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선거 개혁

▲ 박고은 기자

뉴질랜드는 한때 ‘선거에 의한 독재권력’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단일 정당이 막강한 힘을 독점하는 국가였다. 특히 1984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집권한 노동당은 ‘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기존의 진보 정책에서 신자유주의 기조로 과감하게 정책을 선회했다. 그 결과 ‘약육강식’의 경쟁논리가 강조되면서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집권 정당이 지나친 권한을 독점하는 정치제도는 곤란하다’는 각성이 일어났고,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담론이 사회적으로 확산됐다.

뉴질랜드는 1990년대 중반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지역구의원을 선거로 뽑는 것과 함께 정당별 득표수에 따라 비례대표를 대거 배분해 결과적으로 군소정당이 원내에 쉽게 진출하도록 만드는 제도였다. 국민들은 이 제도를 선택했다. 이를 계기로 뉴질랜드는 소선거구 1위대표제, 양당제, 단일정당정부 등을 특징으로 하는 ‘다수제’ 민주국가에서 비례대표제, 다당제, 연립정부 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합의제’ 민주국가로 전환됐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만족도는 크게 높아졌다.

우리나라는 과거의 뉴질랜드처럼 선거에서 1등을 차지한 후보와 정당만이 힘을 갖는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다. 그래서 우리 정치에는 노동권 존중, 환경보호 등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군소정당의 활동 공간이 거의 없고, 지역할거주의 등 비민주적 증상들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네덜란드 정치학자 아렌트 레이파르트에 따르면 36개 주요 민주주의 국가 중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가장 ‘불비례성’이 높았다. 유권자가 행사한 표 중 실제 의석으로 연결되지 못한 표의 비율이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높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시행하고 있는 소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당선자만 배출하기 때문에 매 선거마다 전체 유권자수의 절반에 가까운 1천만 표 가량이 사표, 즉 죽은 표가 된다. 지역주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신출내기 정당은 원내 진입이 힘들고, 영남과 호남 등 지역기반이 튼튼한 기득권 양당은 독과점 체제를 굳히고 있다. 이런 폐해를 줄이자는 취지로 비례대표제가 도입돼 있긴 하지만 비례의원 수가 전체의석의 18%에 불과해 ‘사표 최소화’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독일은 비례대표 비율이 50%고, 일본과 멕시코도 각각 37%와 30%로 우리보다 훨씬 높다.

▲ 한국은 선거에서 1등을 차지한 후보와 정당만이 힘을 갖는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다. ⓒ Pixabay

이념과 정책 대신 지역과 인물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나라의 양당제는 선거철 득표 전략으로 유권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하다가 선거가 끝나면 공약을 내던지는 ‘배신의 정치’를 일상화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한 경제 민주화를 외면하고 경기 활성화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 단적인 예다. 이렇게 속고도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죽으나 사나 우리 편’과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를 찍음으로써 양당제를 공고화한다. 이런 정치를 혐오하는 유권자는 투표를 포기한다. 국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대 양당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고민 대신 공천권을 둘러싼 다툼 등 각자의 기득권 지키기에 몰두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이제라도 뉴질랜드의 선거개혁을 배울 필요가 있다. 사회 각층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는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 독일의 ‘정당명부식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유권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1인 2표를 행사해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을 각각 선택하고, 각 정당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받는 방식이다. 독일은 전체 의석의 절반가량을 권역별로 각 정당이 정해둔 비례대표에게 배정해 군소정당을 찍은 표도 사표가 되지 않게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다당제에서는 어떤 정당도 의석 과반을 차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정당 간 연합이 불가피하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를 절충하는 ‘협의’의 문화가 발달한다. 네덜란드가 1990년대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구하면서 한편으로 복지정책을 통해 ‘노동의 안정성’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구성된 연립정부의 타협 덕이었다.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신음하는데도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정치를 우리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뉴질랜드에서 국민들의 압력이 낡은 정치를 밀어냈듯, 우리도 ‘1등만 행세하는 정치’를 폐기처분하기 위해 유권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언론이 토론의 멍석을 깔아야 한다. 비례의원 비율을 50% 가까이로 늘리면서 전체 의석수 증가도 어느 정도는 허용하는 방향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 그래서 여러 정당이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경쟁에 목숨을 거는 정치구도를 만들자. 세비 삭감을 포함한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가 병행된다면 정치혐오증에 걸린 유권자를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편집 : 문중현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