이하리 이내 마음은...>은 고전 <춘향전>을 재해석한 작품이고, <경성 스케이터>는 1936년 독일 동계 올림픽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나선 한 아버지의 도전기다.

이날 상연된 <자취생들>은 AK1525에서 후원하는 제1회 청춘 문화 후원 프로젝트로 선정돼 11월 11, 12, 13일 청담 유씨어터에서 유료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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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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