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서 읽는 언론 윤리

“허섭스레기를 쓰기 전에 정확한 자료를 찾아.”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서 주인공 칼 매카프리가 블로그 기자인 델라 프라이에게 던지는 일침이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는 기자를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기레기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저널리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을 말한다.

‘기레기’라는 말이 널리 퍼진 시점은 세월호 참사 직후다. 승객 전원 구조라는 대형 오보, 희생자와 유가족을 헤아리지 않는 과열된 취재경쟁, 정치적 이슈로 만들기 위한 왜곡보도 등이 ‘기레기’라는 말을 낳게 했다. 지금도 정치적 편향이 강한 기사나 어뷰징, 베껴 쓰기, 낚시 기사에는 ‘기레기’라는 댓글이 달린다.

‘불륜 스캔들’이 된 정치 비리 사건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 등장하는 기자들도 한국의 ‘기레기’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한 여성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계 음모를 취재하던 기자 칼이 스타 정치인이 살인 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간파하고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내용의 정치스릴러다. 2003년에 방영된 BBC 인기 동명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 영화 ’본 시리즈‘의 시나리오 작가인 토니 길로이가 각색에 참여하고 러셀 크로우와 벤 애플렉이 주연을 맡았다.

▲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포스터. ⓒ 공식 포스터

영화에서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의 보좌관 소냐는 지하철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스티븐은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떨군다. 이 모습은 TV를 통해 생중계된다. 중계를 보던 워싱턴글로브의 한 기자는 “그녀와 잤다는데 50달러를 건다”고 말한다. 또 다른 기자는 “뚱보가 아니길 빌자”며 여자의 사진을 구해올 것을 지시한다. 거대 방위산업체인 포인트콥의 비리를 파고들던 정치인 보좌관이 석연치 않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불륜’과 ‘미모’였다.

다른 기자들도 스티븐과 보좌관의 은밀한 관계를 자극적인 문구로 알리기에 여념 없다. 스티븐이 소냐의 사망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스티븐이 배신해서 불륜관계였던 보좌관이 자살했다’는 추측보도가 난무하고, 소냐 룸메이트의 거짓 증언에 대한 검증도 없이 ‘삼각 섹스 스캔들’이란 기사가 실린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자극적인 추문에 포인트콥과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은 뒤로 밀려난다.

▲ 소냐의 사망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스티븐이 배신해서 불륜관계였던 보좌관이 자살했다고 추측 보도하는 언론. ⓒ 영화 갈무리

반면 스티븐의 대학 친구이자 워싱턴글로브 기자인 칼은 사건 배후에 포인트콥의 음모가 자리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사건의 단서를 잡은 칼은 인터넷 담당 신입 기자인 델라와 함께 진실에 접근한다. 취재과정에서 칼은 “기자의 품격보다 판매 부수가 더 중요하다”는 편집부와 갈등한다. 칼은 “진짜 기삿거리는 포인트콥”이라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편집장은 이에 개의치 않고 8시간 안에 기사를 출고하라고 압박한다. 칼은 마감 압박에도 확인취재 원칙을 지켜 살인사건에 하원의원 스티븐이 연루된 사실을 밝혀내 1면 헤드라인으로 쓴다.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취재는 정당한가

주인공 칼은 숨겨진 비리를 파헤치고 불의에 항거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기자다. 그는 사실을 과장하지 않고 가십을 외면하며 끝까지 ‘팩트’를 쫓는다. 작은 의심거리도 허투루 봐 넘기지 않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마감을 앞두고도 의심 가는 것이 있으면 특종 기사일지라도 “기사전송 보류”를 외치며 현장으로 달려간다. 칼은 특종 경쟁과 자극적인 보도를 일삼는 미디어들과 달리 신뢰와 진실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칼이 책상에 둔 ‘편집장을 믿지 마라’는 글귀는 그의 직업 정신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칼은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기자상을 보이지만, 그의 취재 방식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취재윤리의 문제를 드러낸다. 그는 마감 시간을 앞두고 소냐의 친구이자 포인트콥의 로비 회사 직원인 도미닉을 만난다. 시간에 쫓긴 칼은 “포인트콥과 긴밀한 인물로 소냐의 죽음에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의 이름을 실어 기사를 낼 것”이라고 협박한다. 기사에 거론되면 포인트콥에게 살해될까 봐 두려운 도미닉은 칼에게 협조한다.

칼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도미닉을 모텔 방으로 데려와 심문하듯 인터뷰하며 엔지니어를 동원해 이를 몰래 촬영한다. 도미닉은 약에 취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신문윤리강령 제2조는 “기자는 취재를 위해 개인 또는 단체를 접촉할 때 필요한 예의를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또는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기자는 취재를 위해 개인을 위협하거나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 엔지니어를 시켜 몰래 촬영한 도미닉과의 대화를 스티븐에게 보여주는 칼. ⓒ 영화 갈무리

익명으로 처리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온 도미닉은 녹화되고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MBC 윤리강령은 “취재원에 촬영 사실을 숨기는 몰래카메라는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 보호를 침해하는 등 실정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으므로 몰래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탐사형 고발 프로그램이나, 단체·기업·정부 등의 비리를 폭로하고 감시하는 프로그램, 기타 중대한 공익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여기에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대체 수단이 없는 경우’라는 단서가 붙는다.

거대 군수업체의 비리를 파헤치고자 한 칼의 취재는 공익에 부합한다. 하지만 몰래카메라 이외에 다른 대체 수단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기사가 나간 이후 도미닉이 부인하는 경우를 우려했다면 제삼자를 동원해 녹화할 필요 없이 칼이 직접 녹음할 수도 있다. 현행법에서도 전화를 포함해 당사자가 들어간 녹음은 합법이지만, 타인 간의 대화를 녹취하면 불법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칼은 엔지니어들에게 도미닉과의 대화를 몰래 녹화하게 한다. 사건 당사자인 스티븐을 불러서 몰래 촬영한 영상을 보여 주고 격한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기까지 한다.

친구를 취재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칼이 친구 스티븐을 대상으로 하는 취재에 참여해도 되는가는 문제도 제기된다. 소냐의 사망 사건 배후에 포인트콥의 음모가 있음을 직감한 칼은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스티븐을 찾는다. 스티븐은 “친구로 묻는지 기자로 묻는지”를 물었고 칼은 “둘 다”라고 대답한다. 칼은 공익을 위한 보도를 추구하는 동시에 친구의 누명을 벗기겠다는 동기를 보여준다. 소냐를 죽인 것은 포인트콥이 아닌 스티븐이 소냐를 미행하라고 한 남자였다. 그러나 칼은 친구가 범인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취재를 이어간다.

▲ 소냐를 죽인 배후를 아느냐는 칼의 질문에 “친구로 묻는 건지 기자로 묻는 건지” 되묻는 스티븐. ⓒ 영화 갈무리

신문윤리실천요강 14조는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본인, 친인척 또는 기타 지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거나 다른 개인이나 기관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취재원과 이해관계가 있으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취재 보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법관들도 제척사유가 있으면 사건을 맡지 않는다. 친족이나 과거 이해관계가 관련된 경우에 피고인과 변호인도 기피 신청을 할 수 있고 법관 자신도 안 맡겠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칼이 법관처럼 공정하게 보도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빠지는 것이 윤리적인 태도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스티븐이 범죄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범죄 사실을 알고 찾아온 칼에게 스티븐은 “신문도 잘 안 팔리는 요즘 특종이라고 해도 며칠 안 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것”이라며 조롱한다. 칼은 신문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스티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난 믿어. 독자들은 진실이 담긴 기사와 쓰레기 기사를 구별하리라는 걸. 누군가는 진실을 써주기를 원할 거라고.” 영화는 잃어버린 기자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확인취재와 취재윤리도 중요하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델라가 “큰 사건은 신문으로 읽어야 제맛”이라고 한 말은 ‘기레기’ 시대에 사는 대중들도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편집 : 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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