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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60분' 한국 심층탐사의 문을 열다

기사승인 2016.01.09  19: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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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방송구술사] 한국 탐사보도의 기원

   
▲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대담: 이상요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장윤택 1983년 당시 <추적 60분> 제작팀장.

우리나라 방송 역사는 1947년 9월 3일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우리나라 독자적인 호출부호 HL을 국제통신연맹(ITU)으로부터 할당받은 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방송이 방송다운 모습을 세우기 위해서는 몇 가지 화두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첫 번째 화두는 방송이 어떻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제대로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해방 후와 전쟁기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를 거치면서 방송은 최근까지도 선전, 홍보, 지배 도구로 활용되었다. 사람의 진정한 삶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두 번째는 저널리즘의 길을 제대로 찾는 문제였다. 해방 이후 페이퍼 매체는 저널리즘의 길을 재빨리 찾고 있었으나, 후발 매체인 방송 매체는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한참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셋째는 방송 매체로서 우리만의 영상문법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필름을 매개로 한 영화적 영상문법을 차용하면서 방송은 내용마저도 사람, 사회, 세계에 대한 통찰력에서 성장장애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983년 2월 27일 첫 방송을 시작한 <추적 60분>은 이런 질문에 대한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짊어지고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시선은 시종일관 사람들의 삶으로 향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심층탐사 저널리즘이라는 형식으로 접근했며, 이를 위해 기존의 영상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영상문법을 구축하려 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내레이션 중심의 내러티브는 영상 중심의 내러티브로 확연하게 진화하면서 방송매체의 잠재적 가능성을 일깨우게 된다. 당시 한국일보는 TV비평란(83.8.9)에서 “<추적 60분>이 카메라로 삶의 현장에 가차없이 접근해서 새로운 앵글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점, 또 영상 자체로 충분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어 진행자가 프로그램의 말미에서 메시지를 정리해서 별도의 멘트를 할 필요를 시청자들이 느끼지 못할 만큼 영상이 갖는 「직접성」의 효과가 완벽한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1986년 5월 25일 제165회 방송을 끝으로 잠정 폐지된 이 기간을 제1기 <추적 60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2월 27일 부활한 제2기 <추적 60분>은 문제의식에 있어서 1기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대담은 제1기 <추적 60분>만을 대상으로 한다. 당시 <추적 60분> 제작반장을 맡았던 장윤택 PD를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는 <추적 60분> 이후에도 <뉴스비전 동서남북> <현장기록 요즘사람들> <기동취재 현장> <뉴스라인 11> <KBS스페셜> 등 KBS의 대표적인 심층탐사 프로그램 제작을 책임지다가, KBS TV제작본부장, 편성본부장, 스카이라이프 개국요원으로 방송운영본부장, TV조선 전무 등을 역임했다. 

<추적 60분>과 심층탐사저널리즘 그리고 피디저널리즘

이상요(이하 이): 장윤택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방송 역사에서 심층탐사저널리즘이란 말을 처음 열었고, ‘피디저널리즘’이란 용어의 토대를 닦은 이름으로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장윤택 1983년 당시 <추적 60분> 제작팀장. KBS TV제작본부장, 편성본부장, 스카이라이프 개국 요원으로 방송운영본부장, TV조선 전무 등을 거쳤다.

장윤택(이하 장): ‘피디저널리즘’이란 말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널리즘일 뿐입니다. 기자들이 추구했던 저널리즘에서 부족한 부분, 말하자면 심층적이고 현장 중심이면서 미래지향적인 것들을 담아주는 다른 저널리즘의 한 표현 방식일 뿐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기자보다 피디들이 열정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따로 ‘피디저널리즘’이란 말을 쓰는 것은 제작자 편의적인 명명일 뿐입니다. 심층탐사란 말을 처음 열었다는 것도 제가 우연하게 그런 류의 프로그램을 오래 맡다 보니까 그런 영예를 주는 건지 몰라도, 사실 그건 의도된 것도 아니고 운이었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송 역사 측면에서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그 역할이 저한테 부여되었습니다. 다만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고, 그 일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하는 걸 원했을 뿐입니다.

이: <추적 60분>이 1983년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추적 60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나라 방송 내용을 보면 뉴스가 있었고, 교양 프로그램, 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 이런 것들이 포진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83년에 <추적 60분>이 등장하기 전에는 방송과 저널리즘이 별 관계가 없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만. 

장: 80년대 언저리, 소위 5공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그 시기에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6-70년대에도 방송에서 나름대로 그 시기에 맞는 저널리즘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봅니다.

이: 83년 이전에도요?

장: 그러니까 TBC 뉴스가 그래도 뉴스로서 영향력이 있었고, 나름대로 저널리즘 역할을 했습니다. 우연한 일이긴 했지만 YH 사건도 TBC 보도로 나가면서 파급이 커졌습니다. 당직 부장이 그걸 거르지 못해서 방송 보도로 나가게 됐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70년대에 신문들이 ‘동아 사태’ 등에서 보듯이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물론 방송국에도 잘 하는 저널리스트들이 많이 있었지만, 거기에다 신문에서 이적해 온 사람들이 방송에 참여하면서 그 기질들이 방송에도 많이 이식된 면이 있죠. 기술적인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전달의 제한이 있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방송도 저널리즘 기능을 나름대로 수행했다고 봅니다. KBS는 그런 부분에서 좀 뒤떨어졌었지요. KBS 기자는 1973년 공사화되기 전에는 공무원 신분이었잖습니까? 그리고 심지어 KBS 기자는 기자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80년 ‘방송통폐합’ 조치 이후 기자, 방송인들을 대량 해직시켰는데 이런 걸 거치면서 상당기간 방송 뉴스가 정부 홍보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고 보면 되겠지요.

이: 신문 저널리즘이 있고, 방송 저널리즘이 있는데 확실히 방송보다 역사가 오래 된 신문은 이승만 시대 이후로 나름의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했다고 봅니다. 태동기에 방송이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려고 하니까,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그랬던데, 신문 쪽에서 차단해서 못 하게 하고, 방금 말씀하신 대로 기술적인 제약도 있었지요. 방송 저널리즘이 신문 저널리즘하고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어떤 방법론, 이런 것도 잘 몰랐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83년에 시작한 <추적 60분>은 방송에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저널리즘 기능을 구축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장: 당사자 입장에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매주 프로그램을 어떻게 제작하느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방송은 현장성, 동시성, 광파성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매체이긴 하지만 기계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장비가 있어야 되고, 그 장비들을 갖춰서 현장으로 가져가야 되지요. 그러다 보니까 방송은 오히려 신문보다 기동성이 떨어질 수가 있어요. 소위 ‘그림’이 있어야 하는데, 카메라맨이 촬영하기 전까지는 그림을 확보할 수가 없는 겁니다. 카메라맨이 촬영을 했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영상을 찾아내야 하고, 그걸 회사로 가지고 와서 필름 같은 경우에는 현상하고 인화하고, 그걸 또 편집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신문보다 영향력이 뒤떨어지는 입장이었는데, 그게 기술 발전으로 점점 변화하는 과정을 겪은 거지요.

이: 기술 발전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ENG 이런 건가요?

장: 네, 맞아요. ENG하고 SNG, 그게 가장 중요했죠. SNG는 촬영한 걸 동시에 리얼타임으로 전달해 주는 중계기이고, ENG는 현장을  생생히 촬영하고 녹화하기도 하는 카메라 장비지요. 이런 장비가 나오기 전에는 방송국에 한, 두 대밖에 없는 중계차가 제한된 현장을 커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 인상적이고 충격적인 TV현장 화면은 71년 12월 대연각화재와 74년 8월 육영수여사 피격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포착은 현장상황이 오래 유지되거나 행사현장에서 우연히 포착된 화면이었죠.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고 기동성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훨씬 기동성이 좋고 가격이 저렴한 ENG, SNG가 70년대 후반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현장을 담아서 전달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까 신문매체가 가질 수 없는 텔레비전의 굉장한 무기가 적절하게 발휘될 수 있었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현장이 ‘발생’한다

이: ‘현장성’과 ‘광파성’을 말씀하셨지만 ‘광파성’은 전달의 문제고,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현장성’이 신문 저널리즘과 차별화시킬 수 있는 특성이었을 텐데, 당시에는 ‘현장성’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셨습니까?

장: 현장 영상에 대한 고민, 현장 영상을 어떻게 포착하느냐란 부분이 방송 피디로서의 나에게 일관된 하나의 숙제였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추적 60분>에서 ‘7인의 형사특공대’를 제작할 때 그 분들 사무실로 가서 일주일동안 촬영하면서 첫 사흘 촬영분은 버리고 나중 며칠만 촬영한 걸 가지고 제작했거든요. 그때 내가 그들에게 신뢰를 주면서 그 사람들도 나에게 오픈하는 그런 부분, 그 다음에 그들과 그들의 만남에서 어떤 현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면 청소부 아들이 대학 수능 전체 1등을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명지대학 청소부였는데, 그 양반이 경기도 이천에서 농사를 짓다가 남편되는 분이 세상을 떠나자 거기 있다가는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들 둘 데리고 서울로 와서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시킨 겁니다. 큰 아들도 공부를 잘 했는데, 둘째가 전국 1등을 한 겁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시댁에서 도움을 제대로 못 받았어요. 그 때가 1월 1일인데, 그 시댁에 자기 아들하고 새해 인사를 간다는 겁니다. 그걸 인터뷰 플러스 현장을 해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가 시댁에 가서 대기하기로 했죠. 가보니까 온 집안이 난리야. 그 동네에 친척들이 많은데 이미 모든 어른들이 모여 있고 여자 분들은 일하고 있고, 한쪽에선 떡을 찌고 술을 들여오고, 읍내에서 가져온 꽃다발을 갖다 놓고. 그리고 나중에 ‘온다!’ 하고 소리가 나니까 가장 연장자 할아버지가 그 꽃다발을 들고 나가고 친척들이 쫙 다 따라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청소부 며느리와 손주를 맞은 거예요. 들어가서는 절하고, 하여튼 분위기가 좋았는데, 그게 다 현장이었지만 그런 현장에서 필이 온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일어났는데, 식사를 다 한 후에 그 종가 방안에 할아버지, 큰아버지와 다른 사촌 이런 사람이 잔뜩 모인 데서 집안에 가면 언제나 집안의 사회를 진행하는 그 누군가가 있기 마련 아닙니까? 그 어른이 모임을 주도하기 시작했어요. 재밌는 게 그 아저씨가, 아이가 말하자면 소위 장원급제 하고 돌아온 건데, 아이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된다’, 그걸 아이한테 얘기하는 겁니다. 아이가 이제 장원급제 했으니까, ‘너 어머니 고생하고 그랬으니까 어머니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그 얘기를 하는데, 그 다음에 나온 얘기가 뭐냐면 ‘큰아버지도 잊으면 안 된다’ 이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큰아버지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아버지는 그 모임에서 벽에 붙어서 서 있더라구요. 큰아버지는 만감이 교차되었겠죠.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어도 도와주는 건데 이런 생각도 있을 거고, 미안도 하고. 하여튼 모임에서 벽에 붙어 서 있기만 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눈을 만지더니 벽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묻히는거야. 그게 눈물이야. ‘큰아버지 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줌인한 카메라에 그 눈물자국이 딱 찍혀 버렸어요. 
거기서 뭘 느꼈냐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현장’이란 게 나온다. 그리고 그 현장 속에서 진실의 한 단면이 나온다. ‘현장’의 의미를 정리하는 말이 나온 거지요.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그런 부분들이 묶여져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개념이 된 것이지요.

현장의 의미를 포착하는 영상, 시청자들이 현장에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상

이: <추적 60분>은 방송 저널리즘에서 영상이 중요한 요소라는 걸 분명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동안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현장 영상이 많이 등장했죠. 10대 아이들 가출 현장, 청계천 밑바닥, 그리고 대학생 서클 엠티 장소에서 일어난 일, 그뿐만 아니라 몸에 좋다고 뱀 잡고 하는 몬도가네 현장 같은 것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런 것들은 그동안의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보지 못했던 영상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추적 60분>에서는 현장 영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방향성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장: 현장을 담을 수 있는 ENG라는 카메라가 지급되었지만, 보도는 1분 30초라는 짧은 보도 형식 때문에 현장을 담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었고, 우리도 카메라가 포착해야 할 현장의 의미가 뭔지, 그 의미에 따라서 화면을 어떻게 적절하게 포착하고 또 절제해야 하는 건지 이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현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어떻게 현장의 리얼리티를 포착할 수 있는지는 잘 몰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추적 60분>에 대해 시청자들이 왜 그렇게 열광적이었냐 하면, 그동안 방송 기술이 발전하고 텔레비전 보급도 늘어나고 컬러로 전환도 했는데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그걸 <추적 60분>이 처음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저게 뭐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이런 긴장감을 처음 맛봤던 겁니다. 임팩트가 컸어요. 가치 있는 현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시청자들이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거죠. 그게 <추적 60분>이 준 임팩트였습니다. 그 화면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의미를 띄고, 어떤 임팩트가 있는지, 그런 연구나 교육을 받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제작하면서 느껴갔던 거지요.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을 충격적으로 맞닥뜨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추적 60분> 최초 기획자는 이원홍 사장이었다

이: <추적 60분>을 처음 만든 배경이 뭡니까? 그러니까 미국 CBS가 <60 minutes>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타이틀만 보면 그걸 모델로 삼은 것 같기도 한데요. 

장: <추적 60분>의 최초 기획자는 5공 시절 이원홍 사장이었습니다. 이원홍 사장은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편집국장까지 한 분입니다. 주일본 한국대사관에서 공사로도 근무했었어요. 일본에 있을 때 일본 프로그램을 엄청 모니터링 한 겁니다. 
83년 2월 경에 저는 ‘인플루엔자를 막아라’라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는데, 안국정 당시 부장이 날 불렀어요. ‘새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프로그램에 당신이 팀장이다, 그리고 당신이랑 같이 할 프로듀서는 홍성주와 신완수, 길환영이랑 장해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첫 방송이 2월 27일인데, 10일 정도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죠. 부랴부랴 기획에 들어가고 사장에게 보고서 들어가고 그랬는데, 그때 부장이 준 게 사장이 준 테잎 하나였어요. ‘이거처럼 만들어라’라는 주문과 함께요. 그게 일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한 가지 테마를 두 명의 리포터가 시시콜콜하게 추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장이 준 테이프에 들어있는 프로그램의 테마는 ‘라면의 원조가 누구냐’라는 건데, 라면의 원조가 누군지 찾는다고 두 명의 리포터가 여기저기 다니는데 심지어 북한도 가고 홍콩까지 가고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르포르타주죠 뭐. 그러니까 라면의 원조를 찾는다는 테마를 가지고 그 과정을 르포르타주 형태로 이어가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과정에 여러 가지 현장이 나오는 형식이었지요. 그래서 우선 몇 개의 기획을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현장을 쫓아다닐 리포터들이 그 당시에 없다는 점이었지요. 아나운서들이 중계 때 현장에 서 있는 건 있었지만, 현장을 다니는 리포터라는 것은 그때 방송 공식에는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현장을 쫓아다녀야 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아나운서들은 돈 안 주고 데려 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4~5일 쭉 데리고 나갈 수는 없잖아요. 데리고 나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연출하기도 힘들고, 복잡해지는 거죠.

이: 그래서 피디가 바로 해버리자, 이렇게 된 건가요?

장: 처음에는 피디가 바로 해버리자 그게 아니라, 리포터가 현장에 가는 것은 어렵고 하니까 종합구성으로 가자는 쪽이었습니다. 우리가 올린 여러 개 아이템 가운데 사장이 첫 아이템으로 낙점한 것이 ‘한국의 헐리우드-충무로 영화가’였습니다. 그리고 MC는 김양일. 첫 방송을 불과 열흘 남짓 남겨놓은 상황에서 피디들이 촬영에 들어갔어요. 뭘 짜기 전에 일단은 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첫 프로그램은 어수선한 과정에서 방송 사고도 나고 하면서 기대한 만큼 나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화가 복이 된 게, 우리가 동원하기 어려웠던 현장 리포터를 안국정 당시 부장이 ‘야 이거 피디들이 해’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국정 당시 부장이 피디들 니네가 해라는 말 한마디에 포맷이 바뀌어 버린 거죠. 피디가 현장으로 카메라 들고 뛰게 된 겁니다.  

   
▲ 초기 <추적 60분> 녹화 스튜디오 모습. 왼쪽이 김양일 MC, 오른쪽은 홍성주 PD. ⓒ <추적 60분> 화면 갈무리

이: 피디들이 직접 리포트를 맡게 된 것이 치밀한 기획의 결과가 아니었군요?

장: 이원홍 사장을 ‘왕피디’라 그랬는데, 왜 ‘왕피디’라 그랬냐면 자기가 편성이나 프로그램 기획에 직접 관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이디어 회의하고 준비하고 토론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사장한테 안이 올라가고 그러는데, 그때는 사장이 직접 프로그램 아이디어 내고, 구성이나 원고까지 피디처럼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추적 60분>도 그런 특이한 상황에서 일본 프로그램 하나 주고 건진 거죠. 그러니까 결국 <추적 60분>은 이원홍 사장이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안국정 부장은 그것을 받아가지고 팀을 짜고, ‘피디들 니네가 리포트 해’ 그랬는데, 그렇게 하라는 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그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할 수밖에 없었지요. 스튜디오도 카메라 앵글 형식으로 정하고 말이죠. 
    
이:  첫 번째 아이템도 사장이 줬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도 쭉 그랬나요? 

장: 두 번째 아이템은 신완수 피디하고 홍성주 피디가 ‘몬도가네’로 가자고 하더군요. 나도 될 것 같아서 동의해어요. 그게 ‘한국의 몬도가네-몸에 좋으면 뭐든지’였는데, 이게 대히트를 쳤어요. 그게 대히트 칠 걸 누구도 예측 못 했습니다. 그렇게 대히트를 치니까 그 다음 아이템을 사장이 또 줬어요. ‘긴급점검, 심야지대’가 그런 과정을 거쳐 방송됐어요. ‘몬도가네’는 우리가 기획했고.

이: 그러니까 이게 타이틀로 보면 CBS의 <60 minutes>와 유사한데.

장: 그것도 사장이 정한 겁니다, <추적 60분>이라는 타이틀도.

이: 실질적으로 내용은 거의 일본 프로그램을 모델로 한 것인가요?

피디 리포트는 현장성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켰다

장: 그러나 피디들이 직접 리포터로 나서는 방식은 그때까지 한국에서 나오지 않았고 일본과도 다른 독창적인 포맷이라 볼 수 있습니다. 피디들은 자신이 직접 출연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피디들보고 하라고 시켰어요. <추적 60분> 첫 편은 박살이 났거든요. 첫 편에 박살이 나니까 ‘싫어요’ 할 상황이 아니라 나갔습니다. 그런데 잘 하더라고요. 놀랐어요. 그게 완전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 피디들을 직접 출연시키는 조치가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장: 우선 현장성이 강화됐어요. 현장성이 확 살았어요. 그 다음에 포맷이 심플하고 명확해졌습니다. 현장에 가서 피디가 직접 인터뷰 하고, 촬영에도 참여하고 하니까 카메라 앵글도 딱 나오게 돼 있거든요. 포맷은 심플해야 돼요. 그 포맷이 우리나라 방송사에서는 첫 시도였는데, 제가 보기에는 매우 독창적이었습니다. <60 minutes> 같은 경우에는 리포터 있고, 피디 있고 다 있습니다. 사실은 제작비도 부족하고 제작시간도 부족해서 이렇게 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청자가 같이 현장에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현장감을 좀 더 극대화시켜 줬군요?

장: 극대화 시키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맡아서 2주라는 짧은 제작기간 내에 60분을 마크해야 했습니다. 60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별 취재거리나 내용이 없어도 현장에 들어가서 피디가 취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나름대로 긴장감을 살리고, 결과적으로 심플하면서 전달력이 좋은 포맷을 창출했습니다. 

이: 현장성, 피디 리포트 이런 요소를 축으로 한 새로운 포맷으로 매우 인상적인 성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닐슨이나 TNmS 같은 시청률 조사기관이 없던 때라 다른 조사기관에서 간이 조사를 했는데 ‘긴급점검-기도원’ 같은 경우는 시청률이 거의 40%까지 나왔더군요. 두 번째 방송된 ‘한국판 몬도가네-몸에 좋다면 뭐든지’ 영상이 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선정적이기도 하구요. 

장: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역사의 진행이 정치적인 의도보다는 사회적 축적을 바탕으로 우연적 요소가 결합해서 생각지도 못 한 그런 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농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오히려 민주화를 키운 면도 있어요.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화로 농촌인구가 수도권으로 많이 유입했잖습니까? 이런 변화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죠. 대중들의 생각이 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탁월하고 정치적인 신념으로 뭉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를 이렇게 바꾸자’는 엘리트 중심적 힘만으로는 사회가 변할 수 없습니다. 대중들의 생각이 바뀌는 시대적인 상황이 우연한 기회에 점화되면서 변화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방송도, <추적 60분>도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거기에 이원홍 당시 사장이 기여를 한 거고, 안국정 당시 부장이 그걸 지원해준 거고, 제작팀이 ‘몬도가네’ 등 몇 개를 터트리니까 <추적 60분> 현상이라 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사회 변화를 촉진시키는 그런 면이 있었지요. 집에도 못 들어가고 계속 작업하고 그러니까 진행비도 많이 주고. 그 당시로서는 진행비가 파격적이었어요. 

조폭도 <추적 60분> 카메라를 무서워 했다?

이: 그렇게 하다가 생명의 위협도 느끼고 협박도 받고 그랬다면서요?

장: 조금 과장됐습니다. ‘몬도가네’ 이후 사대문 안에서 혐오식품 영업을 못하게 조치가 취해졌어요. 그때 영업하던 사람들이 다 망했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KBS에 뱀 풀겠다’ 이런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그때 뱀 풀겠다던 사람이 지금은 업종전환해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저희를 초대까지 해서 대접 잘 받았습니다. 전화위복으로 삼은 거죠.
내가 위협을 받은 적이 있는데. <추적 60분>이 잘 나가니까 사장이 신이 났어요. 아침 회의 때 <추적 60분> 관련 사항을 제일 먼저 보고받았지요. 시청률도 가장 높고, 광고가 그 사이에 막 들어오고 난리가 난 거죠. 그래서 사장이 직접 기획도 하고 그랬습니다. 한번은 사장이 청계천을 뒤지라고 하더군요. 청계천 지하가 궁금하기도 하고, 주변에는 깡패도 많고, 미군들은 청계천 근처로 다니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폭발 위험 때문에. 그래서 ‘서울의 불가사의-청계천’ 편 제작을 위해 신완수 피디랑 저랑 취재를 나갔습니다. 얘기될 만한 것을 찾다가 청계천 깡패조직을 취재하려고 잠복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 촬영에 성공했어요. 방송 나갈 때는 그 사람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방송이 나가니까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이 누군지 다 아는 겁니다. 그때 보통 일주일에 3~4일은 집에 못 들어갔습니다. 방송 전날에는 정신없이 편집하느라고 예외없이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아무튼 그때 밤 꼬박 새고 회사근처 대중목욕탕에서 대충 씻고 출연해서 방송 한 시간 전에 겨우 녹화 끝내고, 청계천 방송 나가는 것 보고 집에 들어와 골아 떨어졌어요. 자고 있는데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청계천’에 방송나간 그 친구가 회사 쳐들어 왔다고. 
그때 나는 어린 딸 둘이 있었는데 내가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집을 나와 가지고 회사로 그 사람을 만나러 갔죠. 회사 입구 옆에 회사 경비랑 영등포서 경찰 몇 명이랑 같이 있더군요. 이 사람이 자기는 억울하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잡범 전과 13범이야. 그리고 삼청교육대를 갔다 왔어. 그러니까 한 번 더 걸리면 진짜 어려워지는 사정이라는 겁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이 사람이 방송을 보는 순간 놀래가지고 밖에서 밤새고 트레이닝복 바람으로 회사로 찾아왔던 겁니다. 말하자면 나를 협박하러 온 게 아니라 자기 하소연하고 구제해 달라고 호소하러 왔던 거죠. 그러면서 자기 어머니께 말 좀 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 어머니 만나서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취지로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너무 고마워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다음 편 아이템이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그 전과 13범을 다음 아이템으로 갔습니다. 그게 ‘어느 전과자의 고백’입니다. 

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명예회복 기회도 됐겠군요.

장: 그런 면도 있었겠지요. 그 사람을 스튜디오 앉혀 놓고 인터뷰를, 자기 인생 얘기를 했는데, 그걸 사람들이 또 많이 시청해요. 조세형 사건이 그 전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조세형인 줄 알고 오해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워낙 <추적 60분>이 히트를 칠 때니까 우리보다 그 사람들이 KBS 카메라를 더 겁냈습니다. 당시 5공 시대였던 탓도 있어서 KBS 기자나 카메라를 두려워했어요. 나는 그때 그걸 몰랐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방송 카메라가 현장을 휘젓고 다니면서 제작했지만, 현장을 취재한 것은 어디까지나 ‘왜 이러지?’, ‘뭐가 문제지?’ 이런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시청자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 시청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는 취지였습니다.
신이 나니까 3편도 사장이 직접 아이템을 주더군요. 심야지대에 가보라고.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야간통행금지 해제, 교복자율화 이런 조치들을 취했는데, 당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취재에 홍성주, 신완수 PD가 나가고 나는 팀장으로서 현장에 나가지 않고 데스크를 하면서 다음 편을 준비했습니다. 다음 아이템으로 준비한 게 ‘어떤 여인의 죽음’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한 배경에는 첫 번째 프로그램인 ‘한국의 헐리우드-충무로 영화가’가 실패한 이유가 데스크 기능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충무로 영화’ 제작할 때 피디 몇 명이 나누어서 취재 편집하고 전체를 종합하는 제작 프로세스를 취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역할 배분을 컨트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컨트롤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첫 회 제작에서 홍성주 PD가 아주 잘 만들긴 했는데 혼자서 15분 동안 기승전결을 다 해버린 겁니다. 거기서 이거는 민주적으로 할 게 아니라 전체 제작 프로세스를 장악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몬도가네 부터는 종합편집을 총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몇 명의 피디가 협업 시스템으로 제작을 하니까 그런 문제가 생기는군요.

장: 그렇습니다. 처음엔 나도 취재 나가고 현장 뛰면서 같이 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급하고 그리고 나중에 편집하면서 의견을 통일시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 후부터는 피디들은 다 밖으로 나가 뛰고, 나는 전체를 모아서 편집하고 지휘하고 연출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구성 편집을 하느라고 현장 피디들이’ 촬영해온 “심야지대” 테이프를 보니까 통금 이후의 밤이  정말 신기하더군요. 5공 정부가 통행금지를 풀어주었는데 그때 생긴 밤의 문화, 이런 걸 처음 봤습니다. 심야유흥업이 활발해지고 여러 가지 무질서도 일어나고, 이런 걸 여과 없이 촬영한 내용이었어요. 그걸 종합적으로 편집하면서 예전같으면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늦은 밤에 청계천에서 춤추는 여자 인터뷰를 넣었습니다. 그 여자는 당당하게 얘기했어요. ‘내 생일이고, 친구들이 모여서 같이 춤을 췄다, 뭐가 잘못됐냐?’ 딱 그 말을 하는 겁니다. 당당한 여자를 본 겁니다. 당시 편집은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생각을 했냐면, 심야통금 이후의 밤문화가 획일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균형성을 생각하면서 앞부분에 무질서한 밤 현장을 편집하고 그 다음에 여자가 춤추는 걸 넣고 인터뷰까지 넣었어요.   
그런데 그게 방송 나가고 나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MC였던 김양일 씨가 그 장면을 보더니 “저런, 쯧쯧쯧...” 이러더라고.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같으면 내가 충분히 여자의 다른 생각을 보완해서 다른 의미를 보여주면 되는데, 당시 거의 생방송에 가깝게 제작이 진행되었거든요. 수정하거나 보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아주 박살난 거지. 다음 날 전화가 왔는데 파혼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 대단한 시청률이 나왔어요.

현장의 의미를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라 

이: 편집할 때 의도와 반대로 시청자들에게 전달됐군요.

장: 절제된 내레이션을 쓸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생방송에 가깝게 진행되는 통제되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그게 나간 거죠. 굉장히 미안했고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제작진들에게 얘기는 안 했어요. 사실 나도 <추적 60분>이 싫었어요, 솔직히. 이미 그때부터 김이 조금씩 새기 시작한 거죠.

이: 이 프로그램이 83년에 시작해서 1차로 86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 이런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장: 가장 인상깊었던 건 ‘긴급점검-기도원’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요. 우리나라 기도원은 정신질환자들을 보호하는 곳이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관리해주고 지원해주는 치료 시스템은 갖추지는 않았습니다. 

이: 그냥 수용만 하고 있다는 거죠?

장: 치료는 커녕 나라에서 관리하는 수용시설도 거의 없업죠. 그러다 보니 사설 기도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돈이 되니까. 그런 가족을 가진 사람들은 어디 전세도 못 들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저렴하게 관리하는 방법이 기도원이란 이름으로 가둬두는 거였지요. 그렇게 되다 보니까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조금만 이상해도 가족들이 환자를 이곳에 보낼 수 있고, 재산 문제에서 뭔가 잘 못 되면 어느 날 갑자기 힘 센 청년들이 와서 그냥 집어넣으면 들어가서 못나오는 겁니다. 이런 일도 생기고 그러니까 그런 걸 방송하자고 처음엔 의도했습니다.
그걸 홍성주, 길환영 피디가 제작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현장 영상을 다 담았지요. 대단한 임팩트를 가진 현장 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어떤 문제가 파생됐고, 그래서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지 이런 절제되고 저널리즘적인 구조적 시각보다는 현장적 비판만 강했어요. 그게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게 너무 많이 나갔기 때문에, 물론 피디들이 출연해서 말로는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영상 부분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분법, 저런 나쁜 놈, 불효자 이렇게 돼버린 것이죠. 물론 이 방송이 보건 당국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해서 예산 배정하고 시스템을 만들고 보완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하고 있는 기도원들과, 기도원으로 노인이나 정신질환자들을 보낸 사람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 거거든요. 그런 부분에선 완전히 매도된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엔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워낙 히트를 쳤기 때문에.

이: 좀 단순하게 말해서 피디들이 구사하는 저널리즘은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에 의존하기 보다는 좀 선정적으로 접근하는 주창저널리즘이 될 수 있다, 그런 뜻인가요?

사람들의 삶에 다가가는 프로그램으로 방송의 흐름을 바꾸다

장: 그런데 그건 피디들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피디는 한 시간 동안 프로그램을 책임져야 하잖아요?. 제작 시간이 모자랍니다. 지원도 없구요. 그런 상태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했어도 그렇게 밖에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피디들이 문제가 아니라 제작자들이 처해있는 제작 환경과 제작 여건을 가지고 논의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는 거지요. 

이: 83년 2월에 신설되어서 86년 5월에 <추적 60분>이 잠정 폐지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심층탐사 저널리즘을 시도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장: 원용진 교수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하더군요. 사실 탐사저널리즘을 개척했다 이건 부산물이고 제가 생각하는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유신과 5공 시대를 겪어가면서 KBS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이외에는 정책 홍보를 백업해주는 프로그램 위주의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작가정신을 가지고 세련된 작품성을 가진 당시 최고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초분’(정수웅), ‘한국전쟁’(강대영)같은. 저는 방송이라면 보는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 살아가는데 변화도 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적 60분>은 처음으로 삶의 현장에 다가갔습니다. 민초들, 시민들의 생활이 있고 삶이 있는데 이 사람들의 삶의 상황적 조건이라는 게 있어요. 이 상황적 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그 사람들의 삶에 다가가는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지요. 방송 프로그램들이 그런 흐름을 형성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계기를 <추적 60분>이 마련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현장입니다. 기술적으로는 현장 영상이죠. 시민들의 삶에, 그 사람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적 조건과 삶의 현장으로 간 최초의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그러니까 현장에 다가간다는 것은 그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상황에 그대로 다가간다는 뜻이 되겠군요. 프로그램을 작품으로 접근했던 제작자들은 그 사람들의 모습을 대상화시킨 것이 되구요. 이쪽이 그 사람들을 찾아가고 섞여서 상황을 개선하려고 했던 반면에 다른 쪽은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교육시키는 것이었다는 뜻이 되겠군요.

장: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현학적인 현장 아니면 지나간 과거에 대한 정리 이런 것을 다루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텐데, 그 모습에 다가가서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프로그램들이 그런 걸 중시하도록 터닝 포인트를 마련해준 방송이 <추적 60분>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작품, 프로듀서, 작가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널리즘적인 면모를 방송사에 준 첫 프로그램이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추적 60분>이 그런 역할을 하는 물꼬를 텄다는 거죠. 그것도 5공 시절에. 우연하게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그런 욕구를 바탕으로 생겨난 거다 그거죠.
새로운 현상이라는 게 어떤 시대가 오면 ‘야, 가자!’ 뭐 이런 식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지요. 역사의 진전은 개개의 우연한 요소가 어떤 계기로 묶여져서 나오는 거지 어느 순간에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계기를 그 시대에는 <추적 60분>이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이,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는 그런 자리매김을 해주고 싶습니다.  

이: 그런 접근방식이 시청률을 높이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당사자들의 인권이나 프라이버시와 관련해서 반감이나 문제 제기도 많지 않았습니까?

장: 처음 6개월 동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제기 하는 사람도 없었고. 업소고 뭐고 막 들어가서 카메라를 휘둘러버리고 그랬죠. 언젠가 한번은 술집을 촬영했는데 거기서 술 먹던 사람이 방송을 보던 자기 부인한테 걸렸어요. 그러니까 이제 반감들이 생기는 거죠. 점점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현장을 중시하면서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고 그랬는데,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그동안 문제시하지 않았던 프라이버시 문제, 초상권 문제, 촬영하는 기법의 문제나 태도 또는 윤리와 관련해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있는 그대로의 현장을 담겠다는 새로운 방송 흐름이 생기면서 이런 문제들도 생겨난 거죠.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이런 것들은 정책 홍보 프로그램같이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얘기가 중심이 아니라, 시청자와 수용자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 현장의 문제를 짚어내고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제기된 그런 문제들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 최초의 프로그램이거든요.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방송의 주인은 시청자지요. 그 주인의 삶이 묻어있는 현장에서 희망과 절망과 여러 가지 들여다 본 거지요. 나중에 방송 민주화가 시대적 화두가 되면서 <추적 60분>같은 프로그램을 거쳐서 올라온 피디들이 역할을 많이 하더군요. 

이: 그래서 그런지 항간에는 ‘장스쿨 키즈’ 이런 이야기도 나오더군요. 그건 그렇고 그런 성과, 평가들은 기획의 결과였다기 보다는 당대의 요구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고, 그게 시사탐사 프로그램의 기반도 닦았다는 뜻이군요.

심층탐사 프로그램 정규화 – 인적, 물적 리소스 투입이 관건

장: 의도하지 않았지만 축적된 그런 부분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런 것도 있죠. 농담 겸 이런 얘기를 하는데, <추적 60분>의 성과가 뭐냐.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초상권 그런 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게끔 만들어준 프로그램다, 그런 부분에 대한 인식을 업그레이드 시켜준 프로그램이다 하는데, 맞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100회 특집 방송에 출연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추적 60분>과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 늘 가졌던 생각은 이런 겁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진 프로그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프로그램을 정규화 함으로써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건이나 상황이 일어나는 배경과 구조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팩트의 범위 내지는 그것의 문제점 이런 걸 점검하고 정리해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라다 보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정확한 검증과 방향 제시에 문제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사숙고해야 하고 많은 인력이 오랜 시간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데, 프로그램을 정규화하니까 자연히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그런 류의 프로그램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성과가 좋다보니까, 시청자들의 평가도 좋다 보니까 비판도 받는데, 비판을 받을만한 한계가 분명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피디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사가 가지고 있는 역량의 문제입니다. 그런 조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그런 프로그램에 투자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결국 물적, 인적 리소스가 더 많이 투입되어야 하고 더 많은 제작시간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군요.

장: 점검해야 하고 팩트에 대한 정확도도 있어야하고 거기에 대해 신뢰받을 수 있는 패러다임도 규정해야 하는 등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그게 큰 제약을 받다보니까, 그렇게 나가다보면 과장하고 아주 운 좋게 걸린 현장을 마치 100% 진실인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왜곡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거는 리얼리티, 진실이 아니죠. 부분적인 팩트일 뿐이지. 1분 짜리를 10분 동안 얘기하다 보면 그게 필요 이상의 과장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의도하지 않았던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지요. 그게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사실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런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 그러다가 프로그램이 폐지된 사유는 뭔가요?

장: 이원홍 사장 다음에 KBS 사장으로 취임한 박현태 사장이 이 프로그램을 싫어했습니다. <추적 60분>은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도 꼭 시청했다고 해요. 시청 후에는 프로그램이 제기한 문제를 사회정화위원회로 하여금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반정부 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도 했지요. 

이: <대학가의 검은 덫-지하서클>이었지요. 84년 2월에 방송된.

장: <추적 60분>이 워낙 인기 있으니까 그 시간을 활용해 보려는 상층부의 압박이 있었습니다. 고참 피디들이 거부하니까 부장이 후배 피디들에게 촬영, 편집하게 하고 보도국 기자를 출연시켜 방송했습니다. 불방 처리된 아이템으로 ‘오늘의 학원,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 게 하나 있었는데, 자격증을 남발하는 학원과 이런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상을 추적하는 방송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당시의 취업실태가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경제가 시원찮다 그런 것과 연결되면서 심의실에서 문제제기를 했고 심의실장이 사장께 보고 하더니 불방처리 했어요. 85년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태 직후였습니다. 당시 박현태 사장은 정치부 출신이었습니다. 박 사장은 나라의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을 원하지 이런 걸 원치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이 현장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는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 심의나 이런 데서 문제 있다고 나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피디들은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구체적으로 필요한 법이나 제도를 만들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끌어내는 게 방송이 할 일이라고 보았지요.   

   
▲ ‘대학가의 검은 덫-지하서클’(1984.2.12.)과 ‘오늘의 학원, 무엇이 문제인가’( 1985.8.18.)특히 ‘지하서클’은 <추적 60분>의 인기에 편승하여 정권이 대학생들을 불순한 무리로 몰아가려는 시도로 제작된 프로그램이었다. 피디들이 제작을 거부하자 다른 부서 인력을 동원해 제작했다. ⓒ <추적 60분> 화면 갈무리

이: 방송의 영향으로 제도나 법이 바뀐 사례가 있나요?

장: 가령 ‘긴급점검-기도원’이 방송되고 난 후 노인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복지 시스템이 바뀌었어요. 그 다음에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을 수 있도록 ‘182 신고전화 제도’를 신설한 사례도 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라이버시, 인권 문제와 관련한 인식들이 많이 강화되었습니다. 

<추적 60분>은 사회 각 분야의 제도적 개선을 견인하면서 심층탐사 프로그램의 신뢰성과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선정주의, 개인의 초상권이나 사생활 침해, 매스컴에 의한 여론 재판 등의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폐단과 관련한 사례는 제작진 요인보다는 상황적 요인에 기인한 바가 컸다. 정치 상황의 폐쇄성과 경직성으로 인한 취재의 한계, 빠듯한 제작 일정과 인적 물적 제작 지원의 부족, 이로 인해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접근과 해결보다는 지엽적인 주변 사안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추적 60분>이 1986년 5월 막을 내린 후, 한동안 우리나라에는 심층탐사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았고, KBS는 시청료 거부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추적 60분> 정신은 진화 발전하고 있다

이: 86년 5월에 <추적 60분>이 폐지되고 오늘날의 MBC <PD수첩>이 90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92년, 얼마 전에 1000회(했죠). 이렇게 되면 86년부터 90년까지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시사탐사 프로그램 공백기가 생기는데 그 사이는 그야말로 시사탐사 프로그램의 공백기였나요? 아니면 <추적 60분>이 진화 발전된 형식이 이어졌나요?

장: 진화 발전된 형태가 있었지요. <추적>이 잠정 폐지되면서 <르포 20/20>이라는 프로그램이 신설됐고, 그 다음에 <뉴스비전 동서남북>이 있었습니다. 87년 6.29 선언 이후에 사회 전반에서 민주화 욕구가 분출됐고, 이런 현상은 KBS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그해 10월 신설된 프로그램이 <뉴스비전 동서남북>이었습니다. 
<뉴스비전 동서남북>의 기본방향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why? 왜? 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의문 위에 전할 것은 전하고 캐낼 것은 전부 캐낸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습니다. 둘째로 감성적인 부분과 정보를 쉽게 전달하는 방식을 적절히 조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기 쉽게 전달해야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항은 뉴스 그 자체는 매우 논리적고 사실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본질과 사실을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방향이었습니다. 셋째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현실과 현장에서 출발하되 사회 구조적인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밝힌다는 것이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뉴스비전 동서남북>이 <추적 60분>보다 ‘심층탐사프로그램답다’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대담의 주 내용이 아니므로 장윤택 피디 본인의 다음 글로 <추적 60분> 이후 상황의 전말을 대신한다. 

“초기 <뉴스비전 동서남북>은 아직도 민주화의 시계가 불분명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87년 대통령 선거, 전교협 파문, 국제그룹 공중분해의 내막, 히로뽕, 문화재 도굴 현장, 사학비리 등 사회 구조 속에서 민주성과 비민주성이 갈등을 빚는 다양한 현장을 냉철한 논리 분석으로 문제점과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결국 88년 여름, ‘서울대 5월제’와 ‘6․10 남북학생회담’ 취재 등으로 방송사 간부와 제작 팀장, 팀원들 서로가 다른 입장을 보이는 등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으면서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팀원들이 「뉴스비전」팀을 떠났고, 새로운 팀으로 구성되었다.”(장윤택, TV의 사회고발 프로그램, 한국언론연구원 연구서 13.).

<뉴스비전 동서남북>의 의미와 성과 그리고 한계는 또 다른 논의의 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은 분명 제대로 된 심층탐사 프로그램을 필요로 한다. 그런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은 무엇일까?

“언론매체 가운데 하나인 방송의 기능을 얘기할 때 환경감시나 불침번을 첫 손으로 꼽는다. 그리고 이 기능을 앞장서서 수행하는 프로그램은 사회고발성 심층보도물이다. <추적 60분>과 <뉴스비전 동서남북>은 아직도 우리 방송계가 사회고발성 심층보도물을 정규 프로그램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산, 인력 및 시간의 부족, 소재 제약, 취재 담당자의 전문성 부족, 정보의 폐쇄성, 자신들의 이익이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부정과 비리의 개선에 무관심한 시민의식,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크고 작은 압력 등 아직도 해결해야 될 과제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이것은 1차적으로 방송인들 스스로 해결해야 될 과제임에 틀림없다. 가치있는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방송 언론의 전문화를 위한 끝없는 수련과 윤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 용기, 투자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분위기가 공존할 때에만 진정한 사회고발 프로그램이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을 「추적 60분」과 「뉴스비전 동서남북」은 말해주고 있다.”(장윤택, TV의 사회고발 프로그램, 한국언론연구원 연구서 13). 


<공영방송> 5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 : 유수빈 기자

이상요 교수 leesy54@kbs.co.kr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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