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남산 ‘기억의 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은 걷기 좋은 계절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궁부터 최신 문화 시설까지 관광명소가 즐비한 서울에서, 시민들은 주말 나들이 장소를 정하느라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남산공원은 시민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진다. 남산을 찾는 중국 관광객도 해마다 늘어 수천 명을 훌쩍 넘는다. 서울의 관광 명소, 남산공원 입구에 조금 특별한 공간이 들어섰다. 지난달 29일 제막식을 가진 ‘기억의 터’에 다녀왔다.

▲ 남산공원 입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기억의 터’가 보인다. ⓒ 신혜연

시민 성금으로 만든 위안부 기억의 공간

기억의 터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기리고, 지난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에서 서울시와 시민사회가 함께 만들었다. 지난 2015년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기억의 터 디딤돌 쌓기’ 국민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시민 1만 9,755명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았다. 3억 4천여만 원의 적지 않은 성금이 주춧돌을 놓았다.

▲ 기억의 터 구석에는 성의를 건넨 시민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 신혜연

충무로역 4번 출구로 나와 5분 남짓 걸으면 남산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접어들면 기억의 터에 이른다. 맨 처음 눈길을 사로잡는 건 기억의 터 안내문. 기억의 터 지형도와 함께 조형물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에 전체 그림이 그려진다.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한 할머니들

안내문을 지나면 사람 눈 모양을 본뜬 작품 ‘대지의 눈’이 탐방객을 맞는다. 대지의 눈 안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겪어온 지난 70여 년의 삶이 애절하게 담겼다.

▲ 기억의 터에 마련된 ‘대지의 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역사가 담겼다. ⓒ 신혜연

"내 나이 12살, 언니와 나물을 뜯는데 차가 오더니 모자 쓴 사람들이 차를 타라고 했다. 둘이 끌어안고 버텼더니 나를 발로 차버리고 언니 머리채를 쥐고 차에 태웠다." 일본군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국에서 여성들을 이런 식으로 잡아다 성노예로 부렸다. 12~16세 사이 어린 소녀들을 말이다.

기억의 눈은 천인공노할 일제 만행에 억눌린 할머니들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담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순간부터, 폭력 아래 강제로 군인들을 받아야 했던 끔찍한 삶, 생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려고 도망쳤다 잡혀 죽음 직전까지 갔던 아픈 사연들이 한 자 한 자 눈물로 새겨졌다. 배경 그림은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이 자리 잡아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 ‘대지의 눈’에 새겨진 故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감’. ⓒ 신혜연

‘살아서 못 나간다.’고 절망하던 소녀들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위안부 피해자’로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공개증언에 나서면서 아픔을 딛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주체로 우뚝 섰다. 기억의 눈에는 해방 이후에도 핍박받던 할머니들이 반세기 만에 침묵을 깨고 공개증언에 나섰던 일. 수요시위를 하며 나비기금을 모은 일. 인권 운동과 평화운동에 앞장서게 된 일이 생생하게 적혀 역사를 되살린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거리에 서고, 먼 나라까지 우리 문제를 알리러 갑니다." -김현옥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히는 것입니다.“ 기억의 눈 가운데 크게 박힌 이 문구가 최근 위안부 문제를 서둘러 망각의 늪으로 던져 버리려는 한일 정부의 행태에 쩌렁쩌렁한 경고를 울린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부분에선 역사의 증인으로 나선 할머니들의 의연한 결기가 느껴진다. 긴 역사를 읽고 나니 치켜뜬 ‘대지의 눈’이 마치 편히 눈감지 못한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현재 살아계신 할머니는 불과 마흔 분. 이분들이 떠나시기 전 바른 역사를 세울 수 있을지.
 
치욕의 역사를 넘어서

‘기억의 눈’을 지나면 ‘통감관저터’ 비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기억의 터는 본래 ‘통감관저터’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설치한 식민 통치기구 통감부의 책임자인 통감(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 거주하던 곳이다. 1910년 이완용이 ‘한일 합병조약’에 서명했던 치욕의 경술국치 장소다. 서울시는 “‘치욕의 공간’이 한 세기 만에, 시민 참여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의 터 제막식을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에 맞춰 연 것도 그런 맥락이다.

▲ 1910년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통감관저’가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통감관저터’ 비석. ⓒ 신혜연

길을 따라 걸어가면 ‘세상의 배꼽’으로 이어진다. 봉긋 솟은 유선형 언덕이 둘러싸고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델포이 파르나소스산 아폴론 신전 신탁소에 만든 세상의 배꼽(옴파로스)을 닮은 듯 둥근 ‘세상의 배꼽’ 돌은 원 모양으로 솟은 언덕 가운데 자리 잡았다.

▲ 둥근 언덕으로 둘러싸인 ‘세상의 배꼽’은 평화를 상징한다. ⓒ 신혜연

평평한 돌 위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가 한글, 일본어, 영어, 중국어 4개 국어로 적혀있다. 세상의 배꼽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전국에서 모은 돌들을 놓았다. 이 돌은 전 세계에서 동정과 지지의 마음을 모아온 할머니들과 국민을 뜻한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이다.

‘소녀상 치우라’는 일본에 맞서

지난 8일 한일정상회담 이후 일본 언론은 한국 정부가 일본의 소녀상 철거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내 일본공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오던 터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 시민사회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만든 동상으로 정부가 손댈 수 있는 성격이 아닌데도 말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소녀상 옆에서 열리는 ‘수요시위’는 올해로 24년째를 맞아 세계 최장기 집회로 기록됐다.

“묻혀둘 일이 아니지. 내가 그거 당하고 나서 심장이 안 편타고. 내가 청춘을 거기다 다 바쳤는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위안부’ 할머니 증언록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 나오는 김창연(가명) 할머니의 말이다. 서울시는 이번 기억의 터 조성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인권 이슈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을 기리고 기억하는 공간조차 없다는 현실에서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거꾸로 가는 느낌의 한일 외교정세 속에, 서울 도심 한복판 남산에 자리 잡은 추모공간 ‘기억의 터’가 정의의 등불처럼 빛난다.

▲ 시민들이 남산에 자리 잡은 ‘기억의 터’를 지나고 있다. ⓒ 신혜연

이 기사는 서울시의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 '내 손안에 서울' (http://mediahub.seoul.go.kr/) 에도 실립니다. 

편집 : 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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