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신병주 교수 북촌 실록강의

아름드리 고목 한 그루가 세월의 무게를 이고 우뚝 솟았다. 나뭇잎들은 선선한 가을바람에 살랑이듯 잔물결을 일으켰다. 은은한 조명을 받는 고목 아래로 작은 연단과 의자 50여 개가 빙 둘러 놓였다. 특유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한 남자가 연단에 올랐다. 낯익은 얼굴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의 진행자 신병주 교수. 재치 있는 입담과 정확하고 객관적인 근거자료로 <역사저널 그날>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신교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관객의 눈과 귀가 열렸다. 지난 21일 밤 ‘북촌의 날’ 행사 중 북촌의 역사를 설명하는 ‘북촌 실록’ 강의가 열기를 뿜어낼수록 한옥마을의 가을밤도 그만큼 운치를 더해갔다.

▲ 북촌 실록 강의를 하고 있는 신병주 교수. ⓒ 고륜형

권문세가의 거주지 북촌

북촌은 예부터 권문세족의 거주지였다.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 풍수지리학적 특성상 4개의 골짜기가 생겨났다. 북악에서 흐르는 4개의 물줄기는 각각 삼청동 길, 가회동 길, 계동 길, 원서동 길로 나뉘었다.

독립 운동가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6형제가 살던 집도 북촌에 터를 잡았다.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 등 명성황후를 필두로 조선 말기를 풍미한 여흥 민씨 세력도 북촌에 살았던 점은 북촌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해방 이후 신식 한옥촌 형성, 강남붐 때 시련

해방 이후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북촌도 인구가 크게 늘었다. 주택업체들은 북촌을 구획 개발하면서 새로운 양식의 한옥을 대거 지었다. 전통 한옥에서 쓰지 않던 유리와 타일 등이 사용됐고 일본풍 한옥도 선보였다.

70년대 들어 강남개발로 구도심 공동화가 진행되면서 북촌의 인구도 줄었다. 학교와 공공시설이 대거 자리를 옮겨가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1976년엔 경기고가 이전한 자리에 정독도서관이 들어섰다. 78년 휘문고가 떠난 자리에는 현대건설사옥, 89년 창덕여고가 이전한 자리엔 헌법재판소가 자리를 틀며 아쉬움을 달랬다.

한옥과 신축 건물의 부조화는 경관을 훼손시켰다. 보다 못한 주민들과 서울시는 1999년 ‘(사) 종로북촌가꾸기회’를 조직해 새로운 북촌 가꾸기 정책을 다듬었다. 이전의 일방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반 삼았다.

관광명소 북촌 한옥마을... 화가, 건축가 등 예술가촌

한옥 등록제를 토대로 마을 가꾸기 공동체를 꾸렸다. 건물 내부에는 현대식 편의 시설을 갖춰 실용성을 높였다. 이렇게 2001년부터 시행된 한옥 정책은 15년이 지난 지금 하루 수천 명이 찾는 관광 한옥마을을 탄생시켰다.

▲ 북촌 한옥마을엔 주민과 방문객의 공존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 고륜형

현재 한옥마을은 삼청동 길, 가회동 길, 계동 길, 원서동 길을 따라 관광명소로 성가를 높여가는 중이다. 삼청동 길엔 쌈지 길과 많은 갤러리, 은행나무 골목이 자랑거리다.

가회동 길은 전통 매듭과 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공방촌을 이뤘다. 원서동 길에는 화가와 예술인들이 모여 산다. 단순 관광촌이 아니라 주민 삶의 터전으로 전통 주거문화를 간직하는 역할도 크다. 최근에는 건축가들도 북촌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어 역사적 깊이에 문화적 다양성이 돋보인다.

북촌 지역에는 경복궁과 창경궁을 비롯한 사적 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등 문화자산이 수두룩하다. 한양 도성을 넘어 성북동 쪽으로는 한용운 가옥 심우장도 탐방객에게 손을 내민다.

▲ 북촌 한옥마을 일대에 자리한 역사적 자산들. ⓒ 북촌 한옥마을 홈페이지

북촌의 미래는 관광객과 주민의 공존에 달려 있어
 

“북촌 지역은 성삼문이나 조광조와 같은 역사적 인물을 품고 있는 장소입니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를 개발한다면 북촌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병주 교수는 한옥마을의 미래를 밝혀줄 컨셉으로 ‘공존’을 꼽았다. 지난 4월 주민들이 이화동 벽화 마을의 상징 격인 해바라기 계단과 잉어 계단을 지운 사건을 예로 들었다.

2006년 정부와 지자체, 예술가들이 힘 모아 도시재생 우수사례로 꼽혔던 이화동 벽화 마을이 갈등으로 점철된 이유가 ‘공존의 부재’라는 지적이다. 아울러 주민들이 겪는 소음 같은 공해에 아랑곳하지 않는 지자체의 불통 행정도 한몫 거들었다고 꼬집는다.

북촌 한옥마을의 발전은 주민과 서울시의 대화를 통한 관광객과 주민의 공존 여부에 달렸다고 잘라 말한다.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민의 실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주민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 북촌 한옥마을 일대. ⓒ 고륜형

서울시 도로명 사업과 관련해서도 역사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한 신 교수는 “결국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강연이 열린 원서동 고희동 가옥 역시 최초의 서양 화가였던 고희동 선생의 숨결이 어린 곳이다. 역사와 현재가 교차되는 장소에서 미래를 더 잘 그려보자고 머리를 맞댄 의미가 크다.

“조급해 하지 말고, 전망을 갖고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북촌을 개발해야 한다”는 신 교수의 마무리 말처럼 관이나 상인, 주민, 관광객 모두가 후손을 먼저 생각한다면 전통을 간직한 북촌 한옥마을의 미래가 한층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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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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