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수상작/첨삭후기

[제시어] ‘청년’
[수상작] 우수상

    <’청춘예찬’의 허망한 귀결> 김명진 (전북대 졸업, 저널리즘스쿨 입학예정) 
    <내가 사랑한 ‘특수고용 비정규직’> 김소영 (성균관대 4학년)
    <일가족 ‘야반도주’가 부러운 나라> 박고은 (저널리즘스쿨 1학년)
    <호밀밭의 파수꾼과 한국의 청춘> 오소영 (저널리즘스쿨 1학년)
    <청년 문제를 호도하는 논리들> 전하경 (이화여대 졸업)
    <청년 문제, 노인이 해결해줄까> 황금빛 (숙명여대 졸업, 저널리즘스쿨 입학예정)

1월 중순 열린 ‘제12기 언론인을 꿈꾸는 대학언론인 캠프’ 이후 보내온 칼럼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들이 같은 제시어로 써낸 1주차 방학특강 과제 중에서 6편을 골라 시상하고 <단비뉴스> [상상사전]에도 올리겠습니다.

수상자에게는 격려의 뜻으로 작으나마 책을 한 권씩 선물하겠습니다. 수상자는 내가 읽히고 싶은 아래 책들 중 한 권 또는 꼭 읽고 싶은 책을 메일(hibongsoo@hotmail.com)이나 전화(010-9005-5680)로 알려주십시오. 주소를 알려주면 인터넷서점을 통해 직접 보내겠습니다.

수상작은 첨삭본을 열어보면 잘못된 글쓰기 습관이 무엇인지 드러나 있을 겁니다. 수상작이 아닌 칼럼은 첨삭본을 필자에게만 메일로 보냅니다. 여러분 글에 나타나는 공통의 문제들을 더 자세히 파악하려면 과거 ‘피투성이 백일장’ 첨삭후기들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선물하고 싶은 책]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강준만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이상헌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 헬렌 토머스
<진보의 몰락> 크리스 헤지스
<거룩한 코미디> 곽영신
(그밖에 꼭 읽고 싶은 책)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언론인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이 '청년'과 ‘가계부채’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 손은민

 

 
식상한 주제도 참신하게 쓸 수 있다

[첨삭후기] 이봉수 교수

이번 캠프 칼럼쓰기 제시어는 '청년'이었는데, 자신들의 문제임에도 어렵게 생각한 탓인지 응모작이 아주 많지는 않아 저널리즘스쿨 재학생으로 응모대상을 확대했다. 예비언론인이 갖춰야 할 사고력과 필력을 꽤 갖춘 글도 있었지만 아직 직업으로서 언론인이 되기에는 상당히 미흡한 글이 다수였다.

사고의 틀이 참신하지 못하거나 글에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문법 오류도 잦아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된 글이 많았다. 수상작 중에도 비슷한 증세들이 나타났으나 발상이 아까워 수상작에 끼워넣은 글이 있다. 수상작의 참신한 발상을 엿보는 일은 <단비뉴스>에 연재될 [상상사전]에서 하기 바란다, 이 후기가 '스포일러'는 되지 않아야 하겠기에.

여기서는 '청년'이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청년’이라는 말은 사실 식상한 단어일 수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나온 이래 여건은 갖춰주지 않고 노력만 강조하는 기성세대에 반감을 표출한 글이나 책도 적지 않게 나왔다. 응모작 중에도 그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글이 많았다.

이번 주제에 대한 응모작이 많지 않은 이유도 ‘또 청년인가’ 하는 반감이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청년 문제는 식상한 것이라 해서 덮어두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주제다. 정치학자 바크라크(Bachrach)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은 ‘Non-issue, Non-decision’의 사회다. 제대로 이슈화가 되지 않으니 아무것도 결정되는 게 없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양극화, 청년실업, 토지·주택·재벌·인권 문제 등 수많은 이슈들이 떠올랐지만 정치와 정책을 통해 개선된 것이 거의 없다. 이슈들은 풍선처럼 공중을 떠돌다가 결국 바람이 빠진 채 사라졌다. 한국사회의 숱한 문제들이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된 결과 ‘헬조선’이 탄생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새해 들어 진보·중도언론이 다시 청년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점이다. <한겨레>가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경향신문>이 창간 70주년을 기념해 ‘부들부들 청년’이라는 심층기획보도를 시작한 것이다. <한국일보>도 ‘한·중·일 청년 리포트’를 내보냈다.

그럼에도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은 ‘오피니언 저널리즘’에 유독 약한 한국 진보언론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영국의 <가디언>이 진보매체이면서도 영국 주류사회를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10여만부밖에 안 나가는 작은 신문 <인디펜던트>가 ‘식상한 주제’인 지구온난화 문제를 어떻게 세계적 이슈로 만들어냈는지 여기서 길게 설명할 여유는 없다.

다만 시리즈와 칼럼을 내보내는 것은 의제설정의 부분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싶다. 저널리즘이 아카데미즘과 다른 점은 진실과 함께 전달을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내용에 해당하는 ‘의미’와 함께 전달방법에 해당하는 ‘재미’를 추구하는 노력이 부족한 게 우리 진보언론의 한계다. 시각화와 영상에 기울이는 노력도 매우 부족하고 참신성도 떨어진다.

독창적 글쓰기··· 네 가지를 염두에 둬라

글을 쓸 때도,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도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게 독창성이다. 어디서 본 듯한 글을 읽고 식상하지 않는 독자가 있을까? 작가(Author)의 어원은 희랍어로도 ‘원본(Authentikos)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천재가 아니라면 순전히 독창적인 것을 만들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화가 고갱도 ‘예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라고 했을까? 모방도 독창적으로 하면 된다.

가령 ‘진박’과 ‘친박’이 싸우는 대구·경북지역의 공천다툼을 처음으로 ‘TK목장의 결투’라고 표현하면 그건 독창적이다. 버트 랭커스터와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한 케케묵은 50년대 영화 ‘OK목장의 결투’를 모방했지만 패러디로 재탄생했으니 창작이다.

독창적이고 감성 넘치는 글을 쓰려면 다음 네 가지를 염두에 두는 글쓰기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 사물의 본성이나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직관(Intuition), 언어에 대한 성찰(Introspect), 장소와 역사에 대한 기억(Memory),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Personalization)이 그거다.

여기서는 ‘청년’이라는 언어에 대해서만 잠시 생각해본다. 지시어 속에는 대개 지시물의 본성이 들어있다. '청년'의 순우리말은 ‘젊은이’고 형용사 ‘젊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노년’이나 ‘노인’의 순우리말은 ‘늙은이’인데 동사 ‘늙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청년과 노인이란 말의 원형이 왜 형용사와 동사로 서로 다를까?

알다시피 형용사는 사물의 성질이나 모양새를 말하고 동사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젊다’는 건 잠시 멈춘 순간이기에 형용사로 표현되고 ‘늙다’는 건 늙어가는 과정을 중시해 동사로 표현된 건 아닐까? 그래서 젊은이는 지금 이 순간을 중하게 여기지만 늙은이는 과거를 중시하고 늙어가는 걸 아쉬워하는 건 아닐까? 이론에 맞는지 확신을 갖고 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이론에 얽매이지 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잠시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다.

백일장 응모작 중에는 ‘O포세대’를 설정한 뒤 그 이유를 지루하게 나열한 글이 많았다. ‘O포세대’ ‘88만원세대’ ‘달관세대’ 등은 사실 오늘의 청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나 언론이 만들어낸 용어일 혐의가 짖다. ‘88만원세대’는 우석훈·박권일이 만든 말이고, ‘달관세대’는 일본의 ‘사토리세대’에서 시작된 말이다. 일할 의욕도 없이 무기력해진 청년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경멸적 시선도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청년들이 만들어낸 듯한 ‘헬조선’과 ‘금수저·흙수저’에는 한국의 모순이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라는 인식과 저항의지가 담겨있다. 언어를 구사할 때 기성세대의 언어가 아니라 청년의 언어를 사용해야 말하는 청년에게 힘이 실린다. 인디언 속담에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치의 알’을 안에서 깨려고 애써봤나

응모작들을 보면서 또 거슬린 점은 청년 문제의 원인을 대부분 외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헬조선’을 기성세대가 만든 건 사실이다. 특히 한국의 정치와 언론은 끊임없이 청년을 도구화한다. 선거 때마다 신년기획을 할 때마다 정치와 언론은 청년을 불러내지만 대개 기득이익을 강화하는 데 동원된다.

끊임없이 정치를 혐오스런 것으로 가르치고도 투표율이 낮다고 청년을 비난한다. 그리고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 권력의지를 다져온 이준석과 손수조처럼 ‘청년답지 않은 청년’을 상징조작을 위해 정치권이 영입한다.

청년은 기성세대만의 정치를 비판하고 스스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꼭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것만이 정치참여는 아니다. 청년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정당에 가입하거나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집회에 나가는 것도 정치참여다. 진보적인 사회를 만들어간 유럽의 노쇠한 진보정당들도 초기에는 청년이 주축이었다.

청년들이 각자도생으로 서로 경쟁만 해서는 ‘헬조선’ 상황을 바꿀 수 없다. 기성세대에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한편으로 스스로도 세력화하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줄탁동기’(啐啄同機)란 말은 새의 새끼와 어미가 알의 안팎에서 동시에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말한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움직임이 없을 때 어미도 새끼가 죽은 걸로 간주하고 쪼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학이 발달해 사회가 보수화한다는데…

누구나 쓰는 총론에 머문 글이 많았던 점도 지적해야겠다. 가령 위에 쓴 것처럼 청년의 정치참여도 촉구만 할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막혀있는 점들을 지적하며 한걸음 더 들어가면 어떨까? 노인의 이익이 과도하게 대변되는 이유로 선거연령이 너무 높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버트런드 러셀은 ‘의학이 발달하면서 수명이 연장돼 사회가 보수화한다’고 썼다.

물론 노인의 선거권을 박탈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거연령이 만 19세 이상으로 지나치게 높은 점은 청원운동을 벌여서라도 시급히 바꿔야 한다. 전세계 대부분 국가는 선거연령이 만18세 이상으로 돼있고, 오스트리아와 쿠바 등은 16세, 북한은 17세로 돼있다. 우리 청년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도 노인 못지않게 성숙된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좀 미성숙됐더라도 고등학생 때부터 정치를 가르치면 된다. 유럽에서는 중·고교 수업에서 현실정치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실질적인 정치교육이 이뤄진다.

피선거권도 국회의원은 물론 지방의원도 만 25세 이상으로 돼 있어 청년의 정치참여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4년마다 선거가 있으니 최악의 경우 우리 나이 서른이 돼야 지방의원이라도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독창성을 살리는 방법 중 하나는 총론이 아닌 각론으로 들어가는 거다.

기존 문제는 기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기존 방법이 옳았다면 문제는 이미 해결됐을 테니까. 글쓰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발상의 전환이다.


편집 : 이명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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