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애국심'

▲ 박찬이 기자

대학 취업캠프 3일째, 주제는 ‘취업 스펙’이었다. 취업한 선배 여자들의 학점과 남자들의 학점이 공개됐다. 여자들이 최하 3.7 정도인데 남자들은 2점대도 있었다.

"여성들이 취업하기 힘들죠. 근데 이유가 있어요. 공부 잘하는 여학우들이 회사에서 공주처럼 행세한다든가 해서 이미지를 깎아먹는 것 같아요."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취업을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라서.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취업이 시들해졌다. 여자로서 최고라는 교육대학도 거들떠보지 않고 더 큰 꿈을 꾸려 일반 대학에 진학했는데, 현실은 찬바람이었다. 여성의 핸디캡을 벗으려면 운동부 경험을 강조하는 등 강한 체력을 부각시키라는 조언을 들었다. 남자 동기들은 아직 군대에서 제대도 하지 않은 때였다.

언론은 ‘청년살이’를 여러 각도에서 이슈화했다. 각기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남자를 기준으로 취업과 생활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불편했다. 청년이란 남성뿐인가? 남성과 여성은 취업시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없는 존재다. 여성 임금차별은 청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며, 취업 문턱에서도 남자가 스펙이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나돈다. 다른 출발선상에 있는 두 대상을 나잇대가 같다고 해서 한 번에 뭉뚱그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고난을 겪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남성의 처지를 토로하는 목소리에 여성인 내가 억지로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이해는 가장 정치적인 문제다.

권력에 대한 로버트 달의 명제는 ‘A가 B에 대해서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시킬 수 있을 때 A는 B에 대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A는 언론이자, 청년 남성이다. B는 청년 여성이다. ‘청년살이’ 기사에서 여성들의 취업 애환을 공감하는 남성이 없는 이유는 언론과 청년 남성이 청년 여성에게 입을 다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 구직 시장에 나온 청년들. ⓒ flickr

일베 사이트 논란 당시, 대부분 언론의 분석은 대량실업 사회에서 남성들의 좌절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서술했다. 일베의 주요 논리는 또래 여성 혐오다. 권력의 강요를 거부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다. 일베는 그것을 마치 ‘표현의 권력’이나 있는 것처럼 마구 행사했다. 일베들이 사이트를 만들고 나설 때 여성은 뭘 했는가? 남성보다 더 높은 학점과 더 좋은 스펙을 가져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취업준비 스펙을 쌓았다.

고용의 성차별에는 자본의 의도가 숨어있다. 자본이 원하는 젊은 남성의 노동력을 노동시장에 흡수하기 위해 취업연령 제한이 생겼고 늦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 연공서열제가 만들어졌다. 여성의 취업 애환은 자본이 선택하지 않으려는 노동력이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지식노동이 부각되면서 여성과 남성의 체력 차이가 노동력에 미치는 범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자본이 안정적으로 높은 노동력을 얻기 위해 어떤 계층을 무시하는 행위는 사회적 차별을 낳는다.

여성들은 자본과 남성 취업준비생을 더 두둔하는 언론의 영향력에 순종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의 무게 때문이다. 탈조선 청년들이 이민을 준비한다는 기사가 많은데, 원조는 외국어를 좋아하고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여성들이었다. 여성이 외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이미 한국은 자기 꿈을 펼치기에는 틀렸다는 자각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여성들은 지금의 탈조선 청년보다 더 많이 더 먼저 피해와 차별을 겪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아직 국회에 계류중이다.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지역, 민족, 언어, 인종, 피부색,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를 차별하지 않고 정치경제사회 모든 생활에서 동등함을 보장한다는 법이다. 이해에도 차별이 있다는 사실, 사회문제화하는 영역에도 차별이 있다는 사실은 이 법이 한국사회에 가져올 영향력을 예상하게 한다. 무시받고 차별받는 누군가의 애국은 이런 차별이 해소되는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가능해질 것이다. 청년 여성 일자리 정책보다 차별금지가 먼저다. 남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권력 없는 여성들은 최소한 능력만큼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애국은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돌려주는 곳에서나 가능하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강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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