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작가

서울시 중랑구 망우1동 산 57번지. 망우리 공원이 있는 곳이다. 서울 청량리에서 경기도 구리·남양주시 방면 51번 버스를 타고 ‘딸기원 서문’ 정류장에서 내리면 인적이 드문 철물 공장이 먼저 보인다. 이정표도 없는 진입로를 따라가면 시큰한 풀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그제야 묘비와 무덤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인 박인환과 한용운, 아동 문학가 방정환, 화가 이중섭,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조봉암… 격동의 근대사를 살다간 영혼들이 이름 모를 많은 이들과 함께 이곳에 잠들어 있다.

김영식(53) 작가는 망우리 공원에 묻힌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 지난 2009년 <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펴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망우분과위원장으로서 매월 말 망우리 공원 답사를 겸한 인문학강의도 하고 있다. 지난 6월 1일 서울 선릉역 부근 한 식당에서 김 작가를 만나 ‘공동묘지’에 주목한 사연을 물었다.

▲ 김영식 작가가 망우리 공원에 묻힌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그와 나 사이를 걷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민수아

대학 시절 마음에 담은 묘지, 20년 만에 다시 찾다

부산에서 태어나 4살 때 서울로 이사한 김 작가는 망우리 공원에서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는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미쓰비시 상사의 서울지점에서 1999년까지 근무하고 작은 사업체도 경영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느껴 뒤늦게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002년 계간 <리토피아>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기러기>, <라쇼몽>, <무사시노 외>, <조선> 등 일본 문학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수필가가 된 후, 그는 대학 시절 우연히 찾아갔던 망우리 공원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달밤에 희끗희끗한 무덤만 보였던 그곳은 20여 년간 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냥 보통 사람의 비석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의 묘에 부모가 남긴 비석이었는데요. ‘바람이 불듯 구름이 흘러가듯 너는 우리 가슴에 남아 있으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열여섯인가 열일곱에 죽은 아들에게 전하는 내용이었는데 가슴이 뭉클했죠. 또 어떤 비석은 돌이 아니라 나무에 까만 페인트로 ‘아버님 잠드신 곳’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글씨가 바래서 잘 안 보였죠. 돌로 된 비석을 세우지 못한 아들의 심정을 상상하면 가슴 아프죠.”

다시 찾은 망우리에서 그는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써나갔다.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들에 대한 사료를 조사하고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와 후손들이 전하는 사담(私談)도 담았다. 박인환, 한용운, 방정환, 이중섭, 조봉암과 역사학자 문일평 등 50여 명을 재조명했다.

▲ 김영식 작가의 저서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제목의 휘호는 고 신영복 선생이 써주었다. ⓒ 호메로스

가장 알리고픈 인물은 독립운동가 박찬익

망우리에 묻힌 인물 중 김 작가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인물은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남파 박찬익(1884~1949)이라고 한다.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과 의정원 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이듬해 서울에서 병사했다.

“국립묘지로 이장되셨지만, 비석을 보면 조지훈 시인이 쓴 글인데 비문의 마지막에 상당히 감동적인 글이 새겨져 있어요.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여 지사의 뜻이로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사 백일이 비치리라.’ 묵묵하게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진정한 지사의 모습을 지닌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다 한 삶이어서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고 강조한 김 작가는 “그를 가장 열심히 알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작가는 또 망우리 무덤의 비석 가운데 화가 이중섭(1916~1956)의 묘 옆에 놓인 그의 조각 작품을 특별히 소개했다. 두 아들이 껴안고 있는 모습에서 가족에 대한 고인의 사랑이 드러나 좋다고 말했다. 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비문도 각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어여간 나의 마음 가르어간 나의 몸’인데, ‘어여간’은 ‘가슴이 에이다’는 뜻이고 ‘가르어간’은 ‘잘라간’을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자식 잃은 부모의 애절한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비문이다.

▲ 이중섭의 두 아이 그림이 새겨진 조각 묘비. ⓒ 민수아

매달 한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며 자료 수집

그는 책을 내기에 앞서 월간지 <신동아>에 ‘망우리 별곡’을 연재했다. 매달 한 사람에 대한 글을 썼는데 한 달 내내 그 사람만 생각하고 자료를 찾았다고 한다. 3월에는 시인 박인환(1926~1956), 4월에는 총독부 산림청 직원이자 조선공예연구가였던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5월에는 아동 문학가 방정환(1899~1931) 하는 식으로. 이렇게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 과정이 모두 큰 소득이었다고 김 작가는 덧붙였다.

망우리 공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 작가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책에 쓰기 위해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묘를 어렵게 찾았다가 권 선생의 작업실 ‘권진규 아틀리에’를 관리하던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알게 된 것이다. 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해서 보호하는 운동이다. 김 작가는 201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관한 ‘꼭 지키고 싶은 우리 문화유산’ 공모에서 망우리 공원을 ‘근현대사와 문화의 체험 공간’으로 제안해 산림청장 상을 받았다. 그는 이를 계기로 내셔널트러스트의 망우분과위원회를 맡아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지난 4월 30일 망우리 공원에서 인문학강의를 진행하는 김 작가. ⓒ 민수아

앞으로도 우리 근현대사의 인물들을 발굴해서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는 망우리 공원이 문화재로 지정됐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망우리 공원은 2015년 서울시가 지정하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한용운의 묘를 제외한 역사 인물들의 묘역은 문화재 지위가 없어 유족 또는 기념 단체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근현대 역사 인물에 대한 예우가 소홀해 망우리 공원에 있는 역사 인물 묘의 이장이 줄을 잇고 있다”며 “망우리 공원에 안장된 주요 인물의 묘를 등록문화재로 승격해 관리부실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작가는 “고인의 상징과 말을 비석을 통해 가장 깊이 접할 수 있으므로, 무덤이야말로 문화재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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